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한편이 플랫폼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KT 그룹의 계열사 SKYTV가 올해 4월 출범시킨 ENA는 채널 번호를 알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해야만 하는 변방의 케이블 채널이었지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시청률이 1회 0.9%(닐슨코리아 전국 기준)에서 9회 15.8%로 치솟으면서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강력한 킬러 콘텐츠의 등장은 소비 패턴의 변화와 편성의 벽마저 뛰어넘었다. 전 연령층 대상 여론을 살필 수 있는 한국갤럽 2022년 7월 한국인이 좋아하는 TV프로그램 설문에서는 지상파와 비지상파를 통틀어 역대 드라마 중 최고 수치로 1위를 차지했다(이는 <SKY 캐슬>이나 <도깨비>도 뛰어넘은 수치다). 온라인 세상의 반응은 더욱 열렬하다. 아직 일부 국가에서만 시청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넷플릭스 글로벌 차트에서 2주 연속 비영어 TV부문 1위를 차지하는 등 해외 시장에서의 기세도 심상치 않다.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 채널의 규모를 뛰어넘는 신드롬을 야기한 드라마가 내용 면에서도 유의미한 진보를 꾀하고 있는 점은 상징적이다. 법정 드라마의 뼈대에 사회 초년생의 성장을 결합한 드라마는 매회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사회적 약자와 차별 문제를 녹여내고 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제작한 이상백 에이스토리 대표는 <시그널> <킹덤> 등 한국 드라마 산업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됐던 도전을 이어온 개척자다. 그는 “지금까지 36편의 작품을 제작했지만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신드롬의 의미를 곱씹고 있었다.
- 문지원 작가의 전작 영화 <증인>에서 지우(김향기)는 “엄마, 나는 변호사는 할 수 없을 거야. 자폐니까. 하지만 증인은 할 수 있어. 증인이 되어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라고 말한다. 이 대사로부터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가 주인공인 법정물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나.
= 미국 출장을 갔다가 만난 지인이 영화 <증인>을 추천했다. 마침 비행기에서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감상했다. 펑펑 울었다. 회사로 돌아와 프로듀서들에게 얘기를 꺼냈더니 다들 작품이 괜찮다고 의견을 모았다. 영화 <증인>을 드라마로 만들겠다며 시작한 작품은 아니지만, <증인>의 대사는 영화와 드라마를 연동하는 어떤 단추가 됐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가 주인공이라면 우리가 보지 못했던 변호사 상을 보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폐에 대한 시각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시나리오작가가 이미 학습이 된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만남을 요청했다. 문지원 작가는 원래 영화감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일정상 공백이 생기면서 역으로 드라마를 제안할 수 있었다.
- 몇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하고 영화 시나리오만 썼던 문지원 작가가 16부작 드라마 대본도 쓸 수 있겠다는 판단은 어떻게 내렸나.
=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 이야기를 써볼 의향이 있느냐고 제안했을 때 본인이 하고 싶어 했다. 대본은 작가님이 주도적으로 썼고, 에이스토리 프로듀서 두명이 붙어서 16부작 드라마 호흡에 맞는 가이드를 주는 방식으로 초고를 작업했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던 분이라 그런지 한 회차 안에서 이야기가 완결되는 구성으로 대본을 쓰더라. 사실 기존 드라마들은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다음 회를 봐야 의문이 풀리는 구조를 취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지원 작가는 작품의 세계관을 흔들 수가 없다며 이런 구성을 따르지 않았다.
- 그런데 문지원 작가가 고집한 구성이 시청자 유입에 도움이 됐다. 에피소드마다 다른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어떤 회차부터 봐도 스토리를 쉽게 따라갈 수 있다.
= 일반 시청자들이 봤을 땐 시청률을 위한 트릭을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참신했던 것 같다. 긴 호흡으로 콘텐츠를 즐기지 않는 요즘 소비자들의 특성과도 잘 맞았다.
- 기존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너무 편협하게 재현되거나 왜곡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소재다.
= 실제로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지만 변호사가 된 분이 있다. 헤일리 모스라는 미국 변호사다. 그의 말투와 행동을 관찰하며 우영우 캐릭터의 현실성을 먼저 검증했다. 이 소재를 잘못 다루면 드라마가 엄청난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초반부터 김병건 나사렛대학교 유아특수교육과 교수 등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대본을 썼다. 그래서 집필 기간이 1년 반 정도로 오래 걸린 편이다. 유인식 PD도 전문가 자문을 받는 자리에 함께하며 자폐의 특징을 공부했고, 배우에게 연기 디렉션을 줄 때 참고했다.
- 신인 작가의 대본이었지만 제작진이 탄탄하게 붙었다. 유인식 PD는 <자이언트> <샐러리맨 초한지> <낭만닥터 김사부> 등을 연출한 베테랑이다.
