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빠순이’라 불린 감독들이 말하는 나의 덕질, 우리의 영화
2022-07-16
글 : 남선우
사진 : 오계옥
제4회 서울여성독립영화제 토크콘서트 <카메라를 든 ‘빠순이’> 현장을 가다

장르와 대상을 초월해 팬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잊을 만하면 되새기는 현상. 좋아하는 상대에게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애먼 ‘머글’들에게 가고, 정작 덕후들은 멀리서 속 끓이고 마는 처지를 일컫는 말. 일명 ‘덕계못’(‘덕후는 계를 못탄다’의 준말)은 범(汎) 덕질계의 오랜 불문율이자 자조 섞인 넋두리다.

세월을 타고 수천 겹의 감정을 빚어내는 덕질의 생리로 인해, 이 슬픈 이야기는 최초 용례를 빗겨간 의미로 읽혀도 낯설지가 않다. 열렬히 사랑한 남성 연예인이 성범죄에 연루되었다면(<성덕>), 현생보다 아낀 게임 세계가 슬그머니 사라질 채비를 한다면(<내언니전지현과 나>), 팬심을 담아 무명가수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려는데 난항이 계속된다면, 그러다 그가 유명인 반열에 훌쩍 들어서버린다면(<듣보인간의 생존신고>), ‘덕후가 끝내 계 타기란 얼마나 요원한가.’ 읊조리며 먼 곳을 바라볼 수밖에.

<성덕>

그렇게 덕후의 넋을 달래는 와중 카메라를 든 감독들이 있다. 가수 정준영의 열렬한 팬이었던 오세연 감독은 그의 성범죄 이력이 드러난 후 느낀 분노와 혼란을 <성덕>에 풀어냈다. 넥슨이 1999년 론칭한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 게임 ‘일랜시아’가 2008년 이후 업데이트 없이 방치되자, 그 안에서 또 하나의 사회생활을 한 박윤진 감독은 <내언니전지현과 나>로써 후퇴하는 우주 한 귀퉁이를 붙잡았다. 권아정·김아현 감독은 ‘나만 아는 가수’였던 이승윤의 뮤직비디오를 찍으며 프로젝트를 발전시키던 중, JTBC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에 출연한 그가 유명세를 겪는 과정을 거치며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를 기록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

재밌게도 덕후들이 만든 이 세 편의 영화는 영화제 스타가 되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2020년 제20회 인디다큐페스티발, 제1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모은 입소문을 타고 그해 12월 개봉했으며, <성덕>은 지난 해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일찌감치 매진돼 연일 취소표 구하는 이들의 문의를 받아야했다.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는 가수 이승윤의 팬들은 물론 좋아하는 무언가를 향해 용기 내보고 싶었던 이들의 호응에 힘입어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관객상을 품에 안았다. 세 작품을 만든 네 사람은 직접 찍은 작품을 등에 업은 감독이 됨으로써 비로소 ‘계 탄 덕후’의 성배를 들었다.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영화도, 영화제도, 한국영화계의 변화도 여성이 만들어 나간다”는 포부로 출발해 올해 4회를 맞은 서울여성독립영화제는 여성감독들이 일으킨 ‘덕질 다큐’의 파도에 주목했다. 애정을 바친 대상을 앞장서 지키고, 살리고, 또 무너뜨리며 ‘빠순이’라는 멸칭을 스스로 해체하는 여성들의 서사가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7월 8일 금요일 저녁, 아리랑인디웨이브를 찾은 관객들은 객석과 오픈채팅방을 채우며 영화로 지독히 얽힌 ‘빠순이’들의 수다에 동참했다. 진행을 맡은 문아영 집행위원의 소개와 함께 <성덕> 오세연 감독, <내언니전지현과 나> 박윤진 감독,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권아정·김아현 감독이 무대에 올랐다.

