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일 개봉하는 <비상선언>은 몰입력 있는 재난 상황과 뜨거운 감정의 온도, 기꺼이 모사와 풍자의 대상이 될만한 한국 사회의 현주소까지 위태로운 항공기의 궤적 안에 아우른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한 극단을 보여준다. 지난해 칸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받아 첫선을 보인 <비상선언>은 <더 킹> <관상>의 한재림 감독이 대규모 항공기 테러물을 표방하면서 초호화 캐스팅의 위용 역시 자랑한다.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김남길, 임시완, 김소진, 박해준이 적재적소에서 활약한 대테러의 아수라장 속에서 흥미로운 잔해들을 추려내 다시 엮어보았다.
<비상선언>은 완력이 센 영화다. 이 비행 경험에 한번 동참하게 되면 속수무책으로 이끌려가 진이 다 빠져서야 나올 수밖에 없다. 2시간 20분 동안 스펙터클을 연출하는 거의 모든 요소들이 스트레스를 유발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것은 결코 부정적인 서술만은 아니다. <비상선언>이 주는 피로는 대체로 의도한 결과이며 몰입의 증거이기도 하다.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촬영을 시작한 <비상선언>은 짧은 잠복기를 거쳐 증상 발현이 시작된 바이러스가 어떻게 폐쇄된 집단을 분열과 공포로 몰아넣는지 서술하면서 영화와 현실의 시차를 절묘하게 좁힌다. 바이러스 감염과 테러리즘의 증식 동안 덩달아 스크린에 자연 발생하는 것들로는, 이코노미와 비즈니스를 가르는 계급의식, 차별과 혐오를 발설하는 국민청원, 국제적 이해관계의 단면 등이 꿈틀댄다. 상공에서 360도 회전하는 비행기 내부의 카오스를 구현한 장면은 한국영화에서 전에 본 적 없는 항공 재난의 새 기술과 비주얼로 일찍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중반부까지 준수한 전개와 뛰어난 완성도의 시각적 스펙터클을 보유한 <비상선언>이 마지막 무렵 스스로 지치지만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관객이 끝까지 인내심을 갖고 이 영화가 추구하는 극한을 버텨주었을 것이다.
빌런의 빠른 등장, 이를 바라보는 두명의 가장
“사람들 많이 타는 비행기가 어디예요?” 무서우리만치 뽀얗고 파리한 얼굴의 젊은 남자가 공항 티켓데스크에서 이렇게 묻는다. 그의 낭창한 말투처럼 이후 <비상선언>이 사건에 돌입하는 방식에는 주저함이 없다. 모세혈관이 보일 것 같은 얇은 피부 위로 예민함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배우 임시완은 영화가 시작하기 무섭게 공항 화장실에서 자기 겨드랑이를 찢은 다음 그 안쪽에 수상한 캡슐을 욱여넣는다. 그러니 <비상선언>의 첫 번째 주도자(protagonist)는 빌런이라고 해도 좋다. 같은 공항, 아토피로 따돌림당하는 초등학생 딸을 데리고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남자 재혁(이병헌)이 하와이행 비행기에 오른다. 공항에서부터 진석(임시완)과 마주쳐 그의 위협적인 기류를 감지했던 부녀는 이륙 이후 테러범의 정체를 자각하는 첫 번째 목격자로 자리 잡는다. 같은 시간, 팀장급 형사인 인호(송강호)는 하와이로 우정 여행을 떠난 아내가 끓여둔 열흘치 분량의 곰국을 소분한 다음 느지막이 강력반으로 향한다. 어쩌면 장난일 수도 있는 비행기 테러 예고 영상이 인호의 레이더에 포착되자, 베테랑의 촉은 자꾸만 아내가 탄 비행기에서 일어날 악몽을 예지하게 만든다. 인천에서 하와이로 이륙한 KI501 항공편 안에선 곧이어 신체 곳곳에서 피를 뿜기 시작하더니 숨이 끊어지는 사망자가 발생한다.
