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주 바이킹의 귀환
<어벤져스: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 이후 어벤져스 멤버들은 각자 다른 길을 걷는다. 인간은 죽거나 은퇴하거나 사라질 수 있지만 신은 어떨까. <러브 앤 썬더>는 어벤져스가 역할을 끝낸 뒤 홀로 남겨진 토르가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여름 같은 영화다. “한때 전투에 쓰였던 이 손이 이젠 평화의 도구가 됐지”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숲속을 질주하는 소년 토르의 모습으로 시작되는 예고편은 이 영화의 방향을 분명하게 지시한다. <토르: 라그나로크>(이하 <라그나로크>)부터 토르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신의 숙명을 타고난 토르를 코믹 어드벤처로 탈바꿈시켰다. 운명의 무게를 벗고 코믹 캐릭터로 거듭난 선택은 신의 한수였다.
건즈 앤 로지스의 <Sweet Child O’mine>을 메인 테마로 마음의 평화를 찾아 떠난 토르의 모습은 마치 힐링 여행 같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멤버들과 우주의 평화를 지키는 것도 잠시, 토르는 덜 자란 아이처럼 뒤늦게 자아 탐색의 길을 나선다. <엔드게임> 이후 토르는 가족과 친구, 고향과 묠니르 심지어 신다운 멋진 몸매까지 모두 잃었다. 상황은 해결되었지만 뉴 아스가르드의 왕으로서 사람들을 이끌 의지까지 회복되진 않은 듯하다. 토르는 발키리(테사 톰슨)에게 왕좌를 물려주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멤버들과 함께 짧은 모험을 떠난다. 로키가 장난의 신이었다면 토르는 망나니 신이다. 자유분방이라고 쓰고 욕망에 충실한, 사고뭉치 토르가 모험을 떠나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톤이나 스타일 면에서 <라그나로크>와 비슷하지만, 활기차고 정신없는 세계관의 느낌이라든가, 토르가 놓인 상황의 강도를 몇배로 높이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택한 아이디어가 우주와 바이킹의 조합이다. 북유럽 신화의 주인공 토르는 진정한 바이킹이 되어 우주를 모험한다. “<라그나로크>가 1980년대 신스팝 앨범이라면 <러브 앤 썬더>는 메탈 음반이다. 우리는 1980년대 로큰롤 느낌이 나는 영화를 원했다”는 제작자 브래드 윈더바움의 설명으로 미뤄 짐작하건대 전작보다 훨씬 자유분방한 모험이 될 것이 분명하다.
2. 신들의 향연, 판테온과 제우스
신은 신화를 벗어날 수 없다. 기껏 북유럽 신화를 벗어났더니 그리스 로마 신화로 확장되어버렸다. 토르는 우여곡절 끝에 옴니포텐스 시티의 그랜드 판테온에 다다른다. 올림푸스산을 모티브로 한 판테온은 신들의 왕 제우스가 지배하는 곳이다. 오만했던 아스가르드의 왕자 토르는 한때 지구로 추방되었다가 엄청난 상실을 겪은 뒤 영웅으로 거듭났다. 타노스가 제거된 뒤 뉴 아스가르드의 왕좌까지 버리고 자기 발견의 여정을 떠났지만 운명의 사슬은 결국 그를 신의 자리로 되돌려놓는다. 제우스 역을 맡은 러셀 크로는 진지함과 유머를 오가며 또 다른 천둥의 신을 연기했다. 제우스는 살짝 살찐 실루엣까지 어쩌면 뚱보 토르가 그대로 왕이 되었을 때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은 존재처럼 보인다. <러브 앤 썬더>라는 제목답게 천둥 같은 난장판이 펼쳐진다 해도 놀라지 마시길.
