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이 주는 심리적인 안정감이 있다”, 박인제 감독
박인제 감독은 스펙트럼이 넓은 감독이다. <모비딕> <특별시민>을 통해 한국 사회의 권력층을 해부하더니 <킹덤> 시즌2에서는 전 시즌보다 더 파격적인 비주얼을 선보이며 좀비 장르물 마니아로서 면모를 뽐냈다. 강풀 작가의 동명 원작을 영상화한 <무빙>은 TV드라마였다면 불가능한 수위의 슈퍼히어로물이면서 따뜻한 가족드라마, 복고적인 멜로이기도 하다. 박인제 감독은 부모와 자식 세대, 등장인물 수가 많은 만큼 장르 변화 역시 드라마틱한 이 대형 프로젝트를 책임질 수 있는 적임자였다. 그리고 그는 <무빙>의 많은 분량을 부산 지역에서 촬영했다. 청룡어워즈시리즈 대상 수상 후 3일 뒤, “<무빙>으로 하는 진짜 마지막 스케줄”이라며 홀가분한 모습을 보여줬던 그를 만나 부산 촬영에 관한 비하인드를 들었다.
- <무빙>은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이야기를 아우르는 작품이다. 부모 세대 스토리의 시대적 배경은 1990년대다. 해당 에피소드의 정서를 잘 살릴 수 있는 로케이션으로 부산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빙>은 로케이션 헌팅 기간도 길었고 제주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촬영했던 작품이다. 그런데 부산 같은 정서가 남아 있는 곳이 별로 없더라. 대본상에서는 주원은 인천으로 간다. 필사적으로 싸우고 도망가는 스토리가 내륙-감만 지방보다는 바닷가를 끼고 건물 층수도 낮은 지역과 어울린다. 인천은 화물이 들락날락하는 무역항이 많기 때문에 산업화된 느낌이 난다. 주원과 지희의 러브 스토리는 따뜻한 느낌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직 재개발 지역이 남아 있는 부산 로케이션에서 촬영했다.
- 어떤 장면들을 찍었나.주원 에피소드는 대부분 부산에서 찍었다. 10회 초반부 주원이 자해공갈을 하는 골목, 주원이 길을 잃고 모텔을 찾아다니는 곳은 감만동이다. 지희가 일하는 엄지다방과 주원과 어린 희수에 과거에 살았던 아파트는 영도에서 촬영했다. 최일환(김희원)의 과거에서 등장하는 국정원 로비는 부산외국어대학교 남산캠퍼스에 CG를 더한 것이고, 임무 수행을 완료한 주원과 나주(김국희), 봉평(최덕문), 진천(백현진)이 입국하다 아내의 죽음을 알게 되는 신은 부산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찍었다. 주원이 지내던 모텔이나 이재만의 아파트는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에 지은 세트다.
- 과거 느낌을 현실감 있게 살리기 위해 실제 로케이션 촬영을 고집할 수도 있었을 텐데 세트 촬영이 필요했던 이유는.
이를테면 여관 신을 모두 실제 장소에서 찍을 수 있겠다면 좋겠지만 안정상의 문제로 그럴 수 없었다. 주원이 벽을 부수는 장면을 찍을 때 테이크도 여러 번 가야 하고 조명 세팅 문제도 있지 않나. 부산에 세트를 짓고 이를 실제 로케이션(청주에서 촬영)과 잘 이어붙여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표현했다.
- 부산은 서울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다. 제작진 입장에서 부산 촬영의 이점은.
이쪽 일을 오래 한 사람들한테는 부산이 주는 심리적인 안정감이 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맛집이 어딘지 잘 알고 있으니 쉴 때도 편하게 쉴 수 있다. (웃음)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준다. 부산에서 거의 드라마 2회 분량을 찍었다.
- 한국은 할리우드처럼 땅덩어리가 넓지도 않고 거대한 세트장을 마음껏 지을 수도 없다. 그럼에도 <무빙> 같은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킹덤> 시즌2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사극 세트가 생각보다 다양하지 않은데 세트를 새로 지으면 제작비가 너무 많이 올라간다. 대전 야외 세트에 기와를 올려가며 촬영했다. <무빙>은 디즈니+의 도움을 받아 집행 가능한 제작비 안에서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
-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들이었나.CG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와 아닌 문제를 구분하고 후자의 경우 방식을 조금씩 바꾸는 거다. 이를테면 낮 시간대 불을 CG로 만들면 아직은 어색하다. 그럴 경우 밤 시간대로 바꾼다. 주원의 액션은 아날로그적으로 접근했지만 그 신에도 CG가 많다. 원테이크로 보인다고 원테이크가 아니다. 순간순간을 이어붙이는 작업이 모두 CG로 이루어진다. 아직 배워가는 입장이다. <무빙>을 하면서 배운 것을 다음 작품에서 또 응용할 수 있지 않을까.
- TV드라마였다면 불가능한 수위 높은 액션 시퀀스도 많았다.
원래 JTBC 편성도 검토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수위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주원의 회복 능력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살이 찢어졌다가 다시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이를 착하게 표현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또 내가 원래 잔인한 연출을 좋아한다. <킹덤> 시즌2도 그러지 않았나. (웃음) 그래서 TV드라마가 된다면 나는 빠지겠다고 했다. TV에서는 피도 나오면 안되기 때문에 많은 분량을 블러 처리 해야 한다. 강풀 작가의 원작을 보면 후속작에서 주원이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나온다. 그의 눈알을 뺐기 때문이다. 전개상 피해갈 수 없는 부분인데 TV였다면 주원이 눈알을 잃는 연출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감독이 연출했다면 다른 <무빙>이 나오지 않았을까.
- <무빙>의 봉석은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속 캐릭터와는 또 다르지 않나. 평범한 남자 고등학생이다.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미국에도 봉석 같은 캐릭터들이 있다. 어렸을 때 MBC에서 방영한 <날으는 슈퍼맨 위대한 영웅>의 주인공은 하늘을 날 수 있는 초능력이 생겼는데 착지를 못해서 맨날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핸콕>도 엉망진창인 초능력자를 보여주지 않나. 중요한 차이점은 <무빙>이 가족을 다룬다는 것이다.
- 특히 주원의 에피소드가 그렇지 않나. 처음에는 2023년에 다방 레지와 조폭의 사랑 이야기라는 설정에 의아해하던 이들도 마지막에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특정 캐릭터를 죽여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만큼 쉬운 게 없다. 비겁한 거다. 류승룡 배우와 나의 가장 큰 미션은 그렇게 보이지 않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무빙> 이야기 자체가 촌스러운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이를 세련된 은유로 표현하면 이도 저도 아닐 거 같다고 판단했다. 원래 대본에는 지희가 죽고 주원이 눈물 흘리는 게 인트로 시퀀스였다. 이런 신을 앞에 넣으면 시청자가 결과를 미리 알고 보게 되기 때문에 쿨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을 전편에서 끝내버리고 정리하면서 촌스럽게 끝내는 쪽을 택했다. 한국 관객은 신파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욕을 먹을 수 있다는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쪽을 더 좋아해주지 않을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