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예솔비 평론가의 ‘베르히만 아일랜드’, 떠남의 몸짓에 대하여
2022-08-17
글 : 김예솔비
제2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 당선자.

서서히 퇴적되는 사건들의 장력은 영화의 끝에 가서 하나의 얼굴로 도착한다. 가뿐함과 충만함을 동시에 가로지르는 크리스의 얼굴. 그 얼굴을 만들어낸 것들을 헤아려본다.

영화는 비행기를 타고 막 어딘가에 도착한 커플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비행기에서 내린 두 사람은 자동차에 짐을 실은 후 내비게이션을 켜고 목적지를 설정한다. 그러자 안내 음성이 나온다. “1시간48분 뒤에 도착합니다.” 목적지까지 걸리는 시간은 절묘하게도 영화 자체의 러닝타임과 조응한다. 안내 음성을 듣고 기대에 찬 얼굴로 웃는 두 사람의 모습 또한 영화의 시작을 마주한 관객의 입장과 묘하게 중첩된다. 여정이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가 출발한다.

우연일지도 모르는 이 사소한 시간 단위의 일치는 앞으로 전개될 ‘영화 속 영화’에 대한 희미한 예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기대감을 더욱 특수하게 만드는 것은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이 거장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성지’와도 같은 포뢰섬이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 커플로 등장하는 크리스(비키 크립스)와 토니(팀 로스)의 직업이 모두 영화감독이며 각자의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섬을 방문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영화로 진입하는 경로에는 더욱 복합적인 동기가 덧씌워진다. 이 오프닝은 <베르히만 아일랜드>라는 영화의 시작이면서, 여행지에 도착한 커플의 들뜬 마음을 실은 여정의 초입이며, 한 위대한 영화작가의 세계관 속으로 향하는 진입로인 셈이다. 이는 앞으로 전개될 여정이 영화의 안과 밖을 둘러싼 이야기의 중첩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을 얼마간 암시한다.

베리만이라는 유령

미아 한센뢰베의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제목이 주는 인상처럼 베리만을 노골적으로 탐구하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한 영화감독 커플을 중심으로 작업과 삶의 균형을 고민하는 크리스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두고 베리만의 <결혼의 풍경>과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처럼 부부가 팽팽하게 대치하는 풍경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들여다보면, 크리스와 토니는 미묘한 신경전만 벌일 뿐 처절하게 부딪히진 않는다. 베리만에 대해 탐문하지도 않고, 부부 사이의 갈등을 파고드는 것도 아니라면, 이 영화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무얼까.

예측들과 결별하는 데는 크리스라는 인물의 특별함이 있다. 그녀는 이탈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자리를 벗어나거나 남아 있으면서 주어진 경로와 조금씩 어긋난다. 토니의 영화 시사회에서 크리스는 강연이 길다는 이유로 자리를 뜨고,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자리에 되돌아가기도 한다. 이토록 박자가 남다른 이에게 창작이 고문인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포뢰섬처럼 모든 것이 완벽히 준비되어서 창작이라는 하나의 길만을 강요하는 듯한 환경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크리스는 자신의 시나리오를 확신하지 못한다. 어떤 불안이 그녀를 막아서고 있다. 크리스는 토니에게 베리만의 영화에 대한 복합적인 심정을 토로한다. 빛이 아닌 혹독한 어둠에 천착했던 베리만의 영화들은 그녀를 회복 불가능한 상처 속에 남겨두지만, 크리스는 베리만의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왜 상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가? 이 사랑의 이유를 찾는 것이 그녀의 영화를 가로막는 불안을 상대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러므로 영화상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베리만의 영화, <외침과 속삭임>의 장면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장면을 보자. 카린은 동생 마리아에게 심하게 군 뒤 괴로워하다가 마리아에게 사과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애틋하게 어루만진다. 이 장면은 사실상 <외침과 속삭임>에서 자매가 유일하게 화답하며 진심을 나누는 순간이다. 영화의 말미에 가면 자매의 관계는 다시 냉랭하게 돌아선다. 그러니까 인용된 장면은 크리스가 베리만의 영화에서 발견한 예외이자, 연장하고픈 찰나의 ‘빛’의 순간은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 크리스는 베리만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즉 <베르히만 아일랜드>에는 베리만을 ‘떠나는’ 몸짓이 있다. 크리스에게 그것은 베리만을 사랑하는 방식인 동시에, 영화 만들기의 몸짓이기도 하다.

픽션과 분리될 수 없는 몸

크리스가 토니에게 자신이 쓰는 대본의 내용을 들려준다. 그러자 ‘영화 속 영화’가 화면에 나타난다. 크리스가 만든 영화는 오래전 사귀었다가 재회한 에이미(미아 바시코프스카)와 조지프(앤더스 다니엘슨 라이)라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영화의 제목이 《The White Dress》인 이유는 에이미의 옷 때문이다. 에이미는 자신의 옷이 흰색인지 미색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크리스가 흰색과 미색의 차이처럼 미세한 틈 속에서 이야기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크리스는 빈약한 부피의 이야기에, 사이의 영역에 영화의 가능성을 투사한다.

크리스는 베리만의 어둠을 떠나 빛을 연장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그녀의 영화는 사실 순전히 빛에 관한 영화는 아니다. 조지프는 에이미를 밀어내고, 길항하는 관계의 고통으로 에이미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조지프가 섬을 떠난 뒤 에이미는 차오르는 슬픔 속에서 침대에 눕는다. 영화 속 영화는 여기서 잠시 중단된다. 크리스는 결말로 에이미의 자살을 생각해두었다고 말하지만, 확신은 없어 보인다. 이윽고 토니는 볼일을 보기 위해 섬 바깥으로 떠나고, 숙소에는 크리스 홀로 남겨진다. 토니가 섬 바깥으로 나간 ‘사흘’간은, 크리스의 영화가 한정하고 있는 시간의 양이기도 하다. 우연일까? 사소한 단위의 일치 속에서 다시 한번 기묘한 중첩이 일어난다. 크리스가 남겨둔 영화의 결말과 크리스의 현실이 뒤섞인다. 이제 에이미가 누워 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사람은 크리스다. 크리스는 에이미가 입고 있던 옷을 입고, 에이미가 가려고 했던 행선지를 찾는다. 미아 한센뢰베는 크리스와 에이미를 중첩시키고, 페르소나의 겹침 속에서 크리스가 자신의 몸을 통해 직접 영화의 엔딩을 완성하도록 한다.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크리스가 만든 영화의 결말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는다. 영화는 다시 한번 시공간을 비틀어 픽션 너머로 도약하며 우회적으로 결말을 암시한다. 크리스가 있던 곳은 크리스가 자신의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미래 시점의 포뢰섬이 되고, 각자의 세계에 속해 있던 에이미와 조지프, 크리스가 배우와 감독 사이로 만난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크리스의 반응이다. 조지프가 숙소를 나서면서 “작별 인사도 안 해요?”라고 묻자 크리스는 답한다. “몸이 안 움직여요.” 크리스의 몸은 마치 픽션과 분리될 수 없다는 듯 고정되어 있다. 그녀의 몸은 삶과 영화가 교차하는 장소다. 그녀는 자신의 몸짓으로 영화의 엔딩을 구현할 것이다. 베리만의 무의식인 어둠을 좇지도, 억지로 빛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빛과 어둠 사이의 틈새에서 영화의 가능성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베르히만 아일랜드>의 마지막 얼굴, 크리스의 얼굴에 깃든 가벼움은 그 모든 떠남의 질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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