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부천영화제)는 ‘이상해도 괜찮아’라는 슬로건의 의미를 확장하며 프로그램 섹션을 과감하게 개편했다. 경쟁부분인 ‘부천 초이스’와 ‘코리안 판타스틱’은 유지하고, 관객이 취향에 따라 영화를 고를 수 있도록 섹션을 새로 구분했다. 거장들의 신작을 소개하는 ‘매드 맥스’부터 장르를 직관적으로 감각할 수 있도록 ‘아드레날린 라이드’ ‘메탈 누아르’ ‘저 세상 패밀리’로 섹션의 문패도 새로 달았다. 오랜 팬들에게는 부천영화제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금지구역’ 섹션의 폐지가 충격적인 소식이자 변화겠지만, 이는 금지구역이라는 카테고리의 의미를 오래 고민하고 내린 결단이다. 무협영화, 발리우드 특별전으로 일찌감치 팬 커뮤니티를 끌어 모았던 부천영화제는 올해도 더 다양한 마니아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BL 장르를 조명하는 특별전 ‘Boys, Be, Love’를 비롯해 배우 특별전 ‘설경구는 설경구다’ ‘계속된다: 39+1,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영화제가 열리기 전부터 입소문으로 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3년만에 부활한 심야상영 역시 부천을 찾는 팬들을 설레게 할 소식이다. 영화제 개막을 며칠 앞두고 아시아권, 영어권, 한국영화, 유럽영화를 각각 담당하는 김영덕, 남종석, 박진형, 모은영 프로그래머를 한자리에서 만났다.
- 예매 첫날 화제작들이 빠른 속도로 매진됐다.
= 모은영 전통적으로 인기 많은 호러 작품들이 빨리 매진됐고 예상했던 BL 작품들도 금세 매진돼 안심했다. (웃음)
= 김영덕 주말 상영작은 거의 매진이다.
= 남종석 관객들이 사전에 작품을 검색해보고 기대작의 경우 홈페이지에 ‘심쿵’ 표시를 해두기도 했다. 반면 신작들은 정보가 많지 않아서인지 ‘심쿵’이 많지 않더라. 신작도 공들여 준비했다. 속는 셈 치고 새로운 작품들도 만나보시길 권하고 싶다. 우연히 좋은 영화를 발굴하는 기쁨을 영화제에서 누리셨으면 좋겠다.
- 올해 국내외 초청작의 경향은 어떤가.
= 김영덕 아시아권에서는 자기 내면의 공포를 다룬 영화가 많았다. 핸드폰이나 SNS를 소재로 한 이야기도 많다. 동시에 코로나 이후 관계 회복을 갈구하는 경향도 눈에 띈다.
= 박진형 코로나보다 영화 배급 환경의 변화를 많이 느낀다. 제작되자마자 OTT로 가는 영화 중에는 장르 영화가 많은 편이다. 제작되는 영화의 양도 많아지고 유통 사이클도 빨라졌다. 이런 흐름 속에서 유럽 영화들은 장르의 혼합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빚어내는 경향이 보인다. 중세 영화에 고어, 냉전 말기 스파이 영화에 고어를 붙이는 식이다. 중남미 쪽은 작품 수가 많지는 않지만, 올해도 젊은 여성 감독들의 패기가 엄청나다. NAFF 프로젝트 선정작인 <납골당>을 비롯한 멕시코 영화들은 호러나 미스터리 장르에 임신이나 욕망, 여성의 문제를 접목해 기존 장르나 스타일을 새롭게 보여준다.
= 남종석 영어권도 마찬가지다. 미국 장르영화는 곧바로 파라마운트 플러스나 기타 OTT 플랫폼으로 간다. 그래서 올해는 제작부터 출연까지 직접 해내는 D.I.Y 방식의 인디 작품에 주목했다. <헬벤더>의 경우 한 가족이 연출, 편집, 연기, 음악을 각각 맡았다. <목숨 건 스트리밍>도 부부가 연출, 각본, 편집뿐 아니라 주연까지 해냈다. 더불어 호러영화계의 넷플릭스라고 할 수 있는 셔더(Shudder)가 아직 한국에 진출하지 않아 좋은 작품을 더 많이 소개할 수 있게 됐다. 여성 감독들의 약진은 영미권에서도 눈에 띈다. 선댄스나 사우스 바이 사우스 웨스트 영화제의 경우 이미 여성 감독의 연출작이 절반 이상 차지하고 있고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 모은영 국내 단편은 올해 1,447편으로 최다출품수를 또 갱신했다. 부천영화제를 비롯해 코로나시기에 늘어난 제작 지원, 배급 지원 덕분인지 작품 편수가 늘었다. 단편영화제가 많이 없어진 영향도 있을 거다. 다만 영화 속에서 코로나 국면은 이미 지나갔다. 펜데믹 보다는 공시생, ‘영끌’, 가정폭력 등 사회 문제들이 주로 다뤄졌고, 장르 자체에 대한 탐구와 에너지가 커졌다. 또 해외와 마찬가지로 부천에서도 애니메이션이 확실히 강세였다.
