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의 변수에 대처하고 매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며 영화제의 미래를 모색해야 하는 어려운 시기, 허문영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위촉된 지 1년 반이 지났다. 기자회견 자리에서 그가 강조했던 “3년 만의 완전 정상화”는 영화제 곳곳에서 증명되고 있다. 올해는 거리두기 없이 극장 좌석을 100% 개방하고 축제 분위기를 달굴 국내외 게스트 초청에 총력을 기울였다. 아시아필름아카데미· 아시아시네마펀드· 플랫폼 부산 등 아시아 영화 지원 프로그램과 연구자들의 교류 및 교육을 위해 출범했던 포럼 비프도 재개된다. 또한 그는 가치 있는 영화예술을 발견하는 전통적인 역할과 변화를 수용하는 열린 태도를 모두 강조했다.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는 동시에 과거와는 다른 영화제의 면면을 예고한 허문영 집행위원장을 개막 하루 전 만났다.
-한 번의 영화제를 치렀고 또 한 번의 영화제 개막을 하루 앞두고 있다. 지난 시간에 대한 소회는.
=한 개인으로서 말씀드리자면 부산국제영화제는 내게 너무 크다. 그래서 한 눈에 잘 안 들어온다. 지난 2년 간 축소 운영을 했을 때와 달리 정상화된 영화제는 개인의 리더십으로 잘 운영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라는 것을, 조직적 역량 혹은 시스템이 강화되지 않으면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느낀 시간이었다.
-영화제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는 체감을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축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일단 영화의 전당 일대 공간 구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핵심 과제 중 하나였다. 관객이 가장 짧은 동선으로 영화를 보고, 사람들과 만나고, 한숨 돌리면서 쉬고, 먹거리까지 해결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이를테면 KNN과 영화의 전당 사이 푸드 코트가 다시 들어선다. 지역 주민은 물론 많은 관광객이 찾는 해운대에서는 동네방네비프 스크린을 설치해 영화를 상영한다. 쉼터도 따로 마련했고, 매일 인디밴드나 스트릿 뮤지션의 공연도 열린다. 부산시 16개 구·군에서 동시에 열리는 동네방네비프는 지역 주민들을 고려한 상영 이벤트다. 아마 축제 분위기를 가장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은 10월 7일 오후 5시 야외극장에서 열리는 양조위의 오픈토크가 되지 않을까. 무제한 입장이 가능한데 지금 분위기를 봐서는 5천명 이상이 몰릴 것 같다.
-양조위는 언제나 최고의 스타였지만, 3년 만에 영화제가 정상화되는 상징적인 해에 그를 초청한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 나오는 순간 이 분을 빨리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떤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역량을 일생에 걸쳐 보여줬다. 양조위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으면서 동시에 깊다. B급 장르영화부터 <비정성시> <씨클로> <화양연화> <색, 계> 등 20세기와 21세기를 빛낸 걸작들,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 영화까지 아우르는 필모그래피는 전 세계를 통틀어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삼십 년 넘는 시간 동안 모든 종류의 빛을 다 보여준 거의 유일한 배우가 아닐까. 지난해 영화제가 끝난 후 바로 섭외에 들어가서 비교적 빨리 답을 받았다. 기쁜 소식을 감추고 공개하기까지 기다렸다.
-예상보다 반응이 더 뜨겁더라. 10여년 전 <일대종사>로 내한했을 때와는 또 다른 세대가 열광했다.
=초세대적인 스타 같다. 양조위는 우리 세대 배우이기 때문에 젊은 관객의 관심은 덜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젊은 세대의 반응이 너무 폭발적이라 약간 놀라고 있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의 영향도 있겠지만, <중경삼림> <화양연화> <2046> 등이 리마스터링되면서 재개봉한 왕가위 영화가 새로운 팬층을 만든 것 같다.
-양조위 외에 꼭 초청하고 싶었던 게스트들이 있나.=당연히 알랭 기로디다. 누구보다 창의적인 예술을 한다. 현존하는 최고의 감독 다섯 명을 뽑으라고 하면 무조건 포함시킬 것이다. 1월부터 초청 작업을 시작했는데 2월에 답이 왔다. 그렇게 양조위와 알랭 기로디의 내한이 일찌감치 확정되면서 매우 만족스런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했다. (웃음) <리바이어던>과 <인체해부도>를 만든 베레나 파라벨, 루시엔 카스탱-테일러 감독도 만나기 쉽지 않은 분들이니 꼭 주목해주셨으면 좋겠다.
-다른 영화제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된 이후에도 온라인 상영을 겸하기도 하는데, 부산국제영화제는 관객 대상 스크리닝을 100% 오프라인에서 진행한다. 역시 영화 감상의 근간은 극장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일까.
=영화제마다 다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온라인 상영에 대한 의견도 다를 수 있다. 온라인 상영은 가능한 제한하고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 부산국제영화제의 입장이다. ‘필름 페스티벌’에서는 필름도 중요하지만 페스티벌도 중요하다. 페스티벌은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나누고 공감하는 장이다. 그렇다면 필름 페스티벌은 관객이 극장에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는 체험을 공유하는 이벤트가 되어야 한다.
-올해 특별기획 프로그램으로 ‘일본 영화의 새로운 물결’과 ‘21세기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시선’이 열린다.