문아영 집행위원, 오세연, 박윤진, 권아정, 김아현 감독 (왼쪽부터)

사회적 이슈를 다룬 다큐멘터리나 사적 다큐멘터리를 넘어 최근 ‘덕질’이 여성 창작자들의 카메라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다큐멘터리를 찍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아현 한 무명가수의 팬이 되어 자발적으로 기존 곡의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그러다 신곡 뮤직비디오까지 만들게 된 여정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졌어요. 제가 살면서 이렇게까지 용기 낸 적이 있었는지, 앞으로 이 정도의 용기가 또 찾아올지 모르겠더라고요.

박윤진 대학에서 졸업영화를 찍어야 했는데, 내가 하는 게임(일랜시아)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게임에 대한 시나리오를 쓰는 게 아니라, 게임 자체를, 게임 속 친구들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내언니전지현과 나> 개봉 초기에 관객 분들께 많이 들은 질문이 어떻게 게임 화면을 다큐멘터리에 넣을 생각을 했느냐는 거였어요. 그런데 다들 좋아하는 무언가를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지 않나요? 제겐 이미 수백 개의 게임 영상이 있었거든요. (웃음) 이걸 잘 편집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다큐멘터리에 접근했습니다.

오세연 2019년 3월 당시엔 연예인들의 단톡방 성희롱 사건에 대한 충격이 너무 커서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사건과 그 이후의 반응들을 유쾌하진 않지만 흥미롭게, 나름 중독성을 느끼며 따라가다 보니 아직도 범죄자가 된 스타를 응원하는 팬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대부분 배신감이나 분노 같은 예상 가능한 반응을 보였는데, 그러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게 제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은 직접 만나 이유를 들어야겠다 싶었죠.

열렬히 좇은, 혹은 좇았던 무언가를 영화에 담고자 할 때 고민한 지점도 있었을 겁니다.

김아현 아무래도 무명가수였던 분이 결국 유명가수가 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을 빌려 영화가 알려지는 방향을 경계하고 지양하려 했어요. 한 가수가 유명해지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영화를 남겨서 진심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박윤진 이 게임이 나한테만 사랑스러우면 어떡하나 고민했어요. 관객이 ‘이런 이상한 게임을 왜 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연출하려 노력했어요. 결과적으로 영화를 본 분들도 게임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제 맘이 영화에서 느껴졌구나 싶었습니다.

오세연 영화를 찍기 위해 다양한 팬들을 인터뷰해야 했는데요, 초기의 문제는 ‘그들에게 저를 어떻게 소개하느냐’였어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제가 그동안 덕질을 무척 나대면서 해왔더라고요. (웃음) 누군가의 팬으로서 방송 출연까지 했다보니 이젠 그 영상에 ‘지금은 안 좋아하겠지ㅋㅋ’ 같은 댓글도 달려요. <성덕>을 찍어서 이제 정말 안 좋아한다는 것도 알리고, 저와 같은 팬들이 힘을 얻었으면 해서 다큐멘터리를 계속 제작하게 됐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덕질 같았다"

‘카메라를 든’ 감독이라는 정체성과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빠순이’라는 정체성이 충돌할 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특히 덕질 대상, 팬 집단에 대한 거리두기를 고민하셨을 텐데요.

오세연 <성덕>에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비방과 비난이 일부 가미되어 있지만, 팬들의 이야기가 훨씬 많아요. 인터뷰이 대부분이 과거에 누군가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영화에 등장하다보니 부담감이 상당했죠. 우스갯소리로 우리 고소당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했어요. 영화가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덕질이라는 게 참 복잡하잖아요. 열렬히 좋아하기도, 열렬히 미워하기도 했던 ‘구 오빠’들이 이제는 범죄자가 되어버렸기에, 영화가 그 팬들의 마음을 어떻게 필터링해야 할지 많이 어려웠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어디까지 물어봐야 할지도 고민했고요. 그러다보니 ‘빠순이’였던 사람으로서 <성덕>을 만드는 과정 자체도 점점 덕질처럼 느껴졌어요.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인터뷰이로 나오고, 그들을 어떻게 보여줄지 계속 생각했으니까요.

