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한 마지막 통신이 꺼지고 착륙을 포기한 KL501은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간다. 승객들은 휴대폰을 통해 각자의 가족과 마지막 통화까지 마친 상태다. 카메라는 전투기의 호위를 받는 비행기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실루엣을 뒤에서 잡아준다. 마치 악당을 물리친 후 석양 저편으로 사라져주는 카우보이처럼. <비상선언>에서 섬뜩함을 느낀 순간은 생화학 테러를 벌인 류진석(임시완)의 광기 어린 표정을 마주했을 때가 아니다. 석양 저편으로 깔끔하게 퇴장하려는 비행기의 실루엣을 보는 순간 불쾌한 소름이 돋았다. 바이러스 치료제가 불투명한 상황 탓에 한국에서마저 착륙을 거부당한 승객들은 자발적으로 하늘에 머물기로 한다. 목적지를 잃은 저 비행기는 어디를 향해 날아가는 걸까.
<비상선언>, 위험하기보다는 게으른
달리 질문하면 조종간을 잡은 박재혁(이병헌)은 비행기를 어디에 추락시킬 생각이었던 걸까. 바이러스가 가득하니 어느 산간 지방에 내리는 것도 나쁜 선택이었을 것이다. 짐작해볼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은 바다에 추락하는 건데, 사실 알 길이 없다. 어쩌면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 애초에 고민 따윈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바이러스 치료제는 입증되고 불안에 떨던 지상의 사람들도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여 비행기는 무사히 땅에 내려앉는다. 처음부터 이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던 영화가 필요로 했던 건 비장하고 낭만적인 한컷의 이미지였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 이 장면은 <비상선언>이 가지고 있는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KL501은 자발적인 희생이라는 손쉬운 카드로 지상에 남아 있는 이들의 죄책감까지 함께 안고 사라지려 한다. 이 깔끔하고 편리한 제거가 <비상선언>의 후반부를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적인 이유다.
<비상선언>은 구김살이 없다. 정확히는 뒤로 갈수록 다리미로 주름살을 펴듯 쭉쭉 상황을 해결해버린다. 항공 테러라는 재난을 소재로 한 영화에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꽤 잘 만든 이 영화가 후반부 거의 추락에 가깝게 급전직하하는 건 산적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게으른 방식 때문이다. 미국에서 쫓겨나고 일본에서 전투기의 공격까지 당한 KL501은 간신히 확보한 바이러스 치료제가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국에서마저 반대 여론에 부딪힌다. 이 영화의 구멍이자 스스로 판 함정 중 하나인 만능기계 핸드폰 때문에 이 소식은 승객들에게 빠르게 전해지고 이내 패닉에 빠진다. 그 순간 재혁의 딸 수민(김보민)이 말한다. “아빠, 우리 그냥 내리지 마요.” <비상선언>에 불쾌감을 드러낸 이들의 다수가 이 문제적 대사의 위험성을 꼽았다. 어린아이의 입을 빌려 단체로 자기희생을 강요하는 이 순간은 일견 당황스럽다. 영화 유튜버 라이너의 지적처럼 일각에서는 이러한 태도가 반인륜적인 집단주의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일리 있는 해석이지만 나는 이 영화가 위험하다기보다는 차라리 게으른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지상에 있는 친구와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싫다며 착륙을 포기하는 승객들의 선택을 보며 섬뜩하다기보다는 실소가 나왔다. 수민의 대사를 듣는 순간 영화 시작부터 줄기차게 수민에게 양보와 포기를 시킨 이유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듯한 소녀는 시종일관 다혈질 아버지를 말리고 갈등을 회피한다. 다투느니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겠다는 수민의 일관된 행동은 이 한순간의 대사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한 복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재림 감독이 캐릭터를 쌓고 드라마를 채우는 방식은 대체로 이렇게 직관적이고 일차원적이다. 문제는 수민을 트리거로 삼은 나머지 승객들의 선택마저 여기에 적당히 편승하여 생략해버린다는 점이다. 비행기 내에서 생존을 위해 내내 이기적으로 굴던 남자 승객은 어떻게 이 선택에 동의한 걸까. 짧은 시간 내에 100명이 넘는 승객들의 만장일치 동의를 어떻게 받아낸 걸까. 관제탑에 착륙 포기 연락을 하는 재혁은 이들 모두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가. 영화는 이 긴 협의 과정과 존재했어야 마땅한 갈등, 무수한 주름과 다른 목소리들을 간단히 생략해버린다.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는 KL501은 서부극의 카우보이처럼 남겨진 자의 죄책감과 부조리를 모두 떠안고 말끔하게 퇴장하려 한다. 더럽고 복잡한 것들을 한몸에 담은 카우보이는 기꺼이 지워지는 쪽을 택하고 영화 속 세계는 깔끔하고 완벽하게 봉합된다. 현실과 유리된 판타지가 대체로 그러하다.
