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합본 특대호를 만들 때면 휘몰아치는 과량의 업무에 기진맥진 넋이 나간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험난한 마감의 고개를 넘으면 금세 마음이 보름달처럼 부풀어 오른다. 한주의 고생을 평소보다 통통해진 잡지의 무게로 고스란히 느낄 땐 연휴 기간 한껏 게을러지겠다고 결심 아닌 결심을 하기도 한다. 고정 지면 ‘리스트’의 특별판쯤 되는 ‘<씨네21> 기자들이 요즘 꽂혀 있는 것들의 목록’에도 썼듯 이번 추석 연휴에는 올해의 마지막 그랜드슬램인 US오픈 테니스대회나 실컷 챙겨 볼 생각이다. 라스트 댄스를 예고한 세리나 윌리엄스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지만, 기본적으로 테니스는 본선에 오른 모든 선수가 우승 가능한, 방심할 수 없는 멘탈 경기라는 점에서 흥미롭지 않은 대진이 없다. 물론 최근 20년간은 ‘어차피 우승은 페더러/나달/조코비치’로 귀결되는 역사였지만 페더러와 조코비치가 없는 올해 US오픈 왕좌는 누구의 차지가 될지 톱시드의 활약과 언더도그의 서프라이즈를 기대하며 뉴욕과의 시차를 좁혀가는 게 요즘 나의 피곤하지만 확실한 재미다.
테니스 얘기는 여기서 각설하고, 리스트를 취합하면서 의외였던 건 영화기자들이 아무도 영화를 꼽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과 유튜브 채널은 있고 영화는 없는 이상한 리스트가 완성되었는데, 이러한 영화와의 거리두기는 의식적 거리두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회복과 환기와 영감의 다채로운 경로들이 결국은 영화와 건강하게 가까워지기 위한 모색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영화를 보고 또 봐야 하는 사람들이다. 추석 연휴 기간에도 기자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밀린 영화를 보고 밀린 시리즈들을 챙겨 볼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볼 영화로 <공조2: 인터내셔날>이 좋을지 <블랙폰>이 좋을지 고민할 것이고, 넷플릭스에 접속해 몇십분을 헤매다 기어이 <수리남>을 플레이하게 될 것이다. 안 봐도 뻔한 <씨네21> 기자들의 추석 풍경이랄까.
명절엔 가족끼리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공식이 깨진 지도 오래라 갈수록 ‘추석 영화’의 중량감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난해 <오징어 게임>이 모든 이슈를 흡수하며 화제의 중심에 섰던 것처럼 올해도 영화든 시리즈든 사람들의 레이더망에 걸려 풍성하게 회자되는 작품이 하나쯤은 나오기를 바란다. <범죄도시2>의 천만 관객 동원과 여름 시장의 부진을 단기간에 목격하면서 쉽게 낙관하거나 비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웠지만, 그럼에도 추석엔 낙관주의자가 되어 대박의 주인공이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정성 들여 만든 이번주 <씨네21>도 재밌게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그럼 2주 뒤에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