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콜라를 마시던 여자가 커피를 주문하는 남성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남자의 앞에 커피 잔이 놓이자, 카메라는 크레마가 떠 있는 잔의 윗부분을 하이 앵글로 비춘다. 영화의 시선이 완전히 컵의 윗부분으로 옮아간 뒤, 내레이션 목소리가 읊조린다. “한없는 심연이 객관적 사실로부터 주관적 인식을 분리시킨다.” 이후 남자가 스푼으로 잔을 휘저으면, 작은 물결이 일어난다. 목소리는 이어진다. “의사소통이 실패할 때마다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여자는 낙담한다. 그렇게 설탕은 녹고, 커피는 소비된다. 이 세계를 둘러싼 소비의 괴물들, 이 영화의 이미지는 어쩌면 물질적인 세계 그 자체를 겨냥한 듯 보인다.
격변과 재분배의 에너지가 프티부르주아 사이를 관통하고 있었다
영화가 개봉되던 1967년 <카이에 뒤 시네마>는 장뤽 고다르와 평론가 장 나르보니의 대담을 실었다. 기사는 고다르가 도시에서의 삶을 매춘과 다를 바 없다고 평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영화 기획 당시에 고다르는 숫자로 표시되는 앙케트 조사 방식의 기사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1966년 어느 주간지에 실린 ‘파리 외곽 주택 단지의 삶’을 다룬 기사를 통해 그는 처음 영화의 내용을 떠올렸다. “어떤 수준에서든, 어떤 계층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여성은 자신을 매춘하거나 매춘의 법을 연상시키는 법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고다르는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신도시의 공장 노동자들은 일상의 4분의 3을 자본주의에 저당 잡혀 생활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며 보수를 받는다는 측면에서, 은행원이나 우체국 직원, 영화감독도 다를 바가 없었다.
“현대사회에서의 매춘은 정상적인 상태이다”라고 고다르는 결론지었다. 다소 황폐한 비유처럼 들리지만, 1960년대 후반의 프랑스는 68운동이 터지기 직전의, 민감한 기류가 지배하고 있었다. 겉으로 단단해 보이는 다양한 사실들이, 곧 무너질 수도 있다고 당대의 예술가들은 직감했다. 격변과 재분배의 에너지가 프티부르주아 사이를 관통하고 있었다. 고다르는 이를 매우 구조적인 측면에서 바라봤던 것 같다.
객관적인 숏들을 나열하며 그는 당대 사회의 분위기를 고발했다. 책과 잡지, 포스터, 휘발유 펌프, 맥주 레버, 심지어 슈퍼마켓에서 구매한 생활용품들이 차례로 등장해 신도시의 형상을 그린다. 그 사이에 세차 장면이 끼어든다. 자세히 보면 앞선 커피 잔 장면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장면은 몽타주되어 있다. 세차장 전체의 광경이 잡히고, 하이 앵글로 자동차가 드러난 뒤, 숟가락을 대신해 세차 기계가 차를 어루만진다. 이후 자동차 보닛이 클로즈업된다. 하지만 명백하게 객관적인 숏들 사이로, 파편화된 짧은 숏 하나가 침입하며 모든 세계관은 흔들린다. 마치 커피 잔에 담긴 거품처럼, 철판 뚜껑의 그림자가 움직인다. 열정적 혁명의 순간처럼, 이미지의 반란이 시작된다.
이 영화의 구조적인 창작 방식은 이후 고다르 정치영화 전반에 반영된다. 비견컨대 누벨바그 시기의 ‘시의 영화’ 같은 분위기는 이후 그의 영화에서 찾을 수 없다.
그는 더 근원적인 영역으로 이동해 ‘정치’라는 키워드를 내세우기 시작한다. <중국 여인>이 대표적이다. 고다르는 더이상 일상을 조망하지 않는다. 마오쩌둥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자본주의를 탐구하면서 그는 (객관적인 사물이 아니라) 객관적 원칙의 적용을 논의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기 위해 몇 가지의 물리적인 장치를 사용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색채 사용이다. 붉고 푸르고 노란 세 가지 색깔이 상수가 되어서, 영화의 중심에 놓인다. 그리고 그 위로 밀도 높은 대사들이 추가된다. 공산주의와 미국의 정치 상황, 사회주의에 대한 단어들이 전투적으로 등장한다. 만일 누군가 이 영화가 급진적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순전히 정치적 대사 탓일 것이다.