<비상선언>은 재난을 들여다보는 영화가 아니라 그때 보지 못했던 것들을 낙관적으로 해결해버리는 판타지에 가깝다. “공무원은 책임지라고 있는 겁니다”처럼 재난 현장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경찰 구인호(송강호)와 국토부 장관 김숙희(전도연)의 입을 빌려 대신 한다. 그 대가로 진짜 땅에 발붙이고 있어야 할 디테일의 고리를 생략한 채 재난 한가운데에서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낭만의 공간을 부유한다. 실화나 역사를 바탕으로 하거나 현실의 집단경험을 모티브로 한 환상은 대체로 위험하다. 의도와 관계없이 영화의 강력한 힘으로 은연중 현실 속에 스며들어 현실을 대체하는 무언가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낙관적인 판타지가 그다지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비상선언>은 위험한 영역까지 다다르지도 못한다. 일본 자위대가 비상선언을 무시한 채 기관포 경고사격을 하는 장면이나 그토록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한 차례 끊김없이 실시간 소통을 이뤄내는 놀라운 성능의 와이파이 등 ‘이게 말이 되냐’고 딴지를 걸고 넘어질 요소들은 잔뜩 있지만 그런 자잘한 단점들은 이 흥미진진한 상황으로 몰입하는 데 그다지 방해되지 않는다.
잘못 쓴 게 아니다. <비상선언>은 재난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구성하는 데 몰두한다. 전반부는 참신하다. 협상의 대상일 줄 알았던 테러리스트가 먼저 죽어버리는 난감한 상황으로 모두를 혼란으로 몰고 간다. 중반까지도 준수하다. 기장의 사망으로 추락하는 비행기를 다시 궤도에 올려두는 과정에서의 스펙터클이나 비행기가 노을을 받으며 미국에서 회항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인상적인 볼거리를 안긴다. 그런데 (약간의 과장을 보태) 여기까지만 생각했나 싶을 정도로 결말과 수습 과정이 일차원적이다. 기승전결로 따지자면 발단과 전개는 매우 긴데 위기에서 일어날 법한 갈등과 주름이 편의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정확히는 이 영화의 위기는 시간제한이 있는 바이러스의 공포보다 비행 액션쪽에 무게가 쏠려 있다. 그리하여 폐쇄 공간에서 발생 가능한 갈등과 해결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진짜 위기가 닥쳤을 때, 아니 닥쳐야 할 때 불편한 것들을 얼른 지운 뒤 급하게 (자기희생이란 이름의) 만능키를 꽂는다. 뒤돌아보면 <관상>(2013), <더 킹>(2016) 모두 대체로 착실한 전개에 비해 결론을 서두르는 인상이었다. 그렇게 서사적으로 충분히 담금질되지 않은 만능키는 쉽게 바스러지고 오히려 불쾌하고 찜찜한 흔적들을 남긴다.
