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선 감독과는 무슨 얘기를 나눴나.
= 촬영 전까지 별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다. 얘기를 하자고 해도 “너 알아서 잘할 거잖아”라고만 하셨다. 감독님은 내 분위기를 좋아하셔서 크게 컨트롤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내 느낌으로 끌고 가되 대사 톤이나 장면별로는 세부적인 디렉팅을 주셨다. 한번씩 “기글기글하게 해봐!”라고 말씀하셨는데 처음 듣는 말이라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좌중 웃음) 다만 감독님이 ‘기글기글’이라고 하면서 보여주는 표정을 보고 저런 느낌이구나 싶어 “알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라고 했다. 앉아서 표정으로만 연기할 때도 “너무 주지 마. 입꼬리 1mm만 올려!”라고 하셨다.
엄청난 디테일이다.
= 어떤 동물들은 먹고살기 위해 사냥하지만 자칼이나 아프리카 들개, 늑대의 경우 그냥 가지고 놀려고 사냥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느낌을 가져가고 싶었다. 종두가 쓰러진 사람을 칼로 찌르는 장면이 있는데 슛 들어가는 순간 왠지 힘을 세게 주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움직여보자 싶었는데 그저 놀잇감을 대하는 것 같은 종두의 모습을 보고 감독님이 순수할 만큼 악한 느낌을 잘 살려냈다고 좋아하셨다. 그렇게 구현해나갔다.
그런 순간마다 토론토 극장에 모인 사람들이 환호했을 장면이 떠오른다. 그 풍경을 상상해보면 배우에게는 두고두고 힘이 되는 기억으로 남을 것 같은데. 배우 생활하면서 힘에 부칠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는 기억이 있나.
= 나는 털어내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과거에 내가 한 일로 힘을 내기보다 버리고 털어내고 나아가는 편이다. 힘들 때는 다른 일을 찾는다. 이것저것 취미가 많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한 가지만 진득하게 해보라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이거 내 문제인가? 내가 지겨움을 빨리 느끼는 성격인가?’ 고민하기도 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번아웃에 관련된 글을 읽었다. 작은 성취감을 가지라는 가벼운 조언이었다. ‘똥손’이지만 최근에 인센스 홀더를 만들어서 기분 좋았던 경험이 떠올랐다. 내가 작은 즐거움을 누리려고 시도한 것들이 어쩌면 본능적으로 내가 버티려는 행위였구나, 깨달은 순간이 있었다. 내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이런 취미생활도 이것저것 해대는 성격으로만 여겨져 행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수기 때마다 내 나름 소소한 성취감을 쌓았던 거라고 생각하니 새삼 대견하게 느껴지더라. (웃음)
대국민 오디션에서 1등을 차지하며 시작할 때부터 큰 성취를 쌓아온 커리어를 생각하면 의외다.
= 내 직업은 언제나 평가를 받는다. 이 인터뷰도 공개되면 사람들은 서인국이 좋다, 나쁘다, 모르겠다 등등 판단을 내릴 거다. <슈퍼스타K>도 서바이벌이라 나라는 존재를 평가받는 일이었잖나. 그 뒤의 노래나 작품, 예능 활동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13년을 보내다보니 남들의 평가에 예민해지고 스스로를 더 엄격하게 바라보게 됐다. 활동 초기에는 무슨 얘기가 들리면 ‘내가 문제인가, 내가 이상한 건가’라고 자꾸 내 문제로 가져왔다. 그래서 자꾸만 털어버리려고 다른 일에 골몰했던 것 같다.
배우 생활 10년이 지난 지금, 실제 서인국과 배우 서인국의 관계는 어떤가.
= 사이는 좋지 않다. 연기는 하면 할수록 너무 어렵다. 연기를 알았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다. 그게 내 인생 최대의 건방짐이었다. (웃음) 슬픈 신이니까 눈물을 흘려야 해, 행복하니까 행복을 표현해야 돼. 이게 틀린 말은 아닌데 이걸 정답처럼 여긴 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어느 날, 왜 슬프다고 이렇게 울어야 할까? 웃으면서 울 수도 있는 거고 눈물 흘리지 않아도 슬퍼할 수 있는 건데. 왜 나는 일차원적으로만 생각하지?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머릿속이 땡 하고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 모든 표현이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민도 많아지고 스스로 괴롭힌다는 기분까지 들었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나하나 정리해가는 과정에서 많이 유연해졌다고 생각한다.
가장 유연하게 연기해냈다고 느낀 작품은 무엇인가.
= 감정을 꼬아서 표현해보고 싶다, 반대로 연기해보고 싶다는 갈망이 계속 있었지만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가 드라마 <38사기동대>를 만났다. 한동화 감독님이 “연기할 때 20%의 감정을 빼고 해보자. 연기 못한다는 소리 안 듣게 내가 무조건 약속한다”고 하셔서 드디어 도전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물론 처음엔 잘 안됐다. 불안하더라. 내가 이 정도는 해줘야 보는 사람들이 느낄 텐데 덜어내도 될까 싶었지만 <38사기동대> 작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강약을 표현해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후 드라마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에서 유제원 감독님과 작업할 때도 지문에 쓰인 표현을 꼬아서도 해보고 반대로도 해보고 자유자재로 표현해봤다.
<늑대사냥>을 통해 이전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배역이 들어오기를 기대한 것도 있나.
= 감사하게도 감독님들이 나를 볼 때 로맨틱 코미디 이미지로만 보진 않는다. 실제 악역도 많이 들어온다. 악역은 타이밍의 문제였다. <늑대사냥> 시나리오를 봤을 때 온몸에 피가 튄 내 모습이 궁금했고 콤플렉스라고 여겼던 내 눈도 색다르게 표현될 것 같은 기대감이 컸다. 배우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한 캐릭터였다. 내 안에 이미 여러 개의 방이 있는데 방 하나가 더 생긴 셈이다. 그 방은 단칸방에 TV도 없고 휑했지만 종두 덕분에 소파도 생기고 사람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방이 됐다. 로맨틱 코미디의 방은 이미 대저택으로 꾸며놨다. (웃음) 이제 종두가 있는 방도 대저택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든다. 연기를 시작한 10년 전에는 어떤 드라마든 주인공은 한결같이 순수하고 지고지순했다. 이제 드라마에서도 선악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많잖나. 점점 장르가 다양해지고 캐릭터가 바뀌는 시점에 서 있는 기분이다. 색다른 장르의 다양한 캐릭터를 더 해보고 싶다.
MBTI의 파워 P답게 취미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다. 곧 콘서트도 열고 새 작품에도 들어갈 텐데. 바쁜 와중에도 지속하는 일이 있다면.
= 인터뷰 끝나자마자 바다가 보고 싶으면 바로 떠날 수 있는 P다. (웃음) 다이어트를 계속하고 있다. 이전에는 성수기 때 관리하고 비수기 때는 진짜 많이 먹었다. 몇년 전부터 일정 선을 두고 어느 정도 이상 몸을 불리지 않으려고 한다. 먹을 때도 머릿속으로 늘 다이어트 생각을 한다. 비수기 때도 내가 좋아할 만한 몸을 갖고 싶다. 나에게 집중하면서 더 지속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도 나에 관해 하나하나 잘 꾸며가려고 한다. 게임에서 경험치를 쌓고 장비를 늘리고 스킬을 더하는 것처럼 나를 키워나갈 예정이다. 여전히 나에게 엄격한 면이 있지만 사람들의 칭찬에 춤추면서 레벨업해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