박윤진 저는 단편을 포함해 네다섯 편의 작품을 만들었는데, 늘 사랑하는 것을 찍어왔어요. 전혀 모르는 대상은 카메라에 어떻게 담아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내언니전지현과 나> 또한 일랜시아를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다른 사람이 찍으면 샘 날 것 같으니까 더욱 사명감을 갖고 시작했죠. 힘들었던 점은, 제가 영화에 출연하게 되면서 생겼습니다. 감독으로서 출연해야할지 팬으로서 출연해야할지 고민한 거죠. 결국 편집에 임할 때만큼은 철저히 감독으로서, 영상 속 나를 출연진으로 인식하고자 했습니다. 스스로 창피한 장면이 있어도 넣었습니다.

권하정 저는 이승윤씨를 팬으로서 볼 때와 친구로서 볼 때, 그리고 감독으로서 볼 때 각각 다른 매력을 발견했어요. 멀리서 봤을 때는 ‘나쁜 남자’ 느낌이 있었다면 친구로선 따뜻하고 장난기 많은 사람이거든요. 화면을 통해 본인이 가진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낼 줄도 알고요. 그래서 뮤직비디오에는 제가 팬으로서 멋지게 느낀 모습을 담고자 했다면 다큐멘터리에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 속 얘기도 할 줄 아는 모습을 담으려 했어요.

박윤진 감독

<내언니전지현과 나>에는 공동체를 지키고자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방향성이 있어요. 그것이 팬들의 활동으로, 넥슨의 노동조합으로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노력한 만큼 보상 받는다’는, 박윤진 감독님과 길드원들이 일랜시아에 남아있었던 이유 중 하나인 가치를 이룬 사례이기도 합니다. 감독 개인에게 이 경험이 어떻게 기억되고 있나요?

박윤진 처음부터 넥슨 노조를 만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수많은 넥슨 직원들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노조에서만 답이 온 거예요. 그때 든 생각은 ‘노조랑 무슨 얘기를 하지?’였죠. (웃음) 그러다 넥슨 노조가 해온 일을 조사해봤는데, 그분들이 회사를 바꾸려고 노력한 모습이 제가 게임을 위해 움직인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껴져 직접 찾아뵙고 인터뷰를 했어요. 시작할 때만 해도 노조 지회장님이 넥슨에 대해 안 좋게 얘기하실 줄 알았어요. 둘이서 ‘넥슨이 원래 그래요~’라면서 욕하고 공감할 줄 알았는데, 지회장님이 ‘넥슨을 너무 사랑해서 노조를 만들었고, 넥슨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회사를 바꾸려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 뭔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나도 실은 일랜시아를 사랑해서 바꾸려 하고 있었구나, 깨달은 거죠. 저는 영화를 찍으며 넥슨을 움직였지만, 그분은 회사원으로서 노조를 하신 거잖아요. 20대 후반에 영화를 찍으며 그 행보를 지켜보면서 나도 앞으로 무언가를 바꿔볼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어요.

오세연 감독

<성덕>에 언급되는 남성 연예인들의 공통점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영화가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지만 전 세계적으로 촉발된 미투(me too) 운동 또한 이 작품의 출발점이었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투 운동은 감독님의 일상과 덕질에 어떤 영향을 줬나요?

오세연 영화를 찍기 전부터 일상에 영향을 미쳤어요. 저는 여중, 여고를 나와 항상 여자인 친구들과 있었어요. 그래서 느끼지 못해온 무언가를 미투 운동을 통해 점점 보게 되었달까요. 선생님의 무신경한 말씀이나 국어 시간에 배우는 고전시가 등에서 ‘이게 도대체 뭐지?’ 싶은 감정을 느낀 거죠. 그럼에도 성범죄 사건들이 나와 연결돼있다는 생각까진 못했는데, 내가 아는 사람이라 여겼던 누군가가 범죄의 주축이 되었다는 걸 들은 거죠. 어쩌면 이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기인 것 같아요. 여기 계시는 감독님들도 무언가를 사랑하셨고, 앞으로도 사랑할 테지만, 점점 의심이 많아지지 않나요? 온전한 믿음이라는 게 불가능해지는 때란 생각이 듭니다. 어저께 서울여성독립영화제 개막작 <경아의 딸>을 봤는데, 스타와 팬 사이가 아닌 인간관계에서도 그런 공포를 느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덕질을 안 하는 게 아니에요. (웃음) 덕후의 DNA라는 게, 누군가를 안 좋아하고 있으면 너무 심심하고 무료하거든요. 뭔가를 좋아할 때 비로소 일상의 루틴이 생기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제 순도 100%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줄 수는 없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권아정, 김아현 감독 (왼쪽부터)

