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히토 슈타이얼-데이터의 바다>전에서 단채널비디오 <소셜심>(2020)이 소개됐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지점은 ‘지난 이야기’라는 말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18분 남짓의 영상이니 ‘지난 이야기’라고 언급할 만한 내용은 사실상 없다. ‘지난 이야기’의 반복은 실체 혹은 실효성이 없는 지칭의 반복이자 일종의 챕터로 기능한다. 이는 실제 시리즈 영화를 인식하는 방식에 영감을 주었다. 시리즈 영화의 핵심은 ‘지난 이야기’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이야기를 예고하는 부록처럼 보이는 부분에 있지 않을까. 시리즈 없이 시리즈를 구축하는 <소셜심>은 시리즈 영화가 우리를 매혹하는 지점이 다름 아닌 연속된다는 환상에 있음을 가정하게 만든다. 물론 이러한 반복은 ‘루프’로 순환하는 미술관의 영사 방식과 어울려 미술관 속 영상 상영에 관한 자기 반영적 코멘트로 보이기도 했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공개된 요아킴 트리에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 14개 장으로 구성된 영화다. 시간의 흐름을 담은 영화에서 ‘몇년 후’라는 자막이 돌출되는 경우를 염두에 두면 챕터와 소제목은 시간의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기 위한 방안처럼 여겨진다. 물론 내적 이유만 언급하기에는 이 영화의 챕터는 빈번하고 과도하다. ‘영웅의 거창한 대서사시처럼 보이게끔 유도’하는 과장법으로 읽은 김소미 기자의 분석도 흥미롭지만, 이 글은 소설의 형식과 함께 ‘OTT 시리즈의 문법’을 함께 언급한 김예솔비 평론가의 지적에 공명한다. 영화의 형식은 고전적인 동시에 그 고전적인 방식을 다시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영화 내부에 분절을 기입하는 챕터 영화들은 지난해 동시에 등장했고 주목받았다. 분절성은 트리에의 영화처럼 에피소드가 선형적으로 이어지는 방식과 더불어 매 에피소드가 질적으로 달라지는 방식으로도 드러난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인 라두 주데의 <배드 럭 뱅잉>은 3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각장은 서로 다른 스타일을 지닌 3명의 감독에게 같은 주제로 의뢰해 만든 단편 옴니버스영화처럼 장 사이의 단절감이 두드러진다.
단절감을 확장하면,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공개된 미아 한센뢰베의 자전적인 영화 <베르히만 아일랜드> 역시 이 계열에 포함된다. 영화는 시나리오를 쓰는 시간과 그것의 재현 혹은 결과물의 관계를 혼동하게끔 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앞선 영화들에 빗대어보면 분리되어야 할 이야기가 분리되지 않은, 챕터 없는 챕터 영화라 하겠다. 각각이 새로운 방식이랄 수 없지만 이 영화들이 지금 여기에 도착한 사실은 새삼 주목된다.
시리즈의 조건
영화의 내부 분절 경향은 시간적 확장을 보여주는 시리즈 영화와 대조적으로 맞닿는다. OTT 플랫폼이 영화나 영상을 접하는 주요 매체로 자리하면서 극장의 시간적 제약을 벗어나 한편의 영화가 몇개의 시즌, 몇부로 나뉘어 시간 규약을 뛰어넘은 확장된 시간의 시리즈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시네아스트적인 시도로 인식되던 긴 영화는 OTT 플랫폼과 더불어 가장 대중적인 오락을 위한 지속으로 전환됐다. 감독을 포함해 영화 인력이 시리즈, 드라마 시장에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영화와 드라마 사이에 공고했던 인식의 경계 역시 옅어지는 중이다. 반면 극장 상영을 염두에 두고 만든 영화들은 여전히 2시간 내외라는 시간의 제약이 있다. 분절된 혹은 분기하는 영화는 그 자체로 시리즈를 환기하는 동시에 극장 영화가 지닌 시간의 제약을 과장된 방식으로 내부에 표시하는 자기 검열이자 자기 반영적 시도일 수 있다.
