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예솔비 평론가의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
2022-09-28
글 : 김예솔비
영화의 실어증에 관한 진단들

이시이 유야 감독의 전작들에 대한 인상은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행복한 사전>의 마지막 장면이다. 해안가에서 남녀가 서로 거리를 둔 채 서 있다. 남자는 여자를 향해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하고, 여자는 웃는다. 이상하게 보이지만 두 사람이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허리를 굽힐 수 있을 정도의 간격은 사실 두 사람의 사랑을 지탱하는 양식인 것이다. <행복한 사전>뿐 아니라 이시이 유야의 영화에서 연인들은 늘 서로에게 거리를 두는 종족이었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와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에서도 연인들은 서로를 신기한 동물을 보듯이 조심스레 응시했고, 영화는 바로 그 간격 속에서 사랑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은 사랑의 관점으로 보자면 매우 범상한 영화다. 전작들과 다른 점은 간격을 사랑의 필요조건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절제와 거리두기는 오히려 사랑의 방해물이다. 물론 이는 통념에 적용하면 극히 자연스러운 말이지만, 이시이 유야의 전작들과 비교하자면 과감한 자기부정이다. 아츠히사(나카노 다이카)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심을 말하거나 다가가지 못하고, 사랑은 불능에 빠진다. 간격 속에서 사랑을 구축하던 연인들이 간격을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길 때, 이제껏 이시이 유야의 영화를 빛내던 특수함이 사라진 것 같았다. 오히려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영화의 중심에 아츠히사의 ‘실어증’을 가져다둘 때다. 아내 나츠미(오오시마 유코)의 외도 장면을 목격했을 때, 그녀가 집에서 떠나달라고 요청할 때 아츠히사는 입을 다문다. 그는 말이 가장 필요한 때에 말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이 실어증의 원인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의문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보자.

침묵증과 무언증

미셸 시옹은 영화에 말하지 않는 인물이 등장할 때, 그 인물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그 말 없음의 동기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령 신체적인 이유로 인해 구어 활동을 할 수 없는 경우를 가리키는 ‘무언증’과 신체적 손상 없이 심리적인 이유로 말하기를 거부하는 ‘침묵증’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말 없는 인물을 마주쳤을 때 가능한 첫 번째 의문은 그 인물이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무언증)인지, 하고 싶지 않은 것(침묵증)인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를 확실히 구별 짓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말 없는 인물들은 언제나 의혹의 대상으로 스크린에 남는다.(미셸 시옹, <영화의 목소리>)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에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인물이 등장한다. 아츠히사의 형 히데(박정범)는 히키코모리로 가족들과 동선을 섞지 않고 유령처럼 지내며 영화 전체에 걸쳐 대사가 거의 전무하다. 히데는 나츠미의 집을 찾아갔다가 집 밖을 나오는 낯선 남자(나츠미의 외도 상대)를 마주친다. 그는 남자의 다리에 매달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신 고개만 젓는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고, 히데는 남자를 죽이고 만다. 영화는 이어지는 장면에서 교도소로 면회를 간 가족들을 보여주며 히데의 행적을 암시하지만, 히데는 더이상 영화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쩌면 히데는 침묵증과 무언증 사이에서 확정되지 않는 존재로 남기 위해, 즉 영화에 의혹을 새겨넣기 위해 사라진 것은 아닐까. 히데의 존재/부재는 영화에 묘한 기운을 덧씌운다.

반면 아츠히사의 실어증은 그리 간단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형처럼 발화 자체를 중단한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말’을 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실어증은 선택적이며 일종의 존재론적인 비유로 작동한다. 왜 진심을 털어놓지 못하냐는 친구의 말에 “하고 싶은데 말이 안 나와. 일본인이라서 그런가?”라고 답하는 아츠히사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아츠히사가 속시원히 울거나 말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단순히 겁이 많거나 우울증에 걸렸기 때문(침묵증)일 수도 있지만, 일본 사회 전체가 일종의 거대한 ‘불능’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무언증)일 수도 있다. 한편 아츠히사가 진심을 말하는 유일한 순간은 영어로 말할 때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말할 때, 즉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멀어질 때 실어증이 해제된다는 것은 그의 실어증을 무언증과 연결 짓게 만든다. 그의 실어증은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인 계기가 아닌, 동시대 일본 사회의 정서에 대한 진단과 공명하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아츠히사의 ‘말하지 않음’은 침묵증보다는 무언증에 좀더 가까워 보인다. 아츠히사의 신체적 발화기관이 손상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말들의 발화를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치명적인 사회의 ‘고장’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고장은 영화에서 얼핏 스쳐간 풍경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버블경제 이후의 무력감, 불안전에 노출된 성 노동 현장을 가로질러 출몰하는 무언가다. 히데가 침묵증과 무언증 사이에서 그 의혹을 간직한 채 비밀 속으로 침잠하는 영화적 인물이라면, 아츠히사는 그 의혹을 다소간 폐기하면서 발화기능이 손상된 사회의 알레고리를 드러내는 표상에 가까운 인물이다. 아츠히사는 ‘우리’라는 대명사로 쉽게 치환될 수 있으며, 아츠히사의 무언증은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이 된다. 영화에서 아츠히사를 둘러싼 사랑의 개성보다 시대를 향한 진단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이유다.

지연된 애도의 풍경

무엇보다도 아츠히사의 무언증은 애도의 실패와 관련 있어 보인다. 나츠미가 헤어지자고 요구할 때, 아츠히사는 아내의 얼굴 대신 할아버지의 사진을 쳐다보며 엉뚱한 대답을 한다. “알 수 없게 돼버린 건 할아버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야.” 아츠히사는 왜 불쑥 그 말을 꺼낸 것일까. 확실한 것은 아츠히사가 상실의 순간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타이밍을 놓친 애도는 아츠히사가 잃어버린 말들 위로 쌓이고, 영화는 무언증에 대한 진단과 지연된 애도의 풍경을 겹쳐놓는다. 아츠히사는 나츠미가 죽은 뒤에야 그녀가 살해당한 호텔에 가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진심을 전한다. 아츠히사의 말이 지연된 자리에 도착하는 풍경은 무언증이 만들어낸 시간의 어긋남이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를 다루는 스와 노부히로의 <바람의 목소리>와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가 보여주듯이, 동시대 일본영화는 밀려드는 재난 속에서 슬픔의 시차를 겪는 존재들을 부단히 기입한다. 두 영화가 기어코 상실의 기원에 돌아가서 제의식을 행하는 반면,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은 그 자리에 미처 도착하기 전에 중단된다. 영화의 끝에 이르러 아츠히사는 눈꺼풀 밑에 넣어두었던 눈물을 쏟아내듯 감정을 분출하지만, 그가 진심을 전해야 하는 대상 앞에서가 아닌, 친구의 자동차 안에서다. 영화는 자동차에서 내려 딸을 향해 뛰어가며 간격을 극복하려는 아츠히사의 몸짓에서 끝난다. 그 간격은 제때 발화되지 못한 진심과 뒤늦게 도착한 말 사이의 오차이자, 고장난 사회가 벌려놓은 세계의 심연이며, 이시이 유야의 영화가 확장해나가길 바라는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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