- ‘금지구역’ 섹션이 사라졌다. 어떤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나.
= 김영덕 금지구역이라는 건 검열제도가 있을 때 더 분명한 의미가 있고, 지금은 수위만으로 구역화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스트레인지 오마쥬’ 섹션이나 개막작 <멘>만 해도 수위가 높다. 섹션의 성격에 맞게 분배한 것뿐 전반적인 수위 자체가 낮아지진 않았다.
= 박진형 전반적으로 수위의 상향평준화가 이루어져 금지구역이 존재할 때도 ‘왜 이렇게 말랑말랑하냐?’는 말이 있었다. (웃음) 금지구역 상영작은 단순히 수위나 센 이미지가 전부는 아니었다. 관객의 심리를 송곳처럼 찔러 환기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영화를 선별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영화제까지 검열이 있던 시기에 금지하는 영화를 온전히 볼 수 있다는 행위가 그대로 메시지가 되기도 했다. 오늘날 금지된 것에 관한 감수성이 예전과 같을까? 금지구역이 없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분노하는 분도 있겠지만, 이 기회를 통해 함께 논의해보고 싶다. 3년 만에 부활한 금요일의 심야상영 전에 이런 얘기를 나누는 토크 행사를 준비했다. 오랜만에 심야상영을 찾은 팬들에게 어떤 영화로 화답할까 하다 <세르비안 필름>을 편성했다. 의미 있는 논의의 장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 섹션의 전면 개편, ‘이상해도 괜찮아’라는 슬로건의 고수 등 부천영화제의 정체성을 어떻게 전달하고자 했나.
= 모은영 이제는 이상한 것뿐만 아니라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거다. 전반적으로 제작 퀄리티가 높아지면서 ‘이렇게 만들어도 되나’ 싶은 모난 영화는 오히려 찾기 어렵다.
= 박진형 상향평준화된 작품의 반대급부에는 창작자나 관객의 보수적인 태도가 존재한다. 예전에는 ‘극혐’과 논쟁을 감수하고서라도 치고 나가는 영화들이 많았다면, 지금은 감독이 사전에 수위를 제어하고 조율하기도 한다. 섹션 개편은 부천영화제의 메인 장르가 무엇인지, 관객들이 25년 동안 어떤 영화를 보고 싶어 했는지를 중심으로 분류했고, 군집된 영화의 색이 선명해지도록 패키징했다. 또 장르 영화 쪽에서도 디지털 복원이 활발해지고 있어 ‘스트레인지 오마쥬’와 ‘매드 맥스’ 섹션에 담았는데, 시원하게 치고 나가는 힘 있는 영화들을 이쪽 섹션에서 찾아볼 수 있을 거다.
= 모은영 영화제는 주로 새로운 영화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역할을 하지만 교육의 기능도 있다. 꾸준히 과거를 발굴해서 현재화하는 것도 영화제가 할 일이라고 본다. 김기영 감독이 마치 동세대 감독처럼 느끼는 것 역시 영화제에서 계속해서 호명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장르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스트레인지 오마쥬’ 섹션도 많이 찾아주셨으면 좋겠다.
- 올해 다채로운 행사들이 눈에 띈다. 배우 특별전의 주인공인 설경구의 영화 상영과 관련 전시가 이루어지고, 기술발전에 따른 스토리텔링의 변화를 볼 수 있는 ‘비욘드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있다. BL 특별전도 일찌감치 화제가 됐는데 새로 부천을 찾는 관객들에게는 부천과 BL특별전이 쉽게 매칭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어떻게 기획됐는지 들려 달라.
= 모은영 몇 해 전부터 부천영화제에서는 BL 영화를 상영했다. 그때 굉장히 확고한 팬층이 존재한다는 걸 확인했고, 올해 <시맨틱 에러>라는 대중적인 작품이 나온 것도 하나의 계기였다. 누가 시작하느냐의 문제지 언젠가는 상영되고 향유될 거라 생각했고, 그렇다면 부천이 해야겠다 싶었다. 다만 한국과 일본 외에 태국이나 다양한 나라의 작품까지 선보이지 못한 건 아쉽다. 이게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 박진형 BL과 더불어 김영덕 프로그래머가 주관하는 ‘괴담 캠퍼스’도 소개하고 싶다. 괴담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멘토링하고 지원하는 부천영화제의 시그니처 프로그램이다. 괴담을 중심으로 한 콘텐츠 생산 역시 팬덤에 기반한 향유이므로 BL과 같은 맥락인 셈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선정된 작품은 영화제를 통해서 공개하고 비즈니스 미팅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
- 교육과 제작네트워크, 프로젝트 마켓이 더해진 BIG(BIFAN Industry Gathering)를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다. 올해는 성과가 돋보이는데.