한편 시간의 틀에서 자유로운 시리즈 영화의 부흥 원인은 단순히 플랫폼이 지닌 편리성에만 있지 않다. 그것이 디지털 매체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은 종종 생략되곤 하지만 중요한 전제다. 2시간 내외로 러닝타임이 규정된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영화가 필름에 기록되고, 필름으로 영사되었기 때문이다. 초기 영화가 대부분 단편이었던 것을 염두에 두면 기술의 발전은 점점 더 영화의 물리적 길이를 늘리는 방식으로 나아갔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영화는 곧 필름이라는 물질이었기 때문에 필름의 길이가 촬영 분량을 제약하고 러닝타임을 제약한다. 제작비와 직결되는 촬영 분량, 민감한 필름의 특성, 영사기의 성능과 같은 조건들이 러닝타임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였다. 디지털 영화 시기로 접어들면서 영화는 물질이 아닌 메모리가 되었고, 실제의 촬영만이 아니라 캡처, 합성, 조작 등 후가공이 훨씬 중요해졌다. 필름이 육체로서의 극장이 필수적인 매체라면 그보다 유동적인 형태의 디지털 시네마 시기 영화와 극장의 관계가 전보다 약화하는 현상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도 여전히 영화의 상영 환경으로 극장을 중심에 놓는 것은 과거에 관한 향수이거나 습관일 수 있다.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의 원테이크 영화 <러시아 방주>는 디지털 시네마를 논할 때 앞줄에 배치되곤 한다. <러시아 방주>의 원테이크 실험은 디지털 시네마의 욕망이 숏의 기이한 지속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원 컨티뉴이티 영화는 영화의 연속성 개념을 다시 정의하도록 부추겼다. 기존 영화의 연속성 개념이 숏과 숏, 시퀀스와 시퀀스, 장면과 장면 사이의 연결이 관객의 시선의 움직임에 위배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을 의미했다면 <러시아 방주>는 연속성 개념의 재정의를 요구하며 연속성의 극단이 곧 관객 시선의 연속성에는 위배된다는 아이러니를 인식하게 했다.
<러시아 방주>에 비판적인 입장에 선 데이비드 로도윅은 그것의 운동감이 ‘일인칭 슈팅 게임’과 비슷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지적은 최근의 원 컨티뉴이티 숏을 실험한 샘 멘데스의 <1917>에도 반복되는 비판이다. 비판의 관성을 벗어나면 <러시아 방주>와 <1917> 사이에는 커다란 단절이 보인다. 로도윅이 지적했듯 <러시아 방주>의 관람 경험은 박물관 투어 영상을 보는 것과 질적으로 비슷하다. 이 말은 곧 거기에는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로서의 영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1917>이 보여준 실험의 핵심은 이미지의 스펙터클과 감정의 스펙터클간의 충돌 지점을 돌파한 데 있다. 전쟁영화는 단순히 스펙터클 이미지의 과장만이 아니라 감정의 증폭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은 결과다. 감정은 물론 영화에서 지속하는 순간이 아닌 멈추는 순간에서 비롯된다. 지속하고 이어지던 영화의 속도와 그 안에서 병사의 걸음이 느려질 때. 멀리서 들리는 어렴풋한 음악 소리가 서서히 가까이 다가올 때. 병사가 걸음을 멈추고 나무에 기대어 앉을 때. 이러한 장면은 긴 호흡으로 내달리는 영화의 챕터이자, 인터미션이며, 페이소스가 깃드는 장소였다.