<헌트>, 서사의 구멍을 덮는 위태로운 당위
진짜 위험한 쪽은 <헌트>다. <헌트>가 첩보 액션물로서 준수하게 잘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어쩌면 매끈하게 잘 다듬어졌기에 이 영화가 전제로 한 판타지가 위험해 보이는 쪽에 가깝다. 김수민 정치평론가가 언급했듯(<씨네21> 1368호, ‘<헌트>와 1980년대 군부독재 시대’) <헌트>는 <남산의 부장들>(2019)보다는 <26년>(2012)에 가까운 영화다. 시작할 때부터 적극적인 각색이 이뤄졌음을 명시하고 이것이 픽션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코끼리를 말하지 말라고 하는 순간부터 코끼리가 뇌리에 박히는 것처럼, <헌트>를 한국 근현대사와 나란히 놓지 않고 보기란 불가능하다. <헌트>는 작품 내적 서사로 상황과 개연성을 충분히 납득시키는 영화가 아니다. 북파 고정간첩과 남측의 의로운 군인이 동시에 대통령 암살을 노린다는 이 사연 많은 상상이 버틸 수 있는 건 우리가 크고 작은 이야기들로 학습해온 역사적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헌트>의 해외 평이 상대적으로 박한 건 당연한 일이다. 이 영화는 서사적 근거와 캐릭터의 리얼리티의 상당 부분을 영화 바깥에 걸쳐놓고, 확보된 시간 대부분을 속도감 있는 액션으로 내달린다.
<헌트>는 기술적으로 능숙하다. 서사적인 완급 조절 없이 강한 자극으로 내달리는 영화인데도 그 속도와 몰입감이 그다지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은 칭찬할 만하다. 워싱턴, 도쿄, 한국, 태국으로 이어지는 액션은 좁은 공간의 추격전, 시가전, 소규모 폭발과 육탄전, 그리고 대규모 폭파 장면까지 다채로운 구성을 자랑한다. 관객이 금세 질리지 않고 즐길 수 있도록 코스를 고심한, 액션의 만찬이라 해도 좋겠다. 하지만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가 윗선의 지령을 받아 속된 말로 ‘서로의 빤스를 벗기기 위해’ 상대 진영을 탐문하고 공격하는 경로에는 언뜻 납득하기 힘든 구멍들이 무수히 뚫려 있다. <헌트>는 액션의 속도와 긴박함으로 구멍에 빠지지 않고 내달려가는 방식을 택한다. 그리고 대체로 실패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고정간첩 ‘동림’을 찾기 위해 안기부 내 두명의 이인자가 서로를 견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를 의심하고 집착하는 동기 같은 건 딱히 주어지지 않는다. 윗선의 명령이기에 수행한다고 보기엔 두 남자의 전사(前史)를 너무 가볍게 훑고 지나가버리는 탓도 있다. 인물들은 대체로 동기가 부족하고 그걸 해결하는 방식도 비슷한데, 1팀 에이스 방주경(전혜진)은 왜 박평호의 집에 찾아가서 굳이 자신의 추리를 밝히는지, 2팀 요원 장철성(허성태)이 동림으로 처리되는 게 가능한지도 알 길이 없다.
결정적으로 김정도가 박평호의 정체를 안 뒤에 그를 살려두고 대통령 암살에 동참시키는 심리적 동기가 모호하다. 북측 작전의 전모를 모른다는 걸 감안해도 박평호가 없다고 해서 수행될 수 없는 작전도 아니다. 이유는 짐작 가능하다. 이정재와 정우성이기 때문이다. 김정도와 박평호는 서로의 존재에 집착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헌트>는 흑과 백이 위치를 바꾸고, 적의 적이 아군이 되는 이야기다. 그 대척점에 두 사람이 있어야 한다. 관객도 이정재, 정우성의 관계성을 통해 박평호와 김정도의 모호한 지점들을 받아들이는 부분이 적지 않다. 앞서 액션을 통해 구멍을 메우는 데 실패한다고 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 관객에게 이 영화의 서사적 구멍은 대부분 메워진다. 다만 그걸 메우는 방식이 서사 내부의 설득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깥의 정보들로부터 비롯된다는 게 특이점이다.
