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란형 주인공들은 다혈질과 의협심을 소유한 영웅과로 보이지만, 군중 사이에서 혼자 벌떡 일어난 후 뒤늦게 자기도 민망해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평범한 초상을 자처한다. 전설의 형사에서 민원실 퇴출 0순위가 된 <걸캅스>의 미영과 서울시장 낙선 후 백수가 된 <정직한 후보2> 속 상숙의 간극은 그렇게 좁혀진다. 훤히 펼쳐진 고생길을 배짱좋게 걷는 여자의 얼굴에 적역이나 코미디적 페르소나를 벗은 실제의 라미란은 낙천적이기보다는 연기에 갈급하고 철저한 배우다. 우여곡절 끝에 강원도지사가 되어 청렴과 부패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주상숙의 인생 2막을 연기하는 동안, 그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의심하는 사람의 자세로 웃음을 연구했다.
= 설정의 강도가 점점 더 세지니까 배우로서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다. 투 머치(too much)해지면 어쩌나, 내 연기가 선을 넘으면 어쩌나 우려는 계속 있었다. 코미디 장르다보니 우스움과 거부감의 경계를 묻게 된다. 성격상 안심하는 편이 못된다. 블라인드 시사 때도 덜덜덜덜 떨며 봤다.
- 전작 <정직한 후보>로 <씨네21>과 인터뷰할 때도 똑같이 무척 걱정스러워했다. 결과적으로 지난해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아휴. (웃음) 거의 모든 작품을 할 때마다 이렇다. 나 자신만 놓고 봤을 때 만족스러운 경우는 거의 없다.
- 유독 본인에게만 엄격한 편인가. 참여한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현장 분위기가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 후배들이 잘 따르는 것을 보면 격려에 후한 사람이지 않을까 짐작한다.= 전혀, 다른 사람한테도 무지 까다로워서 오히려 요샌 자제하려 한다. 특히 코미디를 할 땐 웬만해선 내가 잘 안 웃기도 하고 가능한 한 더 웃겨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으니 동료들에 대한 피드백도 짜다. 이제 후배들도 많으니 조심해야지 싶다. 건설적인 취지로 보탠 말이 되레 사기를 꺾을 수도 있으니까. 하여튼 나나 잘하자!
- 캐릭터의 일관성은 가져가면서도 신선하게 웃겨야 한다는 점에서 2편의 흥행이란 참 어려운 과제가 아닌가 싶다.= 배우가 의도한 부분은 관객이 무덤덤하게 보고 의외의 곳에서 웃음이 터지는 경우가 많다. 과하게 의도하지 않으려 의식했다. 그리고 비서실장 희철(김무열)이 거짓말을 못하게 되면서 코미디의 많은 지분을 가져갔다. 남편(윤경호)도 든든하고, 새로 합류한 서현우-박진주 배우도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정직한 후보>를 처음 할 땐 내가 무언가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는데 이번엔 다른 사람과 함께한다는 마음가짐을 분명히 했다. ‘이 사람이랑 함께해서 참 좋다’ 또는 ‘지금 장면은 옆사람이 이미 잘 살리고 있다’ 같은 마음이 들 때 행복했다.
- <정직한 후보2>는 전편에 비해 좀더 비현실적인 상황도 겁없이 뻔뻔하게 밀고 나간다. 이럴 때 배우는 무엇에 의지해서 연기하나.= 캐릭터가 웃겨도 배우는 진지해야 한다. 인물이 처한 입장에 제대로 반응하고 있는지 점검한 상태에서 표현의 강도를 조절해나간다. 머리를 너무 쓰면 외려 갈팡질팡하는 타입이어서 ‘좀 막 해보자’ 싶은 생각으로 카메라 앞에 설 때도 많다. 중요한 건 일단 대사를 열심히 외우고 촬영장에 나가는 거다. 오늘도 제대로 일하러 간다는 마음으로 부딪히다보면 뭐가 나온다. 그런 면에서는 불성실한 배우일 수도 있다.
- 너무 겸손한 말씀.= (주상숙 톤으로) 하! 사실 그냥 뭐 타고났다는 말밖에!
- 주상숙은 ‘진실의 주둥이’ 병과 별개로 인간적인 결점이 매력인 인물이다. 유능하지만 그만큼 야심과 욕심도 많아서 제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장유정 감독님이 설정한 <정직한 후보2>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강원도청에 입성한 주상숙이 마음 고쳐먹고 정말 바르고 굳건하게 행정을 보려하니 아무도 이 여자를 지지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참모인 건설교통과 국장 조태주의 “연임 하셔야죠”란 말에 상숙이 넘어가게 된다.
- 비리에 물드는 과정과 함께 흡사 크루엘라 드 빌같이 가발도 더욱 화려해진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주상숙의 욕심통 크기만큼 볼륨을 띄워보자고 마음먹었다. 이번 거 보다가 전작을 보니까 너무 꺼져 있더라, 초라하게. 덕분에 나중에 김무열 배우가 가발에서 영감을 얻어 재밌는 애드리브도 넣었다. “사실 누나 그 가발도 너무 마음에 안 들어”, “3등신 같아” 그런 대사들.
- <걸캅스>를 기점으로 배우 라미란의 존재를 강하게 상정한 컨셉의 작품들이 탄생하고 있다. <시민 덕희>도 기대 중인데, 늘어난 분량만큼 체력과 책임감의 부담은 어떤가.= 겪어본 결과 한 영화에서 주인공의 분량은 최대 62% 정도가 적당한 듯싶다, 그 이상은 너무 많다. (웃음) 원래 쉬는 걸 잘 못 견뎌하는 성질인데, 2020년엔 코로나19 상황도 겹쳐져 <시민 덕희>에만 집중했다. 몇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 매니지먼트 본부장님한테 농담으로 ‘너무 헐빈한 거 아니에요?’ 했더니 지난해엔 <정직한 후보2>를 포함해 다섯편인가를 잡아주셨더라고! 근데 그렇게 정신없다가도 촬영 다 끝내놓고 나면 또 허전하고 초조하다.
- 세간의 말처럼 코미디 연기가 가장 어렵다는 게 사실인가. 힘들게 해낸 만큼의 성취감도 있는지.= 없다. 관객에게 감동을 주거나 혹은 눈물을 쏟는 등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한 장치가 있으면 사실 배우 역시 일정 부분 해소가 된다. 그런데 코미디는, 전제 자체가 다르다. 애초에 사람이 배꼽 잡고 포복절도할 일이 얼마나 되겠나. 그건 너무 희박한 확률이다. 그래서 내 연기가 누군가를 살짝이라도 미소 짓게 한다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사실 나는 코미디가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