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비상선언'의 매력적인 빌런 배우 임시완을 말하다
2022-08-18
글 : 김소미
정리 : 윤현영 (자유기고가)
사진 : 손익청 (스틸 작가)
내가 바라는 나의 진심이 닿기를

발산형과 수렴형. 배우를 두 부류로 나눈다면, 임시완은 후자다. 비범함과 평범함을 오가는 <미생>의 장그래, 아름다우면서 퇴폐적인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의 조현수, 독기와 웃음기를 동시에 품은 <트레이서>의 황동주처럼 그에겐 경계 지대의 인물들이 잘 어울린다. 이중성은 배우에게 너무도 뛰어난 매력인 나머지 과시되기 십상이지만, 임시완은 자기 무기를 휘두르는 대신 속 안에 침착하게 품는다. 그의 연기는 언뜻 연약해 더 주의를 기울이게 만들고, 지켜본 결과 그 기세가 집요하고 질기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완급 조절이나 힘 빼기 같은 기술적 표현으로는 배우 임시완을 근사치에 가깝게 서술하기 힘들다. 그는 오히려 깐깐하리만치 캐릭터의 당위와 진심을 파고들어 배우인 자신으로 하여금 인물을 완전히 믿도록 설득하고, 이 작업에 성공한 것 같으면 의도적인 방심의 단계로 나아간다. 그가 인터뷰에서도 밝혔듯, 어떤 순간에 ‘무언가 애써 더 하려 하지 말자’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배역에 깊이 몰입한 배우만이 스스로에게 걸 수 있는 최면이자 일종의 겸손한 자기 검열이다.

8월3일 개봉한 여름 텐트폴 영화 <비상선언>에서 그는 블록버스터의 유일한 빌런을, 테러리즘 영화의 테러범을 연기한다. 악인의 위용은 대체로 과장과 전시, 압도감을 부르는 무서운 디테일들로 완성되지만 <비상선언>의 단독자 류진석은 말끔하다 못해 한없이 말갛다. 임시완은 밤사이 악인이 살아온 생의 궤적을 홀로 역추적하며 마음의 지도를 꼼꼼히 그리다가 아침이 되어 카메라 앞에 서면 전부 다 잊은 듯 행동했다. 이유 없는 재난처럼, 우연히 생겨버린 돌연변이처럼 두눈을 끔뻑였다.동의하고 긍정할 수만은 없는 악인을 연기해야 할 때 배우는 어떤 포즈로 그 시간을 살아낼까. 임시완은 <비상선언>의 류진석 같은 사람에게 접속할 때도 ‘나를 속이지 말아야지’ 다짐할 수 있었을까. <변호인> 이후 벌써 스크린 데뷔 10년차를 맞이한 배우는 이 투박한 호기심을 더 정교한 갈래로 쪼개주었다. 선역과 악역, 긍정할 수 있는 인물과 그렇지 못한 인물. 임시완은 이렇게 두개로 나누기보다 세개로 구분하는 게 더 좋겠다고 했다. 당위성이 명확하게 제시된 캐릭터, 애초에 당위성이 아예 없는 캐릭터, 그리고 당위성이 만들어져 있지만 배우 자신에겐 와닿지 않는 캐릭터. 가장 난감한 것은 마지막 세 번째일 테다. “공감되지 않는데 공감되는 척을 해야 하는 건 괴로워요. 주관적으로 생각하기에 서사가 튼튼하지 않은 거니까요.” 다행스럽게도 <비상선언>의 인물은 그에게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한다. “저 자신만큼은 납득할 수 있도록, 스스로 말이 되게 진짜를 만들어내면 돼요. 그건 저한테 꽤 당연하고 매끄러운 일이에요.”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재림 감독은 카메라가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리허설하던 임시완의 모습을 영화에 넣었다. 임시완이 본 촬영을 기다리며 모든 긴장과 에너지를 몸 한편에 수렴해둔 때였다. 당시를 회상하던 그는 어느새 흡족한 얼굴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 장면에 대해 ‘눈이 돌아버렸다’는 반응이 있던데, 큰 칭찬을 들은 기분이에요.”

임시완의 테러범

“무섭다는 말을 들으면 칭찬을 들은 것처럼 기쁘다. 악역의 숙명을 느끼고 있다. (웃음) 한재림 감독님은 대본에서 연상할 수 있는 류진석의 이미지와 임시완이라는 배우 사이에 놓인 약간의 거리감, 혹은 이질감이 관객의 불쾌감을 더 증폭시킬 거라고 판단하신 것 같다. 나 역시 연기에서 그런 맥락을 좀더 잘 살려보고 싶었다.”

악역의 묘미

“배우에게 악역은 축복이다. 선역은 오히려 관객의 기대를 위해 지켜야 하는 프레임이 명확하지만, 악역은 경계 지대에 있는 인물들이라 연기할 때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비상선언>에서 류진석 역을 맡아 연기 측면에서 여러 시도를 해볼 수 있어 나름의 해방감을 느꼈다. 이 인물의 서사가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도 좋았다. 공백을 자유롭게 채울 수 있으니까. 류진석이 살아온 궤적을 궁리해보기도 했다. 인물을 관객에게 납득시키기 위함은 결코 아니었고, 혼자서만이라도 어떤 당위를 품고 있으면 연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 남자의 심리

“류진석의 과거를 역순으로 되짚어가면서 피해 의식의 근원을 찾아보고 싶었다. 좀처럼 이유를 찾을 수 없는 테러 사건들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다.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등 증오심과 함께 혼자만의 생각에 깊이 빠지게 되는 계기가 있었겠다는 상상에서부터 디테일들을 쌓아나갔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보다 미개한 족속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괴롭히는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죄책감을 못 느끼는 것이라고 왜곡된 결론에 심취했을 것 같기도 하다. 그게 류진석이란 사람에게 안도감을 줬을 수도 있다. 그러다 이 생각의 덩어리가 나쁜 방향으로 점점 증폭되어,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와 가치 자체가 없다고 믿게 된 것은 아닐까. 혐오 정서가 짙은 유튜브 콘텐츠 등이 이를 부추겼을 수도 있다. 이런 디테일들을 굳이 상상한 것은 류진석의 행동에 일관성을 부여해야 했기 때문이다.”