이정재, 정우성이라는 두 배우의 존재감과 더불어 박평호, 김정도의 대의 역시 한국사적 관점에서 용인된다. 북파 간첩 동림의 대의는 전면전을 막고 통일하는 것이다. 그에게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대의는 당의 명령을 앞선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당을 배신하고 전면전을 막기 위해 대통령을 살리는 쪽을 택한다. 김정도의 대의는 국민을 학살하고 권력에 오른 부정한 권력자를 처단하는 것이다. 5·18 민주화운동의 끔찍한 현장을 몸소 경험한 그는 국민을 유린한 권력의 폭력을 멈추고자 한다. 문제는 이를 위해 두 사람이 택한 방식이 모두 폭력과 살인이라는 점이다. 대의명분을 위해,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건 북과 남의 최고 권력자나 그 밑에서 불의에 분노하고 회한에 사로잡힌 두 남자 모두 마찬가지다. 박평호는 자신의 정체를 알아버린 방주경을 간단히 살해하고, 김정도는 대통령에게 송곳니를 들이밀 위치까지 가기 위해 숱한 고문을 자행한다. 그럼에도 이들의 행동이 불편하게 다가오지 않는 건 우리가 이미 이들의 대의명분이 정의가 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의 부당함은 반드시 부정되어야 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갈 전쟁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대의. 더 큰 폭력과 희생을 막기 위한 폭력은 박평호와 김정도의 활약을 거쳐 손쉽게 용인되는 것이다. <헌트>는 회색지대에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발버둥치는 두 남자의 모순과 인간적 고뇌 같은 건 돌아보지 않는다. 있다 해도 스쳐 지나가고, 충분한 설득의 알리바이를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오늘의 한국 관객에게 있어 제시되는 것만으로도 납득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헌트>는 가상의 평행 세계를 무대로 그려낸 판타지에 가깝다. 전두환 암살이라는 정의를 목격하고 싶은 관객의 은밀한 욕망을 자극하는 환상.
하지만 의도와 달리 이 정의로워 보이는 환상은 또 다른 부작용을 가져온다. 박평호와 김정도의 폭력을 정당화 시키려다보니 거꾸로 당시 상황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예컨대 워싱턴에서 총격전이 일어나고, 일본 한복판에서 시가전이 일어났다면 그건 준 전시상황에 가까운 것 아닌가. 실제로 존재했던 동림, 남측에서 버젓이 활동하는 북파 간첩들의 활약 등은 거꾸로 계엄령에 가까운 군부의 철권 통치에 명분을 부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기부를 비롯한 첩보기관들이 단지 권력에 충성하는 개가 아니라 실재하는 위협에 대처하는 합당한 정부 기관처럼 보이는 것이다. 전두환 암살을 꿈꾸는 군인들은 어떤가. 그들 역시 혁명이라는 이름의 권력찬탈을 꿈꾸는 세력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정의로운 군인에 대한 환상을 제공한다. 김정도의 실패한 저항이 당시 군부 세력의 부당함과 침묵했던 다수를 죄의식으로부터 해방 시켜준다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헌트>가 제거해버린 것은 무엇인가. 가해자들의 서사인 <헌트>에는 무고한 희생자가 보이지 않는다. 오락을 위한 취사선택의 결과 영화는 피해자의 시간을 제거한다. 잔혹한 고문장면이 집요하게 반복되지 않냐고 반문한다면 이는 의도와 달리 소비적인 전시에 그친다고 답하겠다. 진짜 북파간첩이었던 유정(고윤정)의 존재로 인해 다른 이들의 무고함마저 모두 의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무고한 시민'이란 영화 속 그들의 입과 현실 속 우리의 경험 속에서만 존재하고, 영화는 필요할때만 그걸 편하게 꺼내어 쓴다. 만약 당신에게 그 시절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적어도 각종 미디어를 통한) 축적된 경험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헌트>가 재현한 1980년대는 알고보니 사방이 간첩이고 북의 직접적인 침략 위험에 시달리는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그 시절 전두환 정권이 그렇게 국민들에게 심으려 했던 공포는 역설적으로 그를 제거해야 마땅할 악으로 규정한 영화를 통해 마치 사실인양 생생하게 구현된다. 물론 이건 가상이고 가짜이며 영화다. 하지만 <헌트>를 그저 상상력을 동원한 오락영화로 치부하기엔 우리는 이 역사적 진실에 너무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 정의에는 의심과 회의, 주름이 필요하다. 정의가 확신으로 자리 잡는 순간 위험한 폭탄으로 변모한다. 박평호, 김정도가 택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이 멋들어져 보이는 걸 넘어 정당하게 느껴질 때 <헌트>는 의도와 무관하게 역사의 얼룩을 살균하고 표백해 버린다.