<듣보인간의 생존신고>가 영화제에서 상영될 때, 초반에는 관객들이 유튜브 영상 보듯 많이들 웃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프로젝트에 임하는 출연진들의 마음이 드러나니 관객들의 웃음기도 사라지고 함께 안절부절못하며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에도 이 불안이 결과물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며 용기를 얻었다는 분들이 많아요.

권하정 실은 서울독립영화제에 제출한 연출의도에도 감히 용기에 대해 썼었어요. (서울독립영화제 홈페이지에 공개된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연출의도에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해 볼 수 있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라는 걸 느꼈을 땐 자신감은 고갈됐고, 용기는 동났다. 그런 우리를 움직인 노래 한 곡. 그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말자고 우리는 되뇌었다. 우리 해 보자, 우리 뭐든 해 보자, 우리 뭐라도 해 보자.”라고 적혀있다.-편집자) 관객들이 저희에게 “어떻게 그렇게 용기를 내셨어요?”라고 물으실 때마다 그냥 운과 타이밍이 따라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괜히 송구스러운 마음도 들었거든요. 아마 저희 영화를 보시고 용기를 얻은 관객들 마음에 이미 99%의 용기가 있었을 거예요. 이 영화는 나머지 1%를 채워드린 것 같아요. 오히려 그분들의 감상과 눈빛이 저희가 다음을 기약하게 하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버려지지 않고, 사랑하는 채로

다음은 관객 질문입니다. 덕질의 에너지를 영화에 녹이기 힘들 때는 어떻게 하셨나요? 사랑한다는 감정이 내 삶의 일부이기에 촬영을 시작했지만, 그 마음을 유지하기 힘들 때 어떤 방법을 취하셨는지 여쭤보시는 것 같아요.

박윤진 일랜시아라는 게임이 정말 엉망진창이 되었거든요. (웃음) 그럼에도 그만둘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안에서 만난 친구들이에요. 길드원들과의 소통을 위해 억지로라도 게임에 들어갔고,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영화에도 드러난 것 같습니다.

오세연 <성덕>은 분노로 시작한 작품이었는데 점점 감정이 변하더라고요. 화가 나서 카메라를 들었지만, 좋아했던 사람을 떠나보내기에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것에서 오는 슬픔이 컸어요. 이 마음을 어떻게 잡아나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내레이션을 쓸 때도 일부러 과거에 즐겨본 스타의 영상을 틀어놓고 ‘그땐 그랬지’라며 감정을 잡은 후, 그가 우스꽝스럽게 찍힌 이상한 짤방들을 보면서 정신 차리기를 반복했던 것 같아요. (웃음) 2년 전, 5년 전 등등의 감정을 영화를 위해 왔다갔다 해야 했기에 괴상한 노력을 좀 했습니다.

두 번째 관객 질문입니다. 세 작품은 하나의 게임, 한 명의 연예인을 좋아한 것에서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감독님들과 함께하는 길드원들, 팬들, 동료들의 존재도 점점 중요해집니다. 그 관계망을 인류학적인 시선으로도 지켜보게 되는데요, 무언가를 좋아하는 행위로부터 친밀한 인간관계를 발전시키기는 경험은 어떠셨나요?

