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니 조금 혼란스럽다. 좀비란 대체 무엇인가? 이 익숙한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궁으로 빠져든다.
좀비 장르의 규칙은 꽤 탄탄하게 정립되어 있어서 누구나 쉽게 기본 법칙들을 추출할 수 있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 강한 전염력. 부족한 지능과 뛰어난 청력. 느릿한 몸동작. 어째선지 산 사람만 뜯어먹는 편리한 습성. 적당히 망해버린 문명. 식량보다 풍족한 탄환. 꼭 필요할 때만 없는 항생제. 고립되어 모여사는 사람들. 좀비보다 무서운 사회생활 같은 것들. 하지만 이 규칙들은 언제든 편리하게 무시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좀비는 이제 거의 걷지 않는다. <28일후…>의 흥행 이후 다들 팔팔해져서 육상선수처럼 달리기 시작하더니 <태릉좀비촌>에선 국가대표 선수급 신체 능력으로 생존자들을 압도한다. 이쪽 분야의 터줏대감인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에선 대체 왜 좀비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는 특수촬영 괴물들이 당연한듯 등장해 분당 30컷의 화려한 컷 편집으로 밀라 요보비치에게 해체당한다.
워낙 클리셰 부수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장르다보니 감염으로 좀비가 탄생하지 않았거나 물려도 전염되지 않는 식의 설정을 가진 작품들도 찾아보면 꽤 있다. 전염될까 두려워 좀비에게 물린 사람들을 쏴죽였는데 알고 봤더니 전염병이 아니더라는 허탈한 반전을 가진 작품도 몇번 보았다. 그러고보면 좀비가 사랑에 빠지는 <웜 바디스> 같은 영화가 나온 지도 꽤 됐다. 물론 이 영화는 좀비 장르보다는 괴물과 인간이 사귀는 유의 로맨스에서 더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보아야 하지만. <아미 오브 더 데드>에서는 컨테이너 벽으로 좀비들을 라스베이거스에 몰아넣고 학살하며 금고에서 돈을 훔치는데, 이 정도면 좀비는 핑계고 그냥 사람을 무차별로 쏴죽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다.문명이 망하지 않고 좀비와 공존을 모색하는 식의 이야기도 은근히 자주 기획되는 것 같다. 미국의 옴니버스 호러 시리즈 <마스터즈 오브 호러>의 에피소드 ‘병사들의 귀환’에는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들이 좀비가 되어 무덤에서 부활한다. 물론 이 가여운 좀비들에게 기관총을 하나씩 쥐여주고 피와 살점이 튀는 무지성 전쟁 액션을 찍을 수도 있었겠지만 제작진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작품 속 좀비들은 투표권을 요구한다.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공화당을 반대하며 민주당에 표를 던진다. 흥미롭고 노골적인 아이디어다. 그런데 이걸 좀비 장르의 계보에 포함해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귀신이어도 똑같이 작동하는 이야기니까.
비슷하게 요즘 유행하는 설정 중 하나는 좀비가 되었다가 다시 치유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좀비면서 좀비가 아닌 애매한 위치에 놓인다. 요컨대 시체나 다름없는 몸을 지녔으면서 동시에 평범한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다거나,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만 가끔은 살아 있는 사람을 물어뜯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거나. 혹은 사회의 가장 아래층으로 내몰려 차별받게 되거나. 웹툰 <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나 영국 드라마 <인 더 플레쉬> 같은 작품들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데, 두 작품이 서로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데도 둘 사이엔 꽤 유사한 지점들이 존재하는 걸 보면 사람 생각이라는 게 비슷비슷한 범주를 벗어나기가 참 어려운 것 같다.
후유, 대충 유명한 작품만 나열해보아도 이 정도로 다채로운데, 넓고 깊은 저변에선 얼마나 더 기이하고 헛웃음나는 좀비들이 숨어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 모든 조합을 피해 새로운 좀비 이야기를 쓰느니 차라리 상대성이론을 공부해 스페이스 오페라를 쓰는 편이 낫다고 느껴질 정도다. 세상 아래 새로운 좀비 이야기가 가능은 한 걸까?
아니라고? 지금도 매년 새로운 좀비 이야기들이 쏟아지고 있지 않냐고? 물론 그렇다. 그게 장르의 미덕이니까. 장르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동시에 익숙함을 원하는 세계다. 거의 똑같은 설정과 레퍼토리 위에서 아주 약간의 감성적 변주나 액션 아이디어만 끼워넣어도 우리는 오히려 안심하며 ‘아, 다행이다. 좀비 맞네’ 하고 웃으며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보는 사람 입장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