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성찬 평론가의 '나의 해방일지' '우리들의 블루스'
2022-06-22
글 : 김성찬 (영화평론가)
회피와 직시 사이

한 작품이 지닌 결여가 다른 작품에는 과잉돼 있다. 또 충만함은 결핍돼 있기도 하다. 우연찮게 유사한 시기에 방영된 두 드라마를 번갈아 보면서 뜻 모를 균형감을 느꼈다.

<나의 해방일지>

임지은의 시 <대체>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행을 다른 말로 대체할 수 있다면/ 여행도 여행을 떠날 거에요.” 그리고 시의 후반부는 이렇게도 말한다. “모든 게 빠르게 수리되는 세계에서/ 여행은 얼마간 고장이라는 말로/ 대체될 거라더군요.” 시집에 수록된 해설도 동의하는 바대로 이 시는 언어의 고정된 의미를 떠나 새로운 지점에 안착하는 시의 본질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여행’이 ‘고장’으로 바뀌었다고 말하는 작품이다. 또 <우리들의 블루스>는 ‘여행’은 자고로 ‘여행’이라고 강조하는 드라마다.

시 또는 연구 보고서

수많은 사람이 언급한, ‘추앙’이라는 말의 새로운 용법이 가리키는 것처럼 <나의 해방일지>는 지금껏 한국 드라마에서 좀처럼 목격할 수 없었던 면을 보여준다. ‘추앙’뿐이겠는가. 언뜻 일상에서 불거지는 환멸을 성토하는 것 같아 이 드라마 속 인물들의 언행은 생활에 밀착한 듯 보이지만 전혀 일상적이지 않다.인물들은 때때로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듯, 아니 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하고 싶은 말을 독백처럼 툭툭 내뱉는다. 내용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새벽 감성에 기대 한번쯤 품어봤을 법하지만 한번도 남들 앞에서는 쉬이 터놓지 못했던 이야기를 개의치 않고 읊조린다. 미심쩍은 마음은 어떠한가. 신원이 불명확한 사람의 이름조차 궁금해하거나 알아보려 하지 않으면서 의지하고 기댈 수 있다는 게 가당한 일인가. 오히려 이런 기행은 상상 속에서나 실현해보았을 장면이다. <나의 해방일지>는 이처럼 새로운 일상의 언어를 창조하는 중이다. 이 드라마를 향한 열광은 일상의 의미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데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박해영 작가의 작품은 시와 닮았다. 시가 그 본질에 따라 고착된 의미에서 벗어나 의도치 않은 곳에 정박하면 할수록 더 특별해지는 것처럼 영화나 드라마도 일상의 의미에서 탈출하여 모종의 위치에 도달하면 할수록 위대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임지은의 시가 여행을 잠시 다른 말로 대체했다면 <나의 해방일지>는 일상을 잠깐 일상이 아닌 무엇으로 치환함으로써 일상의 본질을 되새기게 한다.

반면 <우리들의 블루스>는 일상을 대체하는 일 없이 일상으로 더욱 침잠해 들어간다. 이건 비판이 아니다. ‘여행’을 ‘고장’으로 잠시 바꿔보는 것으로 ‘여행’의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이 하나의 방법론이라면, 일상을 다른 지점으로 위치시키지 않고 되레 더욱 고정해 지켜보는 것도 일상을 회복하는 다른 하나의 우수한 방법론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의 블루스>는 민족지적 현장 연구 같은 구석이 있다. 제주를 배경으로 한 21세기판 <전원일기> 같은 내용의 드라마에서 엮어지는 이야기들은 통속적이기 그지없다. 이 점을 두고 진부하거나 고루하다고 비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연구 보고서라고 할 만한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감탄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의 해방일지>가 인물이 지닌 관념에 더욱 집중한다면 이 드라마는 인물들이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데 주목한다. 대표 사례는 고교생 예비 부모 영주(노윤서)와 현(배현성)의 사정이다. 결국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노출하면서 낙태를 포기하게 만드는 서사의 보수성을 비판하는 것은 얼마간 타당하나 그보다 우리가 관념으로 다뤘던 고충들이 현실에서 실제 상황으로 벌어졌을 때 겪게 될 고된 감정을 인물들이 어떻게 처리하는지 목격하는 일 자체가 중요한 듯 다뤄진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영희(정은혜)의 전면적인 등장도 같은 맥락이다. 드라마든 영화든 비가시화되고 소외된 인물을 전면에 배치했다는 사실만으로 이야기가 지닌 모든 흠결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장애인 언니를 둔 동생 영옥(한지민)이 살면서 품었을 이기심과 자기 연민, 그래서 삐져나오는 비뚤어진 언행들을 긍정하라고 제시한 것은 아닐 테다. 삶의 한복판에서 날것 그대로 터져나올, 비판받아 마땅한 우리의 모순된 면모를 굳이 재현해야 하는 어떤 사명을 다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우리들의 블루스>가 보여주는 일상이란 바로 이런 현장의 핍진함에 크게 기댄다.

