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빗줄기를 뚫고 영화관을 찾았다. 스크린엔 또 다른 재난이 있었다.
얼마 전 <비상선언>을 보지 않은 지인과 이 영화에 관한 얘기를 하다 생긴 일이다. <비상선언>을 보고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나는 다소 개략적으로 이 영화가 세월호 참사를 다루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그는 이를 전혀 몰랐다는 말을 하며 다른 영화를 보겠다고 했다. 내가 말한 정보가 그의 선택에 얼마큼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제야 깨달은 것은 <비상선언>의 외피를 이루고 있는 어떤 요소에서도, 세월호 참사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명 <비상선언>을 보며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 영화의 어떤 요소가 그러한 감상을 불러일으킨 것인지 설명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실제로 <비상선언>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재난’이라는 카테고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세월호와 공통점이 없다. 일단 <비상선언>은 배가 아닌 비행기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이 비행기를 재난의 장소로 만든 주요 요인은 기체(機體)의 파손이 아닌 기체(氣體)의 오염이다. 또한 재난 피해자가 특정 신분(고등학생)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영화는 몇 장면을 할애해 기내에 탑승한 교복 입은 학생들을 비추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비상선언>이 세월호를 다루고 있는 영화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년 4월16일을 겪은 한국 사람들의 눈에 재난에 휩쓸린 고등학생들의 모습이 포착될 때, ‘위험에 처한 그들의 모습을 안전한 스크린을 통해 바라본다’는 조건이 성립될 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듯 특정 사건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관련해서 <비상선언>을 보며 스트레스가 가장 극대화되는 순간은 비행기가 나리타 공항 상공에서 착륙을 거절당하는 순간이다. 비행기의 조종대를 잡고 있던 현수(김남길)는 일본 나리타 공항의 착륙을 앞두고 관제탑에 ‘비상선언’을 선포하지만, 관제탑은 비행기의 착륙으로 인해 발생할 2차 확산을 예방하겠다는 이유로 착륙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영화 맨 처음, 어떤 명령보다 우선시되는 비상계엄과 동급으로 정의됐던 비상선언은, 단지 책임자의 말 한마디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학습된 불일치
사회가 약속한 ‘조건 없는 착륙’이 실은 조건이 필요한 것이라는 게 밝혀질 때 느끼는 혼란. 이는 우리가 4월16일에 느꼈던 혼란과 동일하게 다가온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히 배가 침몰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아니다. 그뿐만이었다면 이는 누군가의 말마따나 “단순 해난사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월호가 사고가 아닌 재난이고 참사인 까닭은, 그 장소에 마땅히 있어야 할 구출이 부재했고, 앞으로 내가 비슷한 일을 겪더라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신이 사회에 전파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요인이다. 따라서 <비상선언>을 보고 세월호 참사가 떠오른다면 그건 <비상선언>에 나오는 이 ‘무조건적인 착륙’에 대한 거절이, ‘무조건적인 구출’이 거절당했던 그날을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번갈아 조종대를 잡은 현수와 재혁(이병헌)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든 일단 내리고 볼지 아니면 가만히 있을지를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행기의 콕핏(조종석)은 물이 차오르고 있는 여객선의 객실로 변모한다.
<비상선언>은 이렇듯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던 어떤 것들이 실은 허상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관객에게 반복학습시킨다. 한재림 감독이 강조하고자 하는 재난의 특성 같기도 하다. 말하자면 영화에 등장하는 텍스트와 현상은 수시로 불일치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 역시 영화 맨 처음에 자막으로 등장하는 비상선언의 정의다. 오프닝 자막은 주로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공되는 기본 정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만큼 해당 영화 속 세계를 지탱하는 절대 불변의 진리로 여겨지곤 한다. 영화가 제공하는 정보 중 관객이 가장 신뢰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자막은, 그러나 <비상선언>에선 단박에 부정당한다. 앞에서도 말했듯, ‘무조건적인 착륙’ 요청에 대한 세상의 대답은 ‘무조건 착륙 불가능’이다. 영화에서 이 순간이 가장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여기에 나타난 불일치가 가장 근원적인 기반을 흔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통해 학습된 불일치의 감각은 <비상선언>의 결말을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비상선언>은 보통의 재난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이 재난을 극복하는 순간과 그 후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그러나 앞서 말한 학습된 불일치가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해피엔딩’을 쉽게 믿지 못하게 한다. 인호(송강호)가 기적적으로 증명해낸 치료제가 다른 모두에게 효과적이었을지도 의심되지만, 더 믿지 못하겠는 것은 아무런 상처 없이 꼿꼿이 서 있는 비행기의 선체다. 그렇게 이어지는 흰옷을 입은 생존자들의 사교 모임 장면은, 이 세계 자체가 현실에 기반한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상상을 하게 한다. 그리고 이 상상은 영화 전체적으로 뿌옇게 헐레이션 처리된 장면들이, 한때 모두가 살아 있던 순간들을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가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우게 만든다. 물론 이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한재림의 전작 <더 킹>의 마지막에 나오는 태수(조인성)의 말처럼 “당신이 결정하는 것”일 것이다.
아직 똑바로 마주 볼 준비가 안된 재난
애초에 <비상선언>을 볼지 말지 결정하는 것 역시 각자에게 달렸다. 나는 서두에 언급한 지인과 (아마도) 비슷한 이유로 한동안 <생일>(2018)을 보지 못했었다. 너무나 직접적으로 포스트 세월호 서사를 다룬 이 영화를 똑바로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희생자를 연기할 배우의 얼굴과 유가족을 연기할 배우의 얼굴을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관련하여 보이는 것과 실제 벌어지는 일의 불일치를 통해 에둘러 메시지를 전하던 <비상선언>이 가장 원망스러웠던 장면은 영화 후반부 등장하는 ‘페이스 타임’ 장면이다. 한재림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실제로 “갑자기 전화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고 하며 이 장면을 “극적인 설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끝까지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충분한 감동을 쌓아올리던 영화가, 긴 항해의 끝에 다다라 다소 섣부른 선택을 한 것은 두고두고 아쉽게 느껴진다. 여전히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최근의 재난을 많은 관객을 필요로 하는 텐트폴 영화에 영리하게 담아낸 것에는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아직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볼 준비가 안된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