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박정원 평론가의 '카우'
2022-08-31
글 : 박정원 (영화평론가)
젖소 루마의 일상과 비인간적 인간의 시스템

내레이션이나 인터뷰를 더하지 않은 이 영화의 선택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졌다.

안드리아 아놀드의 <카우>는 출생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난다. 영화의 주인공은 낙농장의 젖소 루마이고, 루마를 포함한 모든 동물의 삶 자체가 출생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기에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구성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루마의 정체성은 동물이라기보단 가축에 가깝다. 그렇기에 오프닝 시퀀스의 극적인 출산 장면이나 엔딩의 충격적인 죽음 장면보단 오히려 그 사이에 놓여 있는 가축으로서의 범상하고 반복적인 일상이 이 영화의 성격을 더 잘 설명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농장에서 길러지는 가축에게 자유나 애정은 응당 주어지지 않는다. 숨 막히는 현실과 비극적 운명을 답답해하며 불현듯 이동과 여행, 탈출과 이별을 감행했던 아놀드의 극영화 속 ‘인물’들과 달리, 그의 첫 다큐멘터리 <카우>의 ‘젖소’ 루마는 어딘가로 떠나지 못한 채 농장의 일부로 살아가야만 한다. 영화는 그러한 처지에 놓인 루마의 눈높이에 위치한 클로즈업 촬영을 통해 루마와 루마를 둘러싼 세상을 포착한다.

가축이 아닌, 동물로서의 소의 생명력

루마의 시점에서 그의 일상을 좇는 카메라는 인간에겐 무관심한 듯 보인다. 익히 알려졌듯 <카우>에는 인간에게서 비롯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나 인터뷰가 삽입되지 않는다. 이따금 흘러나오는 라디오 속 노래나 농부들이 주고받는 짧은 대화를 제외하곤 이 영화에서 인간의 언어를 찾아보긴 어렵다. 그조차도 대부분 프레임 밖에서 들려오는 사운드이기에 영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이는 더욱 낯설게 다가온다. 한편 인간의 이익을 위해 길러지는 가축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악랄한 착취자로 묘사될 법한 농부들은 악역이라기보단 루마와 마찬가지로 농장의 일부라는 인상을 남길 뿐이다. 요컨대 <카우>와 루마의 세계를 은밀하고도 강력하게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라기보단 인간의 시스템이다. 암소로 태어나 젖소로 살아가며 임신과 출산, 착유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루마의 삶을 운용하는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그래서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인 농장 산업 시스템.

<카우>가 담아내는 농장 산업 시스템의 리얼리티는 클로즈업된 젖소 루마의 얼굴과 몸에 있다. 무언가를 바라보는 검은 눈에,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코에, 갓 낳은 새끼를 빼앗긴 뒤 울음을 내뱉는 입에, 느릿한 걸음걸이에 있다. 출산 이후 우유를 생산할 수 있게 된 루마의 몸에 달라붙은 착유 기계는 인간이 고안해낸 시스템의 비인간성을 표상한다. 태어남과 동시에 어미와 이별한 송아지는 어미의 젖을 결코 먹을 수 없다는 아이러니가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이같은 시스템의 작동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카메라는 영화 내내 근거리에서 루마를 포착하는데, 이따금 루마에게서 슬며시 시선을 돌려 농장 내 다른 암소들을 비출 때면 이곳에 무수한 루마들이 존재한다는 분명한 사실에 그 무력감이 강화된다.

4년이 넘는 촬영 기간을 통해 만들어졌지만 영화는 구체적인 날짜나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엔 다소 무관심하다. 아니 어쩌면 영화적 시간은 흘러가지 않고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스템 안에서 기계적으로 출산과 착유를 반복하는 루마의 육체만이 미세한 변화를 통해 점차 시들어갈 뿐이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는 이따금 농장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를 배경음악으로 활용하는데 사랑과 그리움, 슬픔과 욕망 같은 감정을 노래하는 인간의 선율이 루마가 처한 상황과 절묘하게 겹치곤 한다. 그렇게 인간의 유행가를 배경 삼아 반복되는 착취와 피로의 일상은 자연스레 일련의 리듬을 구축한다. 루마가 내뿜는 거친 숨소리와 울음소리 또한 어느새 그 리듬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그 착취와 피로의 리듬으로부터 잠시 벗어난 순간 등장한다.

영화의 중반부, 잠시 농장을 떠난 루마와 소들은 목초지를 자유로이 뛰어다니며 풀을 뜯어먹는다. 그들은 각자 하늘을 바라보고, 햇볕을 쬐고, 바람을 느끼고, 풀 위에 눕는다. 영화 속 소의 귀에는 대부분 가축으로서의 상징인 노란색 라벨이 붙어 있고 이 장면에서도 예외는 아니지만, 어쩐지 이 순간만큼은 그들은 가축보단 각각의 생명체로서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 그래서 이 장면이 주는 예기치 못한 감동과 여운을 잊기 힘들다. 농장 산업 시스템 내 루마의 존재 가치와는 전혀 상관없는, 지극히 비생산적인 시간을 담아낸 일련의 장면을 통해 영화는 살과 뼈와 젖과 같은 인간이 일방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을 배제하고도 루마가, 소가, 동물이 지닌 생명력을 보여준다. 자연의 일부로서의 반응과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평화로움을 깨트리는 것은 당연히도 인간이다. 인간의 목소리가 불시에 틈입하면, 소들은 다시금 농장의 가축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관객에게 남겨진 질문

서두에서 언급했듯 영화는 루마의 소름 끼칠 만큼 무미건조한 죽음과 함께 끝난다. 루마의 반복되는 임신과 출산과 착유가 농장 산업 시스템의 일부였듯, 도살 또한 시스템상의 마땅한 절차로서 이행된다. 생산 능력을 잃은 무용한 가축에게 남겨진 가능성은 단 하나, 죽음뿐이다. 영화 내내 루마의 살아 있는 육체를 근거리에서 포착하던 카메라는 멀찍이 위에서 루마가 총에 맞는 순간을 포착한다. 그때 카메라와 루마의 거리가 관객의 무력감을 극대화한다. 루마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숨소리를 듣고, 걸음을 함께하던 관객은 총소리와 함께 다시 농장 산업 시스템 외부의 인간으로 돌아온다. 나 말고 다른 세계가 분명히 공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영화라는 매체이지만, 동시에 내가 그 세계로부터 절대적 외부에 있음 또한 절실히 느끼게 하는 것이 영화라는 사실을, 그 한계를 <카우>는 부인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 엔딩 크레딧에 소들의 활기 넘치는 이동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가축이 아닌 동물로서의 그들의 생명력 또한 끝끝내 외면하지 않는다.

삶의 미추를 숨김없이 보여주는 안드리아 아놀드의 담대한 태도는 그의 지난 극영화들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삶의 혼돈과 고통에 대해 부박하게 정의를 내리거나 구태여 설명하기보단, 세상에 대한 피사체의 반응을 보여주되 답 대신 질문을 남김으로써 관객에게 숙고할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그의 영화가 지닌 미덕이었다. 그러니 루마의 세계가 끝남과 동시에 영화의 세계 또한 끝난 자리에서 관객에게 남겨진 것은, 각자의 체험을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루마를 바라볼 때, 나는 그녀를 통해 온 세상을 본다”라는 아놀드의 말처럼 94분간의 영화적 체험은 관객으로 하여금 세상을 이전과는 얼마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할 것이고, 그렇게 비로소 영화 바깥의 시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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