상공에선 재혁 부녀와 테러범 진석, 부기장 현수(김남길)와 사무장 희진(김소진)이 고투하고, 지상에선 인호와 경찰들, 그리고 테러 대응팀을 꾸린 국토부 장관 숙희(전도연)와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의 실장 태수(박해준)가 모습을 드러낸다. 두개의 무대로 분리된 인물들은 중반부까지 민첩한 편집에 의해 금세 하나의 그물망으로 엮인다. 생물학자 진석이 오랜 기간 실험해 잠복기를 극도로 줄여버린 바이러스처럼, 주요 갈등과 위기가 지체없이 이륙하는 모양새다. 그렇기 때문에 두개의 무대를 이어줄 관제탑 같은 두 캐릭터도 오히려 힘을 얻는다. <부산행> 이후 재난영화의 가부장 신파에 시들해진 한국 관객은 <비상선언>의 두 기둥이 각각 가족을 보호하려 애쓰는 가장이란 사실이 지레 염려스러울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송강호와 이병헌은 평범성에 대한 예리한 본능과 직관, 그리고 관찰을 더해 캐릭터를 부담스러운 하나의 상징이 아니라 그럴듯한 개인으로 안착시킨다. 이 영화에서 인호는 매우 처절한 분투와 이상적인 희생을 감행하는 남자이고 재혁은 위기의 순간에 영화의 조종대를 쥐는 영웅적 인물이지만, 과잉을 의식한 배우의 연기는 내내 안정적인 완급 조절을 이어나가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두 남자가 각자의 무대에서 한동안 꽤나 무력해 보일 때이다. 비행기가 거꾸로 뒤집힐 때 그저 얌전히 안전벨트에 매달려 있거나, 고위급 관료들이 탁상공론을 벌일 때 유리문 너머로 지켜보는 제동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인물들은 비로소 자기 밑바닥에서 추진력을 얻는다.
불가항력의 스펙터클이 시사하는 바
오늘날 바이러스 재난물은 좀비에 대한 연상을 피해가기 어렵다. 감염된 인간이 피를 토하고 발작을 일으킬 때 영화가 추구하는 장르의 체질과 상관없이 좀비로의 변형을 상상하게 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학습의 결과일 것이다. <비상선언>은 그 지점에서 의외로 건조하다. 심한 경우 죽거나, 혹은 시름시름 앓는 감염자들의 모습은 질병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 수위를 벗어나지 않기에 러닝타임이 흐를수록 오히려 공포스러워진다. 몸을 타고 흐르는 혈액과 피부 위에 자라나는 수포는 극도로 괴이한 지경까지 나아가지 않기에 그 고통을 상상 가능한 영역에 두게 한다. 항공 테러리즘 영화로서 <비상선언>이 추구한 리얼리티 역시 비슷한 궤를 같이한다. 이착륙을 제외하면 항공기는 언제나 공중에 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제약처럼 당연해서 간과하기 쉬운 조건들을 극대화하는 디테일이 준수하다는 의미다. 내부 공기를 정화해 다시 주입하는 순환 장치는 기내를 “바이러스 감염을 위한 최적의 장소”로 만들고, 시야에 보이지 않던 기장의 감염으로 추락의 공포가 발생하는가 하면, 슬슬 퇴장을 준비 중인 <탑건: 매버릭>에나 어울릴 법한 포격의 상황까지 연출된다. 상공에서 연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익스트림이 여기에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액션의 지분이 적은 지상 시퀀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중후반부에 급작스럽게 틈입하는 카 액션 신은 <비상선언>이 추구하는 스펙터클의 태도가 무엇인지 짧고 굵게 주장한다. 불시에 휩쓸려버려 완전히 장악된다는 것. <비상선언>은 이 거부할 수 없는 재난의 불가항력에 관해 서사적으로 주제를 구축해나가는 이전에 시퀀스별로 연쇄적인 시각적 충격을 더하면서 관객이 이 감각을 피부로 흡수하게끔 유도한다. 나아가 영화는 거부할 수 없고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재난 앞에 선 인간이 오히려 인간다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까지 성취하려 한다.