색채와 이론의 나열, 이 두 가지 방식을 통해 고다르는 자신이 추앙하던 유토피아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주관적인 이미지들을 등장시킨다. <중국 여인>에서 주관성의 영역은 팝아트적인 콜라주 화면이 맡고 있다. 어쩌면 장난기 넘치는 내면의 발로일 수 있지만, 계속해서 고다르는 자신이 생각한 느낌을 표현한다. 이처럼 객관성과 주관성의 두 가지 원리가 부딪히면서, 영화의 세 번째 교차 지점이 나타난다. <중국 여인>에서 정반합의 장소는 기차 내부가 된다. 양립하던 모든 요소들이 이곳에서 모순을 일으킨다. 안 비아젬스키가 연기하는 여대생 캐릭터는 철학자 프랑시스 장송을 만나서 꽤 긴 토론을 펼친다. 이 아름다운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탐색하던 이데올로기의 결말은 마침내 제삼자의 입을 통해 정리된다. 아무리 이상적인 의견이라도, 테러리즘과 같은 극단적인 주장은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그녀는 수긍한다. 그리고 마침내 네 번째 단계에 도달한다. 이 부분은 순전히 관객의 몫이다. 고다르의 정치영화는 결론을 포함하지 않는다. 객관적이고 주관적으로 고려된 전반적 인식의 틈 사이에서, 관객은 모순된 상황을 스스로 논의해야 한다.
일련의 실험 이후, 고다르가 자신의 명시적인 변화를 표시한 것은 1969년에 이르러서다. 장피에르 고랭과 함께 고다르는 ‘지가 베르토프 그룹’을 결성한다. 그룹의 명칭은 1920년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영화의 창작법에서 빌린 것으로,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에 비견되는 베르토프의 자기 반영적인 사고방식이 그들의 출발점이었다. 그렇지만 소비에트 영화감독들과 달리 고다르와 고랭은 ‘집단창작’을 추구했다. 이 때문에 그룹의 색채가 브레히트적인 것으로 변한다. 연출자의 이름은 익명이 되었고, 그룹의 명칭이 전면에 등장했다. 당시 고다르는 스스로를 작가(auteur)가 아니라 활동가(militant)라 칭했다. 전문적인 혁명가가 되어서, 더 많은 활동가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집단의 목표였다. 이 과정에서 지가 베르토프 그룹은 “정치영화를 정치적으로 만들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그들은 기존 정치영화들을 타도하고자 했다. 특히 정치적 소재를 택해 습관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전문 연출가들을 비난했다. 심지어 몇몇 감독들에게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견학한다’며 혹평하기도 했다. 비견컨대 자신들의 영화는 이미 지나간 투쟁이나 승리한 파업의 광경을 제공하지 않는다면서, 기존의 영화 제작 방식과 선을 그었다. 그리고 최소한의 장비와 비용으로 ‘어떻게’ 영화를 만들고 표시할 수 있는지를 알리려고 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분배보다 생산에 더 집중했다. 그런 면에서 지가 베르토프 그룹의 활동은 발터 베냐민의 ‘생산자로서의 저자’ 개념과 맞닿아 있었다. 전투적인 방식으로 가장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는, 그의 생각과 작업 방식을 그들은 지지했다.
여러 차례 자신들의 행적을 이론화할 것이라 말했지만, 지가 베르토프 그룹은 활동이 마무리될 때까지 자신들의 책자를 발간하지 못했다. 그룹 해체 이후에 고랭은 “우리는 일정 수의 이론적인 텍스트를 작성해야만 했다”라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집단의 슬로건은 명문화되었다. 영화를 통해서였다. 이들은 ‘칠판’에 문장을 적었고, 가사가 붙은 ‘노래’를 합창했다. 가끔 슬로건이 수정될 때도 있었다. 당연한 과정이었다. 지가 베르토프 그룹은 (레닌의 에세이와 동일한 제목인)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집중해서, 영화를 만들면서 스스로 답했고, 때로 실수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자아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대다수 관객이 지가 베르토프 그룹의 영화들을 접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당시 고다르는 보여주기 위한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물론 우연한 걸작도 탄생하지 않았다. ‘사악한 의사소통의 천재’라는 별명을 안고서, 그는 전투적이고도 의도적으로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은밀하게, 악의적이면서 아이러니하게, 진심을 다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과는 있었다. 당대 정립한 창작의 원칙이 향후 그의 영화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영화의 역사(들)>로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이 조금씩 감지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가 베르토프 그룹의 해체 즈음에, 고다르는 <만사형통>의 작업을 시작한다. 아직 집단창작 활동이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그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심지어 영화에는 이브 몽탕과 제인 폰다라는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기용되었다.
