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이스는 트위터의 실시간 음성 대화 기능입니다. <씨네21>은 2022년부터 트위터 코리아와 함께 영화와 시리즈를 주제로 대화를 나눕니다. 스페이스는 실시간 방송이 끝난 뒤에도 다시 듣기가 가능합니다. (https://twitter.com/cine21_editor/status/1542161727655186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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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22년 6월30일 밤 11시
참여자 남선우 기자, 모어 배우
영화로 꿈을 이룬 기분
아주 오래된 사이에서도 첫 순간은 끊임없이 발명된다. 시간을 얼마큼 쌓아왔든, 새 경험은 관계를 다른 무대로 데려간다. 발레를 지나 드래그로, 뮤지컬에서 에세이까지 횡단하며 자기표현의 지평을 넓혀온 모지민에게 활동명과 같은 제목의 다큐 <모어>는 그 기회였다. “전남 무안의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라 한번도 부모님과 극장에 가는 문화적 혜택을 누려본 적 없는” 그는 자기가 주인공인 영화가 개봉하고서야 비로소 가족 앞에서 발화할 수 있었다. “발레리노가 아니라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다”라고, “나는 딸도 아니오, 아들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개봉 첫주를 보내며 씨네21 트위터 스페이스를 찾은 모어는 가족과의 <모어> 관람을 이렇게 회상했다. “편찮으신 아버지가 또박또박 단어를 생각해내며 고맙다고 하셨어요. 그땐 꾹 참고, 집 가는 택시 안에서 엉엉 울었어요. 다음날 엄마는 전화하셔서 이제 딸이라 부르겠다고 말씀하셨어요. 형도 제게 고생 많았다고 했고요. 다들 영화를 통해서 제 존재를 정확히 알게 됐어요. 제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일 경험을 제 영화로 했습니다. 꿈을 이룬 기분이에요.”
갑옷을 벗어도 나인 채로
기쁨을 만끽하기까지, 모어에게 3년간의 촬영은 “자신과의 싸움”을 동반했다. 그는 “진실을 말하고 싶어도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겠는” 날들이 있었음을 고백했다. 드래그 퀸으로서 20년 넘게 활동했지만 “처음에는 카메라만 돌아가면 말도 안 나오고, 춤도 못 춰 가만히 서 있었다”는 그는 자연스러운 차림으로 하루를 보내본다거나, 일부러 씻지 않는 노력(?)까지 해가며 일상을 내려놓아보았다고. “이일하 감독님은 항상 ‘네가 두른 갑옷을 해체하라’고 했지만, 스스로 갑옷을 입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 촬영이 끝났어요. 완성된 영화를 보고서야 제가 입고 있는 갑옷을 알겠더라고요. 어쩌면 드래그라는 가면이 제게 더이상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무용을 전공해서인지 글쓰기도 춤추듯이 하는 것 같아요. 요즘은 글이나 또 다른 퍼포먼스로 민낯을 보여주는 게 더 좋아요.” 직접 쓴 책 <털 난 물고기 모어>와 영화 <모어>가 세상에 나온 이후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를 겪는 중이라는 그는 분장 없이도 애환을 그리는 법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지만, 책과 영화가 나온 후 인생을 조금 달리 보고 있어요. 이전의 삶을 초월했달까요? 달라진 감정을 전달하기 어려워 하염없이 가슴을 치고 있습니다!”
이랑의 리듬, 모어의 놀이
이날 스페이스 방송의 시작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킨 특별한 청취자가 있다. 모어의 친구이자 영화에 등장한 노래들의 원곡자인 뮤지션 이랑. 영화 속 모어의 몸은 이랑이 만들고 부른 <너의 리듬> <신의 놀이> <좋은 소식 나쁜 소식> 등에 맞춰 유연하게 흔들리고, 부드럽게 꼿꼿해진다. 방송에 참여한 이랑은 “사랑하는 모어가 영화를 찍고 있다고 하여 내 음악을 얼마든지 갖다 쓰라고 말했는데, 가편집본에 20곡 정도가 쓰인 것 같아 감독님을 만났다”고 밝혔다. “얼마든지 쓰셔도 좋으나 어느 정도 쓰실 건지 얘기해달라고 부탁드렸죠. 최종적으로 이일하 감독님이 고르신 곡들이 들어갔고, 제가 따로 어떤 곡을 써달라고 하지는 않았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라는 <신의 놀이> 가사가 특히 영화 <모어> 내면의 목소리와 잘 맞아떨어졌던 것 같아요. 그런데 모어님, 요새 슈퍼스타의 삶을 살고 계셔 건강이 염려되옵니다!” 그는 생방송 마이크를 내려놓기 전 모어를 향해 우정의 메시지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어의 인생영화는?
영화에서 모어가 가장 순수하게 신나 있는 장면은 <헤드윅> 원작자 존 캐머런 미첼과 마주할 때다. 미첼의 내한 콘서트 직전, 클럽 트랜스에서 <Wig In A Box>로 드래그 쇼를 했던 모어는 우연인 듯 운명 같은 사건을 거쳐 미첼을 만난다. 미첼이 “아이돌에서 친구가 되었다”고 말한 모어는 그가 영화 촬영에도 흔쾌히 임해줬다며 “성덕으로서 이보다 더 의기양양할 수가 없다”고 웃었다. <헤드윅> 이외의 인생영화를 묻는 한 청취자의 질문에 모어는 존 워터스 감독의 1972년작 <핑크 플라밍고>를 꼽기도 했다. “아름다우면서도 느닷없는 영화예요. 제 성향과 감성이 거기에 다 있어요.” 존 워터스 감독의 대표작으로 1988년작 <헤어스프레이>가 더 유명하지만, 모어는 <핑크 플라밍고>만의 ‘범접할 수 없는 추악함’을 더 아낀다고.
귀한 감정을 보존하는 마법의 주문
“<모어>를 볼 때만큼은 저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고된 현실에서 이런 귀한 감정을 자꾸 잊게 됩니다. 어떻게 모어답게, 끼 있고 뒤집어지게,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씨네21 스페이스 앞으로 온 애정 어린 질문에 모어는 곱씹었다. “영화를 보고, 제 삶을 보고, 참 많은 분들이 힘을 얻는다고 해요. 그들에게 힘을 주려 이런 일을 해온 게 아닌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야말로 힘이 나서 똥구멍 힘주고 살아가게 돼요. 제 영화와 책이 나왔다고 제가 대단하게 사는 줄 아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데 사는 게 다 똑같아요. 인생 너무 고달프죠. 어차피 고달픈 삶, 웃으며 살아봅시다. 애써봅시다. 하염없이!” 모어에게 <헤드윅> <핑크 플라밍고>가 있었듯, 누군가에게 <모어>가 보물이 되기를 바라는 그는 ‘냐하하’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방송이 끝날 즈음 ‘꺄루룩’ 하고 7월 첫날이 도착했다. 여름의 새날 앞에서, 모어는 행복해지자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스페이스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