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연기도 글도, 마음에 점 하나 울림 줬으면…” 에세이로 다가온 배우 최희서
2022-07-04
글 : 한겨레제휴기사 (한겨레 신문 제휴기사 등록)

[한겨레]

영화 ‘박열’로 충무로 뒤흔들고 제작기 연재 계기로 책 쓰게 돼

운명적 캐스팅·촬영하다 좌절…“30대 여성배우로 할 수 있다는 얘기 존재 이유 있는 연기자 되고 싶어”고단한 시절 ‘절친' 손석구 얘기도 여럿

첫 산문집 <기적일지도 몰라>를 펴낸 배우 최희서. 최희서 제공

예상 밖이었다. 2017년 배우 최희서가 영화 <박열>의 가네코 후미코 역으로 출연했을 때, 매끄러운 일본어와 어색한 한국어를 구사한 이 연기자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한 관객은 거의 없었다. 같은 해, 대종상 역사상 처음으로 신인여우상과 여우주연상을 동시 수상하는 등 이듬해까지 총 11번의 신인상을 거머쥔 이 ‘괴물 신인’에게, 단편영화 <반디>(2021)에서 보여준 연출가로서의 재능을 예감한 이도 많지 않았다.

최근 나온 산문집 <기적일지도 몰라>(안온북스)는, 이 다재다능한 배우가 글쓰기에도 남다른 소질이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책이다. 영화 촬영 현장의 에피소드와 함께 직업 배우의 고충과 연기에 대한 고민을 자의식의 과잉 없이 간결하게 담아냈다. 삶과 관계에 대한 나름의 인사이트도 인상적이다.

지난달 27일, 서울 광화문 카페에서 만난 최희서는 유쾌하면서도 사려 깊은 답변들을 내놓았다. “30대 여성 배우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질문하며 탐구하고 있다”는 그는, 관객으로 인해 배우가 완성된다고 믿는 드문 아티스트였다.

첫 산문집 <기적일지도 몰라>를 펴낸 배우 최희서. 최희서 제공
최희서는 영화 <박열>에서 박열의 동지이자 애인인 가네코 후미코 역으로 대종상 최초로 여우주연상과 신인상을 동시에 받았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편이었어요. 어릴 적 일본과 미국에 살았을 때 어머니가 한국에서 전기 50선, 소설 50선 이렇게 주문해주셔서 국어를 계속 익힐 수 있었죠.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책을 정말 많이 읽었는데 요즘은 저자라고 말씀드리기 부끄러울 정도로 책을 못 읽었어요.(웃음)”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와 극작가 안톤 체호프를 좋아한다는 그가 책을 펴내게 된 것은, 출세작인 <박열>과 관련이 있다. “<박열> 개봉 때 홍보팀 제안으로 ‘브런치’에 제작기를 썼어요. 독자들 반응이 좋아서 예정에 없던 6회까지 연재했는데 그때 ‘맞다, 나 글 쓰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게 이 책의 시작이 됐어요.”

<박열>에 앞서 영화 <동주>의 쿠미 역으로 이준익 감독과 첫 인연을 맺게 된 최희서의 캐스팅 일화는 말 그대로 영화적이다. 2014년 4월, 오디션에 줄곧 떨어지던 최희서는 비슷한 처지의 동료 배우 손석구와 함께 연극을 준비했다. 그는 그때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화행 3호선 열차에서 연극 대사를 중얼거리며 외우고 있는데, 우연히 신연식 감독님이 맞은편에 앉게 된 것이다. (…)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신 감독님은 ‘같은 역에서 내리면 저 배우에게 명함을 줘야지’ 생각하셨고, 우린 정말로 같은 경복궁역에서 내리게 되었는데….”

영화 <동주>에서 쿠미 역으로 출연한 최희서.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배우 최희서의 첫 산문집 <기적일지도 몰라> 표지. 안온북스 제공

그날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그는 그해 겨울, 신 감독이 제작하고 이 감독이 연출한 영화 <동주>에 캐스팅된다. 2009년 영화 <킹콩을 들다>로 데뷔한 이래 결혼식 하객, 영어 과외, 번역 등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로 5년의 무명 시절을 버텨온 그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

물론 이 일은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는 사람에게 찾아온 기회이기도 했다. ‘영감이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리지 않고 찾아 나서야 한다’고 했던 작가 잭 런던의 말처럼, “아무도 날 캐스팅하지 않겠다면, 내가 출연할 연극을 직접 제작하자”는 열정이 결국 그를 ‘행운’으로 데려간 셈이다.

첫 산문집 <기적일지도 몰라>를 펴낸 배우 최희서. 최희서 제공

배역을 기다리기보다 찾아 나서는 이런 성정은 자신의 시나리오로 감독과 주연을 겸한 단편(<반디>) 연출로까지 이어졌다. “존재의 이유가 있는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점 하나만큼의 울림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연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 울림을 전달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만나고 싶다. 만약 못 만난다면 그런 시나리오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웃음).”

연출보다 연기가 더 어렵다는 그의 말마따나 책 속에는 <아워 바디> 촬영 현장에서 겪은 뼈아픈 좌절기도 담겨 있다. 새벽 3시까지 이어진 촬영에서 뜻한 대로 연기가 되지 않자 심적 부담에 괴로워하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감독에게 “이병헌이 해도 힘들겠죠?”라고 말해놓고 당황해한다. 끝내 자신의 연기가 성에 차지 않던 이날을 그는 “하지만 후회는 없다. 아무리 근성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았던 그날 새벽, 나는 좌절하는 법을 배웠다”고 썼다.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 출연한 최희서. 씨제이(CJ)엔터테인먼트 제공
최희서는 영화 <박열>에서 박열의 동지이자 애인인 가네코 후미코 역으로 대종상 최초로 여우주연상과 신인상을 동시에 받았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고단한 시절을 함께 보낸 ‘절친’ 손석구와의 에피소드도 여럿. “석구 오빠는 엉뚱한 매력이 있어요. 그의 엉뚱함은 미래를 계산하지 않은 데서 나오는 듯해요. 굉장히 순수하거든요. 그때그때 좋아하고 이루고 싶은 거에 엄청난 노력과 집중을 하는데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죠. 날것 같은 연기의 배경 아닐까요.” 그는 손석구도 책을 좋아한다며 생각난 걸 바로 쓰기 위해 늘 노트북을 들고 다닌다고 했다. 좋은 배우는 결국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는다는 그는 “글을 쓰면 쓸수록 더 뭔가 아이디어가 떠올라 이것저것 다 쓰고 싶어진다. 그런 에너지가 계속 뿜어져 나오는 게 너무 좋아서 앞으로도 읽고 쓰려 한다”고 했다. “수제 햄버거와 산채비빔밥이 힐링푸드”라며 “실제로는 덜렁대는 성격에 허당기가 많은데 재미없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걱정된다”는 그를 보면서, 이 명민한 배우를 만난 건 기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겨레 오승훈 기자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의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의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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