<만사형통>의 시작부에서 고다르는 ‘그의 가장 상업적인 작품’라고 불리는 <경멸>의 상황을 인용한다. 주인공은 프랑스 영화감독과 미국인 저널리스트 부부로, 이들은 노조가 장악한 파업 현장에 잠입한다. 처음에 남자주인공은 상업적인 프로덕션 작업에 수긍하지 못하는 ‘좌파 영화감독’으로 설정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변화한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파업을 목격하며, 생존을 위해 기꺼이 스타킹 광고를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뀐다. 아내의 변화도 흥미롭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전부 말로 바꾸어 표현하는 인물이었지만, 본 것을 전부 말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의 불화를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불화와 연결해서 이해한다. 이 변화의 과정을 고다르는 트래블링숏을 이용해서 보여준다.
영화를 본 관객 다수가 기억하는 두 가지 카메라의 움직임이 있다. 하나는 벌통처럼 분리된 공장 내부를 탐색하는 가로와 세로의 트래킹숏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이어진 슈퍼마켓의 계산대 사이를 오가는 수평의 트래킹숏이다. 둘은 상반되면서도 비슷하다. 전혀 다른 사람들을 비추지만, 동일한 ‘과정의 형상’을 포착한다. 영화 제작을 포함해 모든 사회적 생산 과정이 구조적으로는 동일한 형태임을, 고다르의 카메라는 말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그의 미장센은 정치적 비전을 포함한다. 어떠한 도발적인 문장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설득의 언어가 이 과정에서 전해진다. 여전히 고다르에게 트래블링은 모럴의 문제임을 작품은 다시금 일깨운다.
1973년 고다르는 안느 마리 미비유와 함께 파리에서 그르노블로 터전을 옮겨 ‘소니마주’를 설립했다. 당시 미국과 유럽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이러한 협동조합 형태의 비디오 프로덕션 설립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텔레비전의 전체주의적인 점령에 맞서서, 예술가들은 발빠르게 변화를 시도했다. 사회적인 혁명이기도 했지만, 예술가로서의 사명이기도 했다. 고다르는 이후 비디오 작업을 통해 설치미술에 발을 들였고, 당시에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텔레비전은 망각을 제조하는 반면 영화는 기억을 제조한다.” 그의 비디오 작업은 영화관에서 상영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영화를 위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충분히 전투적인 자세로, 고다르는 시스템을 벗어나는 비디오에 대한 폭로를 진행했다. 그는 경제적인 목표로 움직이는 산업 전체를 겨냥했다. 이미지가 생성하는 시간의 의미, 영화가 새겨놓은 기억의 아카이빙을 고다르는 비디오 작업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생각해보면 필름에서 시작된 고다르의 여정은 숏과 내러티브 연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정치영화로의 투쟁, 비디오 작업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장치’에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 몽타주와 재생 속도, 이미지의 대립과 화해가 향후 그의 주된 관심사로 떠오른다. 고다르의 관심사는 이미 시네마를 벗어났다. 숏으로서의 의미 단위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에 이미 그의 작업은 숏보다 ‘이미지’라는 단위를 언급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수준이 된다. 시의 순수함, 어쩌면 이 표현은 고다르가 그토록 열렬하게 추종한 이미지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은 더이상 낭만적이지 않았지만, 이미지의 순수함을 포괄하고 있었다. 고다르는 비디오를 통해 이미지를 촬영했고, 연결했고, 인식했고, 어느 순간에 멈추었으며, 댓글을 추가했고, 다른 것을 생각하며, 또 다른 것을 생각해냈다. 1983년 12월, 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와의 인터뷰에서 고다르는 “영화가 당신과 함께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삼단논법으로 답한다. 첫째, 그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희망이다. 둘째, 그것은 나에게 삶의 목적을 제공한다. 셋째, 나는 어렸을 때 영화가 영원하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내가 영원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고다르는 죽는 날까지 비디오 스크롤을 멈추지 않았고, 시시포스가 그러하듯 빛의 본질을 향해 다가갔다. 시네마는 영원한 진리라고, 우리 내면에 살아 있는 고다르를 바라보며 되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