분절과 몰입
자크 오몽은 원테이크 영화에서 관객은 ‘추상적인 구조화 작업’을 실행한다고 말한다. 단절된 숏을 연속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관객의 의식과 반대편에서 원테이크 영화는 관객에게 영화를 파편화하도록 요구한다. 앞서 언급한 3편의 최근 개봉작은 디지털 시네마의 연속성에 대한 하나의 반응으로 보인다. 이들은 디지털 시네마 실험의 과제를 숏의 지속과 연속이 아닌, 분절과 분기로 잡는다. 영화의 챕터는 그 자체로 형체가 없는 디지털 이미지에 형체를 부여하려는 노력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필름식 분절의 반영처럼 보인다. 더불어 내부에서 분기하고 관계가 재조정되는 영화는 시네마의 연속성이 이어야 할 하나의 사례를 제시한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분절성은 일단 단편소설의 분위기를 영화에 기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 영화가 아니다. 율리에는 자기 이야기를 기록하는 사람이지만 여러 직업을 혼란스럽게 탐험한다. 영화의 마지막 시점에 그는 스틸 사진을 찍는 사람이지만 그것이 그의 커리어의 종착지처럼 보이진 않는다. 스틸 사진은 그 자체로 분절과 단락으로 이뤄진 영화를 환기하면서도 이야기를 주체화하거나 통합하는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들려오던 내레이션 음성은 어느 순간 중단되고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를 설명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보통의 영화에서 1인칭 내레이션의 주인공에 어울리는 율리에는 자신의 시점을 강요하거나 자신을 보충 설명하지 않는다. 감정적 몰입이나 공감과 흐름이 중요하다고 인식되는 로맨스영화에서 단편적인 사건의 나열에 의한 거리두기는 대담한 시도다. 챕터는 로맨스영화의 일반적인 감상을 중단하기를 요구한다. 그와 동시에 영화는 우리가 몰입하는 것은 언제나 단편적인 이야기였음을 설득한다. 나를 제외한 세상의 움직임을 정지시키는 장면이 영화의 핵심처럼 보이는 이유는 영화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장면이 가장 감정적인 공감을 불러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시퀀스는 분절을 통한 몰입을 실험하는 영화의 입장을 함축한다.
<배드 럭 뱅잉>은 가장 자극적이며, 공분을 불러올 만한 사건을 이미지로 강렬하게 인식시키면서 출발한 뒤 짐짓 딴청을 피우듯 이야기를 시작한다. 앞서 3부가 전혀 다른 감독의 3편의 영화처럼 보인다고 말했지만, 3부를 관통하는 것은 무언가의 중단을 그린다는 점이다. 1부 ‘일방통행’은 에미가 도시를 배회하는 모습을 통해 거리의 풍경을 보여주는 도시 에세이영화처럼 보인다. 카메라는 종종 주인공을 놓친 채 다른 행인이나, 거리의 광고판, 아스팔트에 핀 식물 같은 것에 눈길을 두는 방식으로 단절을 새긴다. 단절의 요소는 카메라의 선택이 아닌 에미가 놓인 상황에서도 드러난다. 에미의 걸음은 종종 자동차에 의해 가로막힌다. 상담을 위해 찾아간 교장 집에서도 대화를 위한 환경은 마련되지 않는다. 공간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둘의 대화는 좁은 발코니에 선 채로 이뤄지나 이마저도 그곳을 가로지르는 통행자의 방해를 받는다. 에미의 걸음은 에릭 로메르의 <사자자리>에서 하루 사이 부랑자가 된 피에르가 파리 시내를 하염없이 배회하던 일련의 시퀀스를 연상시킨다. <사자자리>는 피에르의 발길과 시선이 닿는 곳에서 마주친 인간 군상을 채집하듯 나열한다. 에미의 걸음 역시 그와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을 목록화하는 경향이 엿보이지만 조명하는 인물의 성격은 서로 다르다. <사자자리>는 마치 피에르가 도시에 존재할 법한 불운을 모두 흡수한 듯이, 사람들의 행복한 풍경을 조명한다. <배드 럭 뱅잉>의 에미 역시 불운의 한가운데에 던져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커다란 불운마저 세상에 존재하는 사소하고 반복되는 악덕을 흡수하기에는 역부족인 듯 보인다.
2부는 사전의 형식을 빌린 동영상 교본처럼 보인다. 단어와 이미지와 설명의 부조화의 조화는 이미지로부터 거리두기를 위한 실험의 장을 연다. 3부는 결말 다시쓰기를 반복하면서 관객과 소통하는 인터랙티브 영화를 가장한다. 영화는 3부에 걸쳐 사건과 거리를 두는 3가지 방식을 실험한다. 영화의 풍자적 성격에 호응하며 이를 ‘농담’으로 규정하는 반응이 빈번하고 또 이러한 반응이 적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영화가 끊임없이 영화의 내용과 거리두기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브레히트 서사극에서의 중단은 극중 인물이 갑자기 관객을 정면으로 향한 채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반면 <배드 럭 뱅잉> 1부에서 두드러진 중단은 디지털 기기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현재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OTT로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은 영상을 언제든지 중단할 수 있는 가능성처럼 의미한다. 매체는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 지속할 수 없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다.