명료하거나 투박하거나
같은 동작을 하더라도 아주 작은 차이로 고도의 자연스러움을 획득해내는 배우의 능력이야말로 관객의 이입을 돕는 가장 효과적인 요소다. <더 킹>의 검사 역할로 단연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조연으로 떠올랐던 배우 김소진이 <비상선언>의 도입에서도 훌륭한 안내자로 나선다. 이륙 준비를 마친 사무장 희진의 앞으로 비행기의 출입구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장면이 있다. 이후 등장하는 영화의 온갖 결정적인 장면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매혹적인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다. 화려한 볼거리의 효과가 빚는 감흥과는 사뭇 다른데, 이는 충분한 핍진성을 보유한 내용(상황, 인물)이 밀도 있게 구성된 숏 안에 담긴 덕분이다. <비상선언>에는 이처럼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가장 사실적으로 움직이는 순간의 드문 조화로움이 분명히 존재한다. 캐릭터들의 전사나 세부 설명이 대체로 생략되어 있고 앙상블 영화로서 개별 캐릭터의 비중이 크지 않은데도 초반 캐릭터 소개에서 그다지 빈약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런 연유일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영화는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풍자하는 날 선 파편들을 흩뿌려놓았다. 대학 진학을 위해 한국에 돌아온 해외파 엘리트 진석은 어쩌다 재개발을 앞둔 강남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은둔하는 실직자가 되었을까. 그리고 어째서 모두가“다 함께 갇혀서 죽는 쥐새끼들같이” 공멸하기를 바라게 되었는가. 피부에 돋아난 수포를 증거로 감염자와 비감염자를 나누려는 이기심은 지극한 현실일까 아니면 극적 과장일까. 실시간에 가깝게 전개되는 테러 상황과 맞붙기에는 너무도 오래된 질문이지만, <비상선언>에서 둘의 어울림은 그다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스트리밍과 아이폰 시대의 항공 재난물
항공기가 대한민국 영토 안에 있을 때, <비상선언>은 IT 강국의 리얼리티를 영화적 상상력과 사이좋게 조우시킨다. 옆자리 승객의 노트북에서 진석이 남긴 테러 영상을 발견하는 초반부 재혁의 모습은 이같은 컨셉을 예고하는 가이드로도 기능한다. 스마트폰이 현대 영화에서‘데우스 엑스 마키나(기계 장치의 신)’을 대신한 지는 꽤 되었다고 해도 <비상선언>이 실시간 뉴스를 비롯한 스트리밍 문화에 익숙한 시민의 모습을 활용한 장면들은 이른바 '한국적'인 것들, K-묘사를 겨냥한 의도가 느껴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공간적으로는 철저히 분리되어 있으나 정보의 측면에서는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재난-비재난 지대의 관계가 스케치될 땐 어쩔 수 없이 기이하기까지 하다. 스마트폰과 스트리밍, 그리고 뉴스 속보가 만들어내는 화합은 좁은 기내를 가장 빠르게 분열시키고, 나아가 화합을 도모하며, 반전까지 주도한다. <비상선언>의 결정적인 신파 장면 역시 스마트폰 없이는 완성되기 어려울 것이다. 지상에서도 이 현대 문물을 활용하지 않으면 섭섭한 법, 왠지 안드로이드파일 것 같은 송강호는 예상을 깨고 진석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제보자를 향해 회심의 한마디를 날린다. “안심하세요. 아이폰이라 녹음이 안됩니다!”
<비상선언>의 집요한 반복에 부쳐
<비상선언>은 후반부에 지지부진해지지만 유구한 3장 구조의 법칙을 깔끔히 무시했다는 점에서 그 인공적인 극한의 전개를 마냥 외면하고 싶지는 않게 만든다. 영화는 사실상 착륙의 실패(혹은 거부)라는 미션을 반복한다. 반복적인 플롯 구조를 끌고 가는 것은 의도적인 선택일 것이다. 미국과 일본을 지나 대한민국까지 시험의 무대가 될 동안, 반복과 연쇄가 극대화한 절망감, 그리고 피로도 역시 영화의 의도임을 인정하고 항복하는 관객과 몰아치는 음악 밖으로의 탈주를 꿈꿀 관객으로 나뉠 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미로 <비상선언>은 코리안 익스트림 시네마의 한 갈래이자 새로운 변용처럼 보인다. 재난의 지난함은 고집의 결과처럼 느껴지는 반면 사건이 모두 종결된 이후 영화가 에필로그를 꾸리는 방식은 확실한 패착임도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분량상 어울리지 않는 배역에도 초호화 캐스팅을 감행하는 담력의 소유자인 한재림 감독이 에필로그의 편집에 있어서까지 과단성을 유지하지 못한 것은 꽤 오래 의아함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