빼기의 기술

“<비상선언>에서 류진석을 연기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딱히 뭔가 더 하지는 말자’라는 거였다. 한재림 감독님도 내가 최대한 덜어낸 연기를 했을 때 만족스러워하셨다. 알려진 대로, 재혁(이병헌)의 딸 수민(김보민)을 기내 화장실 앞에서 마주친 진석이 아이에게 말을 거는 신은 실제 촬영분이 아니라 리허설 컷이다. 리허설 때는 긴장도가 덜하기도 하고, 체력을 비축해야 하니까 좀더 힘을 빼고 담백하게 하게 되는데 감독님은 그 모습이 오히려 류진석과 가장 가깝다고 본 것이다.”

어쩌다 물음표 살인마

“이병헌 선배님, 송강호 선배님, 전도연 선배님을 비롯해 <비상선언>에 모인 많은 배우들은 평소 좋아하고 동경했던 분들이다. 어떤 의미로는 각각 연기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라는 나만의 환상도 있다. 그러다보니 특히 기내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이병헌 선배님께 그동안 쌓아둔 궁금증들이 쏟아져 나온 것 같다. 평소에 어떤 취미 생활을 하는지,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가는지, 쉴 때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등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 궁금했고 그게 자연스럽게 질문들로 표출됐다. (웃음) 지난번 이병헌 선배님의 인터뷰(<씨네21> 1367호, “임시완 배우는 정말 독특했다. 캐릭터 연구를 위해 나를 묘하게 관찰하는 느낌도 있고 손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심오한 질문을 던져 나를 종종 곤경에 빠트리기도 하는 후배다”)를 읽고 나의 일방적인 애정 표현에 대해 크게 반성했다. 이 기회를 빌려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한다. (웃음) 미리 인지했다면 자제를 좀 했을 텐데….”

<런 온>과 육상선수 기선겸

“그동안은 같은 시기에 작품이 겹치지 않도록 철저하게 노력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비상선언>과 드라마 <런 온>을 비슷한 시기에 작업했다. 배우도 사람인지라 동시에 두 인물을 오가게 되면 생각이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비상선언>과 <런 온>의 세계가 섞일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두 세계를 따로 멀리 떼어놓으려는 노력이 중요하겠다 싶어 물리적인 거리감을 유지하려 했다. 테러범 류진석을 연기할 땐 <비상선언> 촬영장 근처에 숙소를 잡아서 그곳에서만 머물고, 육상선수 기선겸으로 존재할 땐 <런 온> 촬영장 근처에 숙소를 잡아서 그 근방에만 있었다. 집을 떠나서 생활하는 것에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성향이 도움이 됐다.”

진짜를 고민하다

“배우로 데뷔할 때부터 지금까지 늘 ‘나를 속이지 말아야지’ 하고 변함없이 생각한다. 자잘한 변주를 줄 순 있어도 어찌 됐건 진짜를 표현하고 있는지가 내겐 중요하다. 최근 몇년 사이 약간의 변화가 있다면, 진심을 대하는 내 방식이 유연해진 것이다. 어떻게든 진심으로만 다가가고 표현하자는 게 초심자로서의 첫 번째 사명이었다면, 지금은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내 진심이 관객에게 유효하게 다가가고 있는지 표현의 방법을 고려한다. 가령 배우가 자신의 진심에 몰두하면 관객도 이를 매우 진지하게 지켜보게 된다. 비슷한 감정의 파장이 공유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때는 진지함만이 능사가 아닐 수 있다. 불필요한 비장함을 덜어내고 위트를 가미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요즘엔 그런 고민을 한다. 대화의 기술과도 비슷할 수 있겠다.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분위기를 풀어주는 게 중요한 것처럼, 연기에도 밸런스가 필요하다.”

여행이 좋아!

“어떤 분들에게는 이동이 많은 촬영이 큰 스트레스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해외 촬영을 늘 바라는 쪽이다. 지방 촬영도 언제든 환영이다. 역마살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웃음) 그래서인지 지난 2~3년간 코로나19로 인해 바깥 출입이 어려워지면서 전에 없던 약간의 감정적 침체기도 겪었다. 밖을 돌아다니지 못하니 이 기회에 작품 활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좀 해소가 되더라. (갑자기 얼굴에 환하게 빛이 나며) 이번에 드라마 <트레이서>를 마무리한 후 비로소 미국 여행을 다녀왔다.”

<변호인> 이후 10년

“올해가 스크린 데뷔 10년차라니 기분이 이상하다. 앞으로 또 어떤 작품을 하게 될까, 끊임없이 고민한다. 무언가 고민할 때 한번도 명쾌한 답을 내린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을 포기하지 않아야 확률적으로 후회 없는 선택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배우로서 소비되는 것, 채우고 생산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추고 싶다. 작품을 많이 하면 어쩔 수 없이 소비되는 측면이 있다. 건강하게 오래 작업하려면 작품 활동을 하지 않을 때 개인적인 장치들을 마련해놓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은 운동부터 시작했다. 틈틈이 관리도 받고 영어 공부도 한다. 다행스러운 점은 내가 가장 재밌어하는 활동이 여전히 연기라는 사실이다. 확실히 다른 일을 할 땐 능률과 체력이 떨어진다. (웃음) 연기 다음으로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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