<베르히만 아일랜드>에서도 중단의 순간이 분기의 기점을 마련한다. 크리스가 토니에게 자신이 쓴 시나리오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소리는 연속하지만, 이미지는 이야기를 재연하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크리스의 목소리는 재현된 영화의 3인칭 내레이터 역할을 한다. 이미지는 때때로 이야기하는 현재로 넘어오면서 교차된다. 순조롭게 흘러가던 이야기는 갑작스러운 토니의 전화벨 소리로 중단된다. 전화벨 소리는 재현된 영화에 개입하고 재현 장면은 멈춘다. 비슷한 중단은 크리스와 토니의 대화 시퀀스에서도 드러나며 둘을 떨어뜨린다. 재현 장면의 마지막에서 에이미는 홀로 남고, 토니가 떠나면서 크리스도 혼자 남는다. 그러나 크리스가 들추던 노트에 적힌 ‘에필로그’라는 메모와 함께 분리된 크리스와 이야기 속의 배우들은 영화가 끝난 이후의 시점으로 회합한다. 영화는 영화 내적인 시간의 선후 관계를 무시한 채, 흔히 쓰이는 교차 편집을 실제 나란히 진행되는 두개의 이야기의 교차임을 드러낸다. 내적 연속성이나 개연성을 따지는 대신, 영화 관람의 연속성을 이야기 내부에 포함한 것이다.
연속성의 방향
단절과 분기를 통해 연속성을 소구하는 작품들의 목록을 살폈다면 방향으로서의 연속성에 주의를 돌리는 작품과 관람 경험을 짧게 언급하고 싶다. 조던 필 감독의 <놉>은 화면비가 지속해서 변하는 작품이다. 화면비 변화가 시선의 연속성에 위배되지 않은 방식으로 숨겨졌다면 <놉>은 이것을 빈번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아이맥스 상영이 가능한 극장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상영 환경에 따라 감상이 달라질 영화다. <놉>의 아이맥스 화면비의 의미는 배우의 얼굴을 바스트숏으로 잡을 때 두드러진다. 세로로 긴 화면비 안에서 배우 대니얼 컬루야의 얼굴은 향수 어린 영화의 내용과 어우러져 고전영화를 따고 들어간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이미지는 늘 시선의 수평성으로 재현된 반면, 영화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언가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은 새로운 영화와 미지의 관객을 예감한다. 세로로 긴 형태의 확장 스크린의 실험을 연상시키는 안구와 고개의 운동은 연속성의 방향 전환을 시도하는 셈이다.
가상현실(VR)영화는 나아가 수직과 수평에 국한되지 않은 360도 회전 운동으로 파노라마형 연속성을 그린다. 현재로서 VR영화에 관해 논하는 최선의 방식은 특수하고도 원시적인 경험을 나누는 것이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에서 김진아 감독의 <동두천>과 <소요산>을 VR전시 형태로 공개했다. 불이 환하게 켜진 공간에서 360도 회전형 의자에 앉아 커다란 VR기기를 머리에 조이고 영화를 체험하는 일은 스스로 광경이 됨을 의미했다. 눈에 달라붙은 영상은 내 고개나 몸의 회전에 따라 모습을 바꿀 뿐, 내 눈앞에서 떨쳐낼 수 없다는 점에서 현기증 나는 공포였다. 영화 속에서 나는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낯선 밤거리와 공간과 장소에 던져졌다. 내가 거기에 있지만 아무도 나를 모르는 유령의 상태. 심지어 배우는 나를 가까이에서 마주 본 뒤 나를 통과해버렸다. 카메라가 막을 통과하는 대신, 이제 인물이 카메라를 통과하는 상황은 어떤 전환을 예고하는 것일까. VR영화 속에서 컷의 전환과 단절은 마치 토이 카메라의 컷 전환처럼 훨씬 노골적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영화의 체험이기보다는 관객을 초기 영화 시기 움직임을 신기하게 체험하던 상태로 돌려놓는다. 우리는 다시 이 무한의 가능성에서 분절의 순간을 새겨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