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주목받지 못했던 국가의 빛나는 작품들이 많다.” 박선영 아시아 프로그래머는 중화권과 인도, 중앙아시아 지역의 영화를 담당하고 있다. 작년 21세기 중국영화의 특징을 살피는 ‘중국영화, 새로운 목소리’ 특별전을 진행한 후 올해는 인도와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지역의 영화들에 좀 더 힘을 쏟았다. 박선영 프로그래머가 엄선해온 작품 면면을 살펴보면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작품들 최대한 다양하게 소개하겠다는 의지로 찾아온 보석 같은 작품들로 즐비하다. 발굴과 탐색, 그리고 새로운 만남이라는 의미에서 진정 영화제이기에 즐길 수 있는 소중한 경험들이 스크린의 바다에서 당신을 기다린다.
-올해는 중국영화의 편수가 확실히 줄어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부산뿐 아니라 전 세계 영화제에서 중국영화가 적어진 게 사실이다. 정치적인 영향도 있을 것이고 출품작의 완성도에도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는 걸로 보인다. 올해 부산에 출품된 작품 편수 자체는 작년과 거의 비슷했는데 최종적으로는 제작사의 요청으로 빠진 작품들이 꽤 있다. 중국영화의 변화에 대해서는 좀 더 후일에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부적으로는 일단 작년에 중국영화 특별전을 크게 했기 때문에 올해는 다른 지역의 영화들을 좀 더 다양하게 소개해보고자 했다. 권역 별로는 아무래도 영화계의 규모가 있다 보니 인도영화가 꽤 많다. 그 밖에 중앙아시아 지역의 영화들을 최대한 다채롭게 소개하고자 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변화와 경향을 소개해주신다면.
=올해는 재미있었던 게 전통적으로 중앙아시아 영화의 강국인 카자흐스탄 외 다른 국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보통 카자흐스탄 영화가 많이 선정되고 다른 지역은 나라마다 한두 편이 나오는 정도였는데 올해는 키르기스스탄의 영화 중에 재미있는 작품이 많았다. 가령 아이벡 다이르베코프 감독의 <쑥의 향기>는 단연 올해의 발견이라고 할 만하다. 일단 완성도가 매우 높다. 아름다운 영상미를 바탕으로 이제 막 사춘기를 겪는 소년들의 크고 작은 감정의 파도를 사려 깊게 담아낸 영화다. 원래 뉴 커런츠에 선정하려고 했는데 조건이 맞지 않아 ‘아시아영화의 창’을 통해 소개한다. 탈라이벡 쿨멘데브 감독의 <집 팝니다>도 주목할만하다. 젊은 부부가 겪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통해 키르기스스탄의 현재를 잘 묘사하고 있다.
-올해는 큰 상영관에서 만날 수 있는 아시아 지역 영화들도 많아졌다.
=야심 차게 시도했는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다. (웃음) 우선 파키스탄의 사임 사디크 감독의 데뷔작 <조이랜드>가 있다.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종교적인 억압과 가부장제에 억눌린 여성이 자신의 길을 발견해나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데뷔작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단단한 영화인데, 첫 장면부터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다. 메시지 뿐 아니라 드라마틱한 이야기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거로 생각한다. 오픈시네마 야외극장에서 소개되는 작품도 두 편이나 있다. 둘 다 인도영화다. 로케쉬 카나가라즈 감독의 <비크람>은 두말할 것도 없는 스펙터클 화제작이다. 프로그램노트에 “2022년 <탑건>에 톰 크루즈가 있다면, <비크람>에는 카말 하산이 있다”고 썼는데 농담 아니다. (웃음) 또 한 편의 인도영화는 파드마쿠마르 나라시마무르티 감독의 <맥스와 민, 그리고 미야옹자키>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을 딴 고양이를 둘러싸고 인물들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영화다. 가족들과 함께 와서 가을밤 따뜻한 행복을 안고 가실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한다.
-올해는 특히 게스트가 풍성하다고 들었다.
=코로나로 막혀있던 것들이 한 번에 분출되는 느낌이다. 올해 30여 편 내외의 작품을 선정했는데 대부분 감독님이 오신다. 게스트 없는 영화는 딱 2편뿐이다. 그나마 개봉 일정이 겹치는 등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못 오는 거다. 덕분에 일정이 집행위원장님 급으로 많아졌다. (웃음) 몸은 고되겠지만 만남의 장으로서의 영화제가 지닌 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다. 이 열기가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래도 그 중심에 양조위 특별전이 있을 것 같은데.
=아, 양조위.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다 풀어놓을 수가 없다. (웃음) 언젠가 부산에서 꼭 모셔야 하는 위시리스트가 있는데 그중 한 분이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개봉 이후 다시 뜨거워진 부분도 있어 일단 시도나 해보자는 기분으로 작년 연말에 조심스럽게 타진했더니 너무 흔쾌하게 수락해주었다. 답이 온 게 12월 31일이었다. 너무 기뻐서 소리 지르면서 남동철 수석 프로그래머에게 알렸는데, 반응이 시큰둥한 거다. 10개월이나 남았는데 진짜 와야지 오는 거 아니냐고. (웃음) 그 말처럼 그때부터 올해 내내 기도하는 심정으로 체크하면서 기다렸다.
-양조위 배우가 직접 뽑은 작품들도 흥미롭다. 설마 <동성서취>(1993)를 뽑을 줄은 몰랐다.
=본인이 작품을 고를 수 있다는 걸 제일 좋아했다. 원래 8편의 작품을 골라주었는데 저작권 문제로 빠졌다. 하나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였고 다른 하나가 <비정성시>(1990)였다. <비정성시>의 경우엔 디지털 리마스터링이 나온다는 소문이 무성했는데 수소문 끝에 저작권을 가진 분을 찾아서 접촉했다. 실제로 리마스터링을 준비 중이라며 상태가 좋지 않은 필름 버전으로 다시 틀고 싶지 않다고 거절하셔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올해 아시아 영화들을 즐길 수 있는 팁을 하나 준다면.
=올해는 거의 모든 영화에 게스트가 있으니 GV와 함께 보시면 생생한 목소리들을 들으실 수 있을 거다. 무엇보다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들을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꽤 많은 영화가 영화제 이후 일반 상영관에서 개봉하겠지만 중앙아시아나 인도영화들은 국내에서 다시 만나기 어렵다. 그렇다고 어렵거나 낯설기만 한 것도 아니다. 질적으로도 우수한 작품들이 많고 정치적 격변을 겪고 있는 지역의 영화들은 어떤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완전히 정상화되는 건 3년만인데, 진짜 부산다운 영화들을 많이 발견하고 만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