김아현 하정 언니가 이승윤씨의 뮤직비디오를 찍는 것으로 이 여정을 시작하자고 제안했을 때 바로 수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제껏 쌓아온 신뢰 때문이에요. 언니와 이런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이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로 얻은 가장 큰 수확이자 기쁨이고요. 게다가 영화를 통해 정말 수많은 새로운 사람을 만났거든요. 저희와 세상을 비슷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 말없이도 위안을 얻었어요. 그러면서 저는 더 잘 살고 싶어졌어요. 돈을 벌어야겠다는, 유명해져야겠다는 게 아니라, 얼마나 세상을 더 이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 더 따뜻한 마음으로 희망을 주며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박윤진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찍기 전에는 저와 길드원들을 ‘버려진 게임을 아직도 하고 있는 불쌍한 우리들’로 바라봤어요. 그런데 영화를 찍으며 돌이켜보니 우린 버려진 사람들이 아니라 무언가를 아직도 사랑하며 모여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이 인식 변화가 엄청난 거예요. 이전에는 운이 좋아서 길드원들과 잘 맞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제야 한명 한명이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기에 친밀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걸 알고, 이 관계의 소중함을 더 체감합니다.

오세연 <성덕> 후반부를 편집하며 영화 속 감정이 너무 나만의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 영화가 ‘그래서 덕질을 그만해야 한다’ 혹은 ‘그래도 덕질을 계속해야 한다’라는 명확한 답을 주기보다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방향으로 가다보니, 커다란 주제를 흐릿하게 만드는 걸까 걱정도 했고요. 뜻하지 않게 부산국제영화제 화제작이 되며 걱정이 더 커졌는데, 다행히 영화 바깥의 관객이 영화 안으로 계속 들어온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감독과 출연진들의 고민이 끝나지 않고 확장되었달까요. GV에서 ‘영화 잘 봤습니다’가 아니라 ‘저는 누구 팬이었어요’라는 고백으로 입을 떼는 관객이 많았어요. <성덕>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저처럼 덕질이 인생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면서, <성덕>이 더 멀리 가고 있다는 생각도 많이 합니다.

오픈채팅방에 가장 많이 들어온 질문입니다. 감독님들의 계획과 차기작이 궁금합니다. 오늘 자리에 함께한 소감도 들려주세요.

권하정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는 내년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마음 다치지 않고 잘 마무리 했으면 좋겠습니다. 차기작은 차차 준비해나갈 것 같아요.

김아현 이하 동문입니다. (웃음) 서울여성독립영화제에서 세 작품의 감독을 같이 초청해주셔서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고민했어요. 가장 먼저 떠올린 키워드가 ‘연대’예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크다는 게 보인 자리였습니다.

박윤진 감독님들과 토크한 것은 처음이라 재밌었어요. 사실 <내언니전지현과 나>가 개봉한 2년 전과 지금의 저는 또 많이 달라요.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할 때마다 ‘영화 어떻게 찍었지? 그때 어땠지?’ 다시 생각합니다. (웃음) 영화 한 편을 찍었다고 사람이 싹 바뀌진 않거든요. 제가 넥슨을 찾아가서 무언가를 바꿨다고 해도, 다른 불의까지 못 참는 사람은 아니에요. 다 참고 넘어가요.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찍었던 제 자신을 자꾸 잊거든요. 그래서 자꾸 떠올리려고 노력해요. 지금은 차기작 다큐멘터리 기획을 마쳤고요, 10월부터 촬영에 들어갈 것 같아요. 소재는 아직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전 늘 ‘사랑하지 않는 걸 어떻게 찍지?’ 싶었거든요? 그런데 새 작품을 기획하다보니 덕질이 아닌 방식으로도 출연진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느낍니다. 그리고 제가 요즘은 일랜시아를 안 한다고 하면 관객 분들이 많이 아쉬워하세요. (웃음) 그래도 잘 지내고 있답니다. 길드원들과도 잘 지내고 있고요. 지금은 일랜시아를 안 하지만, 늘 사랑하고 있습니다.

오세연 영화제에서 오며가며 뵙고, 가볍게 인사드린 감독님들인데 모여서 얘기해볼 생각은 저희 중 누구도 못했어요. 서울여성독립영화제에 감사드립니다.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차기작은 다큐멘터리가 아닌 형태로 이제 막 기획계발을 시작한 단계입니다. <성덕> 개봉에 대한 질문도 많이 받았는데, 10월 전에는 꼭 하지 않을까 싶어요. 꼭 극장에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아영 집행위원, 오세연, 박윤진, 권아정, 김아현 감독 (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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