<우리들의 블루스>

그럼에도 굳건한 현실

다만 두 작품이 이룬 성취를 인정한다 해도 끝내 해소되지 않은 감정의 잔여물을 느낀다. 우선 <우리들의 블루스> 속 인물들을 보자.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집단 내 인간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갈등으로 불거진 다양한 감정들을 지닌다. 미움과 애정은 동시에 존재하고, 환멸과 사랑도 같이 간다. 여러 감정이 지나가는 인물들의 면면 속에 하나 도드라지는 건, 그렇다고 그들에게서 우울감은 좀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우울감을 체화한 사람은 선아(신민아)다. 이때 그녀가 체험하는 우울감을 묘사하는 방식이 굉장히 감각적이고 물질적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시간을 감지하는 기능이 오작동하는 선아에게 낮과 밤은 불규칙하게 들이닥친다. 드라마는 이 변화를 시각적으로 강조해 제시한다. 또 우울감에 지배당할 때마다 몸은 물에 흠뻑 젖어 있어 촉각적이기도 하다. 선아를 대하는 동석(이병헌)의 반응을 보면 이러한 재현이 나타난 이유를 다소 짐작할 수 있다. 자기 아픔을 말하는 선아에게 동석은 마치 우울증에 관한 안내서를 방금 읽은 것처럼 말한다. 우울증이란 게 그런 것이냐. 어떻게 하면 우울증을 가시게 할 수 있느냐. 유사한 대목은 다운증후군을 가진 영희를 다룰 때도 나온다. 영희가 등장하고 나서 등장인물들은 흡사 공익광고에 준할 정도로 다운증후군에 관한 다량의 정보를 담은 대사를 주고받는다. 좋게 말하면 잘 알려지지 않아 오해받기 쉬운, 우울증이나 다운증후군을 가진 인물에 관한 대중의 무지를 깨우쳐주려는 의도로 볼 수 있지만, 묘사 방식은 교보재 같고 다분히 교조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이건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씨(손석구)가 미정(김지원)에게서 처음 추앙해달라는 말을 들은 후 사전에서 추앙의 의미를 찾아본 장면과 비교할 때 더욱 명확해진다. 이 장면이 구씨뿐 아니라 시청자도 함께 일상이 원래 자리에서 탈각되는 순간을 목격하도록 함으로써 빛을 발한다면, <우리들의 블루스>는 외부의 절대자가 정의한 일상의 의미를 우리와 교감하는 일 없이 일방적으로 전달하려는 것 같아 당황스럽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인물들이 보여주는 차고 넘치는 파토스도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연기자가 자기 재능을 뽐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구심도 든다.

<우리들의 블루스>가 한명의 우울병적 인물을 내세웠다면 <나의 해방일지>는 우울감이 체화된 인물들로만 구성된 듯하다. 다만 드라마는 그들의 우울감을 부각하지 않는다. 보통과 다른 상태에 있어야 일상의 의미를 다른 곳에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는 듯, 우울감을 인물이 지닌 성정의 기본 토대로 삼는다. 그래서 인물들은 서로에게 우울 같은 단어를 말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똑같은 처지에 굳이 서로의 상태를 언급하는 건 이 세계에서는 무용한 일이다. 그보다 보통의 차원을 달리해 다른 보통을 구현한 곳에서 그들은 해방에 다다랐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드라마의 결말을 볼 때 그들은 그러지 못한 것 같고, 인물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특이한 건 드라마의 후반부로 나아갈수록 염미정을 포함한 세 남매뿐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들도 무언가를 깨우친 듯한 말을 하면서 마치 해방에 다가선 것처럼 군다는 점이다. 인물들이 해방에 이르지 못했다고, 또 결말이나 여태껏 펼쳐놓았던 이야기가 끝까지 명료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명료함을 거부하고 미심쩍으며 일상의 의미를 계속해서 바꿔내려는 의지가 수그러든 순간들이 더러 있었던 점이 마음에 걸린다. <나의 해방일지>가 보여준 미덕은 지속적인 회피와 외면의 태도가 아니었을까. 절대적인 명랑함과 불굴의 의지로 신체와 정신을 모두 소진하기를 강요하는 가학적인 사회의 공기를 효과적으로 내치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회피와 외면의 태도를 고수하는 것일 테다. 그런 점에서 구씨의 신원이 밝혀질 즈음 그가 제발 조폭은 아니길 바랐다. 처음과 같이 그의 신원은 불확실한 상태로, 또 이야기가 통상의 구색을 좀 갖추지 못하더라도 인물들이 뱉어내는 말들의 향연만으로 끝간 데 없이 가길 바랐다. 현실과의 간극이 너무 넓으면 외면받을 것 같은 우려 때문이었을까. <나의 해방일지>가 보여주는 회피와 외면의 태도는 대중적 인물과 설정이라는 안전망에 간혹 굴복하면서 극의 기조를 방해한다. 매일 아침 찾아와 머릿속에서 소란을 피우는 대상들에게 굳이 현실에 발붙일 닻을 내려줘서는 안되었다고 아직도 생각한다.이런 이유들로 두 드라마를 보면서 공명과 위로에 바탕을 둔 마음의 정화를 경험하는 동시에 무기력도 뒤따른다. <나의 해방일지>를 구성하는 시공간에서 희망은 소멸하기를 주저하고, 절망은 부활하기를 망설인다. 그러면서 드라마는 어딘가로 수렴하기를 계속해서 회피하고 외면하려고 애쓴다. 이 드라마에서 회피와 외면은 어쩌면 유일하게 고정된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태도가 아직 낯설다는 듯이 더 과감히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우리들의 블루스>는 우리가 일상을 직시하기를 바란다. 아픔과 상처와 고뇌는 어디에나 있고 늘 존재하는 것이라고 넌지시 주입한다. 현실에 일말의 미련을 두거나 현실은 현실이라고 말하는 두 작품은 결국 현실은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암시를 주는 것 같다.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두 작품은 어떤 균형에 도달한다. 여기서 균형은 부정적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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