한국영화가 빠진 편의주의의 함정
닮은 듯 전혀 다른 두 영화의 엔딩은 지금 한국영화의 나쁜 습관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비상선언>은 비행기가 착륙한 뒤 한참이 지난 시점의 생존자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하얀 의상을 입고 파티를 벌이고 있는데,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마치 천국에 온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 박재혁이 구인호에게 다가가 오랜 친구처럼 인사하는 장면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극중 두 사람의 소통은 아예 없다. 나중에 착륙한 뒤에 구인호의 활약과 희생을 전해 들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구태여 두 사람을 한컷에 잡고 마주 보게 하는 건 그들이 박재혁과 구인호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병헌과 송강호이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한국영화가 배우들이 가진 아우라와 배경에 기대어 장면을 맡겨버린다. 영화 내부에서 해결해야 할 설명과 과제를 미처 다 소화하지 못하고 바깥(현실)에 손을 벌려 간단하게 처리해버리는 것이다. 손쉽고 강력한 방식이지만 익숙해질수록 이야기는 게을러진다.
심지어 <비상선언>의 엔딩은 어설픈 잔머리를 굴린다. 진짜인지 천국의 환상인지 구분하기 힘든 이 후일담은 비행기가 공항에 완전히 착륙한 마지막 장면 바로 앞에 배치되어 있다. 미리 보는 미래라고 해야 할까. 이러한 편집은 관객에게 다양한 해석과 상상을 강요한다. 어쩌면 승객들이 집단 자기희생을 결정하고 화면이 잠깐 암전된 후 이들은 모두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펼쳐지는 낙관적인 해피 엔딩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투영된 환상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노골적으로 열어둔, 의도된 모호함. 하지만 관객에게 해석을 요구하는 듯한 이 결말은 그저 생뚱맞다. 전체의 흐름 속에서 필연적으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적당히 멋진 뉘앙스로 설치한 함정은 너무 얕고 조악해서 빠지고 싶어도 빠지기 힘들다.
<헌트>의 엔딩도 유사하다. 지인의 딸이라 믿고 보리암으로 피신시킨 유정(고윤정)도 실은 자신을 감시하는 북측 간첩이었다는 진실이 드러나고, 평호는 끝내 제거된다. 평호는 유정에게 말한다. “너는 다르게 살 수 있어.” 이정재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가 끝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앞서 유정은 자신을 도와주는 평호에게 일침을 놓는다.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멍청해. 난 아저씨처럼 살지 않을 거야.” 대의를 내세우지만 박평호와 김정도 모두 낡은 가치에 얽매인 이전 세대다. 이미 폭력의 원죄를 뒤집어쓴 이들은 탈출할 수 없지만 다음 세대에 더 나아질 수 있지 않냐는 막연한 희망을 전한다. <헌트>의 위험한 요소를 불식시키는, 납득되는 메시지지만 문제는 이 엔딩이 마치 사족처럼 붙어 있다는 점이다. 내내 그렇게 살아오던 남자들의 (멋진) 활약상을 전시하다가 마지막에 말을 한줄 보탠다고 의미가 달라질 순 없다. 오히려 착실히 쌓아둔 오락적인 즐거움마저 빛바래게 하는, 불필요한 변명에 그칠 뿐이다. 한국영화가 ‘대충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는’ 편의주의의 함정에 빠진 게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가늠이 안되지만 그 부작용은 날이 갈수록 확연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