= 무조건 연출을 잘하는 분이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한국의 톱클래스 연출자들은 오래전 미리 계약을 해둬야 함께 일을 할 수 있다. 유인식 PD와는 알고 지낸 지 십수년 된 관계다. 그가 원래 하려던 작품이 약간 늦춰지면서 시간이 생겼을 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대본을 주면서 공백을 파고들었다. (웃음)
- 매 에피소드가 방송되고 나면 네티즌이 실제 있었던 사건 자료를 공유한다. 법률 용어를 정확하게 구사할 뿐만 아니라 실화를 에피소드에 적절하게 녹여내 설득력을 담보하는 솜씨가 좋았다.
= 엔딩 크레딧에 신민영 변호사의 <왜 나는 그들을 변호하는가>, 조우성 변호사의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이긴다>, 신주영 변호사의 <법정의 고수> 등이 원작으로 소개된다. 저작권을 일부 구매해서 베이스로 놓고 대본을 썼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보기에 말도 안되는 황당한 사건은 없을 것이다.
- 신생 채널 ENA의 투자를 받고, 비주류 채널에서 시청률 15%를 돌파해 화제가 됐다. 제작비가 무려 200억원이 들었는데 다른 곳보다 ENA가 높은 금액을 불러 계약이 성사됐다는 얘기가 사실인가.
= 잘못된 정보다. 제작비는 알려진 것의 4분의 3 정도다. 어떤 곳이든 방송이 끝나기 전에 먼저 돈을 주지 않고 몇번에 걸쳐 분할 입금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제작사 자금을 먼저 써서 만들었다. 계약상으로는 제작비를 모두 회수했지만 실제 돈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ENA와 계약을 맺은 것은 IP 때문이다. 예전엔 제작사가 방송국과 외주 제작 계약을 맺고 제작비의 70% 정도를 받은 후 IP는 방송국이 가져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는 넷플릭스가 IP 권리를 갖는다. 반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국내 방영권은 ENA 채널, 중국을 제외한 해외 방영권은 넷플릭스와 계약하고 IP는 제작사가 소유한다. 이같은 방식으로 계약을 맺으면 다양한 부가 사업을 할 수 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이달 웹툰을 오픈하고 그외에도 준비 중인 IP 사업이 있다. 드라마가 시즌제로 간다면 해외에서도 비즈니스가 가능한 구조다. 전세계를 아우르는 IP를 만들면 방탄소년단처럼 글로벌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회 시청률은 0.9%였다. 신생 채널에서 방영되면 드라마 주목도가 떨어질 거라는 우려가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결단을 내린 이유는 무엇이었나.
= 에이스토리는 이런 경험을 처음 한 게 아니다. tvN 개국 당시 최초의 케이블 미니시리즈 <하이애나>를 납품했다. <시그널>은 장르 드라마가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킹덤>을 준비할 때만 해도 배우 캐스팅이 너무 힘들었다. 제작비가 오버되면서 회사가 망할 수 있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대본이 넷플릭스로 쏠리지 않나. 쿠팡이 한국의 아마존이 될 것 같다는 판단하에 최근엔 쿠팡플레이 <SNL 코리아>를 제작했다. 이런 시도들이 연달아 성과를 거두면서 ENA와의 계약도 도전할 수 있었다. 종편이라는 새로운 윈도가 생기면서 드라마 시장이 더 커진 것처럼, KT의 자금이 유입되면 분명 콘텐츠 시장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KT는 꾸준히 채널 운영 사업을 했고 콘텐츠에 투자할 수 있는 자금이 있는 회사다. 새로운 플랫폼을 만날 때 그들이 콘텐츠에 돈을 쓸 의지가 있는지를 보는데, ENA는 킬러 콘텐츠를 만들어 플랫폼을 살리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무엇보다 시청률 5% 이상을 기록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 그리고 지상파 시청률 10%, tvN 시청률 10%와 체감이 다르지 않나. 처음 듣는 채널에서 방송 중인 드라마가 시청률 0.9%에서 15%까지 상승했다는 것 자체가 홍보 효과가 있다.
= 사실 그것도 노렸다. 이건 터지면 우리가 목에 힘을 줄 수 있는 구조라고 생각했다.
- 우영우 역의 박은빈은 어떻게 캐스팅하게 됐나. 제작사와 원래 인연이 있는 배우는 아니었는데.