= 남종석 우리가 꾸준히 판타스틱 장르를 고집해 온 게 이제야 빛을 보는 것 같다. 다른 나라의 프로젝트 마켓도 우리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칸 마켓도 판타스틱 장르에 관심이 없다가 2~3년 전부터는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환상영화학교’ 같은 경우 팬데믹 시기의 노하우를 더해 현장과 온라인의 하이브리드로 진행한다. 전 세계 250여 명의 청강생이 함께 영화수업을 듣게 됐다. 이제까지 교육과 지원 중심의 마켓이었다면 올해부터는 P&I(Press and industry) 스크리닝도 함께 한다. 작품 및 프로젝트 참여자의 알려지지 않은 전작까지 적극적으로 소개해서 유통의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 NAFF라는 제작네트워크를 통해 올해 13편의 신작이 완성됐고 <SLR> <납골당> <베스퍼>는 경쟁작으로 선보이게 됐다. BIG나 NAFF뿐 아니라 ‘괴담 캠퍼스’와 ‘비욘드 리얼리티’도 콘텐츠 개발을 기반으로 한 지원이라 의무감을 가지고 꾸준히 운영해갈 계획이다.
- 올해 게스트 초청은 어떤가.
= 김영덕 호러 영화의 거장 브라이언 유즈나 감독과 미이케 다카시가 부천을 찾는다. 화제작 <곡비>의 롭 자바즈 감독, <외계인 아티스트>의 호야 세이요, <화난 아들>의 이이즈카 카쇼도 만날 수 있다. 아시아 게스트들은 한국에 기대가 크고 너무나 오고 싶어 했다. 감독이 초청되면 스탭들까지 기꺼이 자비로도 오겠다는 의사를 밝힌 팀이 여럿이다.
= 박진형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한국에 관한 온도가 많이 달라졌다.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은데도 많은 영화인이 관심을 보였다. <라 피에타>의 에두아르노 카사노바, <씨씨>의 감독이자 배우인 한나 발로우 등 총 250여 명의 게스트가 부천을 찾을 예정이다.
= 김영덕 한국 문화도 잘 알려져서 ‘가서 떡볶이라도 먹고 올까?’ 하는 분위기랄까. (웃음) 부천은 관광도시가 아니라 인프라가 부족한 측면도 있지만, 이번에 부천시청 앞에 있는 크고 작은 숙소까지 싹 예약했다.
- 아직 예매를 고민 중인 관객들을 위해 추천작을 소개해준다면.
= 김영덕 ‘메리 고 라운드’ 섹션의 <신도들>. 야마모토 나오키의 문제의 만화 <빌리버스>를 조조 히데오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이다. 서로 이름도 모른 채 의장, 오퍼레이터, 부의장으로 부르며 무인도에서 수련 생활을 하는 두 남자와 한 여자 신도가 나온다. 사이비 종교의 가스라이팅 속에서 불거져 나오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의 묘사가 흥미진진하다. 깜짝 출연하는 야마모토 나오키도 찾아보기 바란다.
= 남종석 ‘메리 고 라운드’의 <듀얼: 나를 죽여라>.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다고 확신한 사라가 대리모로 일할 클론을 예약하지만, 자신이 완치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클론과 결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2019년 <호신술의 모든 것>으로 부천을 찾은 라일리 스턴즈 감독의 신작으로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진지한 표정의 유머가 돋보인다. 올해 선댄스영화제 화제작이다.
= 모은영 ‘코리안 판타스틱’의 <다섯 번째 흉추>. 거리에 버려진 매트릭스 위에 피어난 곰팡이가 인간의 상념을 먹고 자라 괴생명체가 된다. 도시의 외곽을 떠돌며 자라나는 매트릭스에 관한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다.
= 박진형 ‘메탈 누아르’의 <그들 사이의 기적>. 젊은 견습 수녀 크리스티나는 다급한 일로 수녀원을 몰래 빠져나갔다가 예상치 못한 운명을 맞는다. 형사 마리우스가 그녀의 여정을 되짚어가며 그녀에게 일어난 가혹한 사건을 수사한다. 탁월한 심리 묘사와 뛰어난 연출력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보그단 죠지 아페트리 감독의 루마니아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