3. 신 도살자 고르와 크리스찬 베일
마블 영화는 본래 빌런을 통해 성립한다. 프로스트 거인의 왕 라우피부터 누나인 죽음의 여신 헬라, 매드 타이탄 타노스까지, 토르는 수많은 신적 존재들과 맞서왔다. 토르의 은퇴 생활을 방해하는 존재도 역시 신적 존재다. 아니 신을 죽이는 존재다. 고르는 신들과 전쟁을 벌여 거대하고 어두운 힘을 가진 무기로 신들을 하나씩 죽여나간다. 한때 평화를 사랑했던 고르는 모종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모든 걸 잃은 뒤 자신이 신들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때마침 사악한 고대의 무기(코믹스에서는 올 블랙 네크로소드, 어둠의 고대신 널의 무기로 나온다)를 얻게 된 고르는 인간을 돌보지 않는 신들을 우주에서 하나씩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뉴 아스가르드와 판테온, 신들의 거처가 공격당하는 가운데 토르의 안식처도 사라진다. 크리스 헴스워스는 크리스찬 베일의 고르를 극찬하며 이렇게 말했다. “고르는 드라마와 광기가 넘쳐나는 캐릭터인데, 크리스찬 베일은 매 순간 곧바로 캐릭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연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고르 캐릭터는 정말 매혹적이다. 훌륭한 악당 캐릭터가 모두 그러하듯 고르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자신의 관점을 올바른 방식으로 실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본 내용 자체만으로도 고르에게 공감할 수 있었던 데다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가 캐릭터에 훨씬 더 깊이를 더해주었다.” 회색 빛의 디자인으로 홀로 다른 장르를 찍고 있는 것 같은 존재감을 자랑하는 고르를 믿고 보는 연기의 신 크리스찬 베일이 어떻게 표현할지가 관전 포인트다. 신들의 멸종을 바라는 신 도살자 고르의 사연은 토르와 닮았다. 모든 것을 잃은 뒤에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가 결국 히어로와 빌런을 가르는 기준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러브 앤 썬더>는 토르가 영웅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증명하는 모험담이다. 해결되지 않는 고통과 트라우마를 죽음으로 발산하는 고르와 자아성찰 중인 토르의 대결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4. 토르의 ‘러브스토리’
토르의 연인 제인은 <토르: 다크 월드> 이후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어벤져스>에서 모종의 이유로 헤어졌다는 언급으로 시리즈에서 하차했던 내털리 포트먼이 드디어 돌아온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특별한 애정으로 성사된 이번 귀환은 그야말로 내털리 포트먼의 변신을 보여준다 할 만하다. 감독이 직접 집까지 찾아가 설득한 끝에 출연을 결심한 내털리 포트먼은 그저 히어로의 여자 친구가 되어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과학자였던 제인을 슈퍼히어로로 탈바꿈시켰다. 묠니르를 잃은 토르가 목숨을 걸고 만든 새로운 무기 스톰 브레이커는 새로운 토르의 상징이 되었다. 타노스를 일격에 쪼개버리는 무기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천둥의 신 토르를 대표하는 무기는 역시나 천둥의 망치 묠니르다. 제인은 산산히 부서진 묠니르를 다시 들고 마이티 토르가 되어 돌아왔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제인 포스터가 슈퍼히어로가 되는 스토리라인은 코믹스 ‘마이티 토르’ 줄거리에서 나온 것인데 스크린으로 옮기게 되어 흥미진진했다. 내털리 포트먼의 연기 변신을 보는 것이 정말 좋았다”며 벅찬 감동을 전했다. 한편 이 영화의 제목이 <러브 앤 썬더>라는 걸 잊으면 안된다. 제작자 브래드 윈더바움이 설명한다. “자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토르가 도망치는 것은 사랑이다. 지금까지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전부 죽었다. 스스로도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는 자신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건 천둥의 신이었던 토르와 천둥의 신이 된 마이티 토르 제인의 조금 특별한 러브 스토리다.
5. 토르의 조금 모자라지만 매력적인 친구들
토르는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는 히어로물이 아닌 엄연한 팀 무비다. 토르가 토르답게 있을 수 있는 건 주변의 조금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들 덕분이기도 하다. 단짝이자 형제인 로키를 잃은 토르에게도 아직 파트너는 남아 있다. 영화 초반 여행을 함께 하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특히 스타로드와의 티격태격 케미스트리는 이미 검증된 바 있다. 토르가 도망친 탓에 억지로 뉴 아스가르드의 왕이 된 발키리 역시 특유의 톡톡 튀는 개성이 여전하다. 정치에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전사 발키리의 허를 찌르는 유머 코드는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토르의 새로운 동료이자 충실한 사이드킥인 휴머노이드 코르그다. “사람들의 긍정적인 면을 보는 그가 나올 때마다 분위기가 밝아진다”는 감독의 설명처럼 코르그는 바위와 같은 디자인과 달리 보자마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순수한 캐릭터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직접 연기한 캐릭터인 만큼 이야기의 화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새로운 임무를 맡은 캐릭터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도 코르그는 변하지 않는 안정감을 선사하며 극의 중심을 잡아준다. 사실상 이야기의 화자라고 해도 좋을 코르그는 (예고편 시작부터) 친절히 알려준다. “자, 애들아 팝콘 준비해.” 설명은 이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