= 아내가 작가 출신이다. 우영우 역에는 맑고 지적인 이미지에 딕션이 좋은 배우가 어울릴 것 같다며 박은빈을 언급했다. 원래 좋아했던 배우지만 그 말을 듣고 더 유심히 살펴봤다. <이판사판>에서 판사 역할을 한 적도 있고 워낙 경력이 오래돼서 연기력도 탄탄하니 우영우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당시 박은빈씨는 <연모>를 먼저 찍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혹시 마음이 변할까봐 <연모> 촬영장에 커피차도 자주 보냈다. (웃음) 긴 시간 사극 드라마를 촬영하느라 굉장히 힘들었을 텐데 크랭크업을 하자마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준비를 시작했다. 첫 대본 리딩을 하던 날 캐릭터를 소화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끝나고 사인을 받았다. 내가 대본집에 사인을 받은 유일한 배우다.
충분한 퀄리티가 담보되기 전에는 드라마를 제작하지 않는다
- 드라마 제작을 하기 전에는 KMTV(현 Mnet)에서 음악 PD를 했다고 들었다.
=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H.O.T 콘서트도 공동 연출했다. IMF로 대기업들이 케이블 방송 사업을 하나둘 포기하기 시작했고, 국민일보 재단에서 현대방송을 인수할 때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 그러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계속 월급쟁이로 회사를 다닐 것인가, 아니면 H.O.T 콘서트 같은 킬러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인가. 인생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는 역시 제작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웃음) 당시 시청률이 제일 높은 콘텐츠는 드라마였고, 음악보다는 드라마의 힘이 더 강력하다고 생각했다. 드라마 제작에 필요한 인프라의 핵심은 작가에 있다. <허준>을 쓴 최완규 작가와 함께 2004년 에이스토리를 세웠다.
- 일찍부터 해외 시장을 고려했던 것 같다. 2006년에 이미 미국 진출 가능성을 언급했던 인터뷰 기사가 있더라.
= 할리우드에서 열리는 LA 스크리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소위 6대 메이저 배급사가 자신들의 콘텐츠를 전세계 미디어 채널에 팔기 위해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다. 당시 <위기의 주부들> 시즌2의 해외 판권 판매 수익이 1천억원이 넘었다. 미국 내 비백인 인구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동양권 국가의 콘텐츠가 관심을 받는 날이 언젠가 올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언젠가 할리우드에 진출하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 현재 에이스토리는 시트콤이나 예능 프로그램, 숏폼과 미드폼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한다.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는 방향으로 사업 계획을 짠 이유가 무언가. 극장영화에 한번도 도전하지 않는 이유도 궁금하다.
= 기존의 외주 제작 방식으로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큰 수익을 내기 어려웠다. 그런데 공격적으로 콘텐츠에 투자하는 글로벌 OTT들이 등장하면서 좋은 기획이 있다면 다양한 비즈니스를 펼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됐다. <SNL 코리아>는 저작권이 해외에 있지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는 의미에서 제작했다. 코미디를 잘 쓰는 작가를 양성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 반면 극장영화는 내가 모르는 분야다. 짧은 시간 안에 흥행이 결정되는 비즈니스 구조는 성격상 잘 안 맞는다.
- 스튜디오 드래곤이나 제이콘텐트리와는 달리 에이스토리만의 캡티브 채널(계열사 간 내부 채널)이 없다는 것이 지적되어 왔는데.
= 그래서 안정적인 매출이 나오지 않는다고 외부에서 판단하기도 하지만, 업계 상황이 바뀌었다. 우리는 캡티브 채널이 없기 때문에 충분한 퀄리티가 담보되기 전에는 드라마를 제작하지 않는다.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퀄리티가 좋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제작한 작품 중에 적자가 난 작품이 없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모두 흑자를 달성했다. IP를 기반으로 한 부가사업들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다면 새로운 이익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 과거 넷플릭스 독주 체제에서 디즈니+, Apple TV+ 등 다양한 글로벌 OTT가 플랫폼 산업에 뛰어들면서 지분을 넓혀가고 있다. 웨이브, 티빙 등 토종 OTT들도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에 뛰어들었다. 제작사는 어떤 영향을 받고 있나.
= 아주 좋다. 그들은 넷플릭스, 쿠팡플레이 등 다양한 곳에서 성공한 경험이 있는 우리 같은 제작사를 선호할 수밖에 없으니까. 규모가 큰 작품은 거액의 투자가 가능한 넷플릭스, 디즈니+와 같은 OTT 플랫폼과 먼저 계약을 맺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 채널을 찾는다. 원래 캐스팅이 세면 플랫폼의 선택도 빨리 받을 수 있는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계기로 대본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분위기가 바뀌었으면 한다. 소수의 스타들에게 대본이 몰리면 그들의 몸값이 끝도 없이 치솟는다. 그보다는 다양한 스타들을 탄생시키고 제작비는 영상에 더 투자하는 것이 작품의 퀄리티를 높일 수 있다. 박은빈처럼 잠재력을 가진 이들을 찾기 위해 더 유심히 배우들을 관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