20년 동안 가수 ‘연시내’로 활동했지만 ‘윤시내’의 이미테이션이라는 이유로 가짜 취급을 받는 순이(오민애), ‘리얼’이고 ‘실제’인 상황을 몰래카메라로 중계해 조회수를 높이는 BJ 장하다(이주영)까지 <윤시내가 사라졌다>는 무엇이 진짜냐고 물을 법한 아이러니한 캐릭터와 상황으로 가득하다. 김진화 감독은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온 정체성과 관계에 관한 내밀한 질문을 전설적인 디바 윤시내라는 먼 존재로부터 풀어낸다. 가수 윤시내의 아우라가 요즘 관객까지 사로잡을 거라는 확신, 애지중지 바라보던 배우들의 연기가 빛날 거라는 확신만큼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짜다.
-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오민애 배우가 배우상을 받았다. 배우를 발견하거나 연기를 이끄는 노하우가 있나.
= 나는 배우나 연기 행위를 좋아한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 중에서 왜 영화를 선택했냐고 묻는다면 연기를 좋아해서라고 말할 정도다. 어릴 때부터 혼자 집에서 이야기를 끼적이며 엄마 옷을 입고 연기를 하곤 했다. 글로 쓸 때는 실체가 없는데 연기라는 행위를 통해 보이지 않던 감정이 가시화되는 게 너무 신기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연기를 흉내낼 때도 그 캐릭터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나.
- 이미테이션 가수 역시 일종의 연기자인 셈이다. 이미테이션이라는 소재도 그래서 끌렸을까.
= 20대부터 정체성이라는 화두가 내 안에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 사회적 자아의 행동이나 표정이 그때마다 다르다고 생각했고, 일종의 연기처럼 느껴졌다. 내가 연기를 되게 잘해서(웃음) 첫 직장 선배들이 사회생활 많이 해봤냐고 물을 정도였다. 칭찬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가짜 같고 진실하지 않은 것 같아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일까. 이런 질문을 오래전부터 해왔다.SNS를 통해 또 다른 나를 전시하는 공간이 생기면서 ‘내가 보여주는 모습이 진짜 나일까’ 라는 인물들의 고민은 동시대적 공감대를 갖는다.90년대생인 나는 유튜브 세대다. 유튜브로 요즘 세대의 정체성을 논할 수 있다면, 윤시내 세대의 이미테이션 가수를 통해 그 이전 시대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다고 봤다. 모녀 둘 다 엉망진창이지만 거울처럼 닮아 있다. 하다는 자신도 엄마 못지않게 가짜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 동족혐오처럼 엄마에게 ‘당신은 가짜’라고 공격하는데, 결국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한 셈이다.
- 가수 윤시내를 섭외할 땐 어떻게 설득했나.
= 그동안 윤시내 선배님이 쌓아온 역사가 있잖나. 영화는 그 역사를 빌리는 건데, 이분의 명예에 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더불어 내 세대의 친구들도 영화를 보고 가수 윤시내를 각인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럴 자신이 있었다. 음악이 너무 세련됐다. 선배님도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데 왜 나야?’ 하고 물으셨는데, 그때마다 ‘나는 윤시내라는 명성이 아니라 공연을 보고 전율했고, 이게 동시대 사람들에게도 통할 거다. 선배님을 무조건 좋아할 거’라고 말씀드렸다.
- 순이도 장하다도 ‘도대체 왜 그러고 사냐’는 얘기를 자주 들을 법한 괴짜 캐릭터다. 인물들을 설득력 있게 담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나.
= 누구나 모서리 한끝만 보면 괴짜지만, 이쪽저쪽을 다 보면 나랑 닮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중년 여성 순이는 어떤 노동에도 딱히 소질이 없지만, 유일하게 윤시내 모창 실력으로 인정받는 사람이라고 설정했다. 하다도 언제나 자신만만해하지만, 그 속에는 가까운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보통의 마음이 있다. 다면적인 모습을 어떻게 드러낼까 고민했다.
- 모녀 관계도 흥미롭다. 순이와 장하다는 서로의 존재를 부정할 만큼 데면데면한 사이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어색하다. 윤시내를 찾는 여정에서 두 사람 사이가 살짝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 모든 관계에서 갈등과 화해는 결국 거리감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순이와 하다는 투닥거릴 온기조차 없는 하우스 메이트다. 여행을 통해 두 사람의 심적 거리를 더 벌리려고 했다. 하다가 길 위에서 만나는 이미테이션 가수들은 오히려 한발 떨어져 지켜보기 때문에 그 삶이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하다 역시 순이를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 보게 되는 순간이 온다. 하다 자신까지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되면서, 진짜든 가짜든 다양한 삶을 인정하고 화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체 모를 윤시내 가수에게서 시작해 나에게로 좁혀오는 이야기인 셈이다.
- ‘진짜냐, 가짜냐’라기보다 ‘심장이 뛰냐, 뜨겁냐’고 묻는 영화다.
= 나는 열성 많고 뜨거운 사람인데,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겉으로 표현하는 게 부끄러웠다. 그때 친구가 ‘제대로 좋아한다는 건 엄청 대단한 일’라고 말해줬는데, 그게 영화와 맞닿는 지점이 있었다. 진심을 누군가에게 드러낼 땐 용기가 필요하다.
- 지금 뜨겁게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인가.
= 영화에는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영화를 오래 할 수 있겠구나 자신하는 건 내가 영화와 건강한 거리감을 갖고 있어서다. 영화가 개봉하고 사람들의 이런저런 말들로 거리 유지가 안될 때는 나를 오직 김진화로만 여기는 엄마한테 전화한다. 영화고 감독이고 큰 관심 없는 엄마는 내게 그저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묻는다. 그럴 때 내가 나로서 여기 존재한다는 걸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