=21세기 초 청춘 영화들이 대세를 이루면서 젊은 감독의 특출한 작품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10년의 침체기를 거친 후 2010년대에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 선두에 있던 하마구치 류스케가 지난해 영화제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다. 당연히 ‘포스트 하마구치는 누구냐’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실제로 부산국제영화제는 재능 있는 일본 감독들이 많이 나왔다는 것을 확인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미야케 쇼 감독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뒤를 이을 만한 재목이라 할 수 있다.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의 이가라시 고헤이 감독도 눈여겨볼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서른 살이 된 기요하라 유이 감독의 앞날이 굉장히 기대된다. 영화제에서는 그가 스물일곱 살에 연출했던 <우리 집>을 튼다. 그리고 20세기와는 다른 발상으로 만들어진 21세기의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같이 모아놓고 보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결정적인 계기가 된 작품은 <리바이어던>이다.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21세기에 접어 들면서 위대한 영화들과 다큐멘터리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주어진 것을 찍는다’는 홍상수의 태도에는 매우 다큐멘터리적인 발상이 담겨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평생에 걸쳐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놓고 고민하며 수많은 걸작을 만들었다. 알베르트 세라, 켈리 라이카트도 다큐멘터리적인 태도로 영화를 찍는다. 21세기 다큐멘터리를 주제로 영화평론가 장-미셸 프로동이 기조 발제를 하고 국내외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포럼도 진행한다. 21세기의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는 어떻게 영감을 주고받는가,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영화사 전체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으로 마련한 자리다.
-방금 켈리 라이카트의 이름이 언급돼서 드리는 질문인데, 왜 <쇼잉 업>은 초청이 안 됐나.
=우리가 노력을 안 했을까. (웃음) 굉장히 공을 들이고 막판까지 애를 썼는데도 안 된거다. <쇼잉 업>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갔는데도 국내에서 수입한 곳이 없었다. 수입사가 없는 작품은 초청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메이저 대형 제작사 작품이 아닌 경우도 수급이 어렵다. 올해 가장 슬픈 일 중 하나가 켈리 라이카트의 <쇼잉 업>을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영화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발생한 이슈들이 있었다. 예매권 결제 오류로 혼란이 빚어져서 상영 추가 등의 후속 조치를 취했고, 영화제 폐막 직후 열리는 BTS의 콘서트 때문에 부산 지역 숙박비가 크게 상승했다.
=조금씩 다른 차원의 문제들이다. 예매권 결제 오류는 대행사의 관리 책임이 영화제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 3년 만의 영화제 정상화를 위해 일의 감각을 다시 되찾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이 발생한 것 같다. 우리 나름의 보완책을 최선을 다해 마련했지만 비난이 지속된다고 해도 감수해야 할 문제다. BTS는 영화제와 무관한 외부의 요인이다. 코로나19라든지 태풍이라든지 온갖 것들을 경험하다 보니 이런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웃음) 예측 불가능성이 큰일들이 계속 벌어지지만 영화제 일정을 갑자기 옮길 수도 없는 문제다. 영화제는 마치 어려운 고차방정식 같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공간에서 열흘 안에 해결해야하는데 새로운 변수까지 들어온다. 이런 숙제를 해내는 데 보람을 느끼는 사람도 소모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Asian Contents & Film Market, ACFM)에서 부산스토리마켓이 신설됐다. IP가 아닌 ‘스토리’로 명명한 이유가 궁금하다.
=우선 딱 들었을 때 IP보다 직관적이라 즉각적인 호소력이 있다. 또 스토리는 영화 제작에서 통용되는 용어다. 모든 영화 제작은 스토리에서 출발하고, 스토리를 사고 파는 과정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게 자연스럽게 설득된다. 다소 전문적이고 산업적인 E-IP보다는 일상적이고 만드는 사람 입장에 가까운 스토리라는 표현을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스토리와 관련된 모든 업체와 개인이 모이는 장이 될 예정이다.
-ACFM은 ‘콘텐츠와 필름’을 포함한다. 지난해 온 스크린 섹션을 신설하며 시리즈도 상영하기 시작했다. 영화와 드라마, 웹툰을 모두 콘텐츠라는 카테고리로 묶는 시대에, 집행위원장으로서 그리고 있는 영화제의 미래가 궁금하다.
=전체적인 방향을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순수한 전통의 편에 서기보다는 불순함과 오염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영화가 콘텐츠라고 불리는 것에 불쾌함을 표하는 분들도 있다. 일리 있고 존중 받을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부산국제영화제처럼 젊은 영화제는 이와 반대편에서 뒤섞이며 불순해지는 것,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 전통적 개념이 손상되는 것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즐겨야 된다고 생각한다.
-시네필을 만족하는 전통적인 기능, 스타들의 참여로 견인되는 화제성, 동네방네 비프와 같은 지역 축제로서의 정체성 중 우선순위나 비중을 놓고 고민할 때가 있을 것 같다. 혹은 발상의 전환을 통해 부딪치지 않고 같이 갈 수도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같은 거대 영화제는 최소 쓰리 트랙 정도의 전략을 써야 한다. 원 트랙 전략을 쓰면 그 하나를 지키는 것조차 실패한다. 각자가 서로에게 필요한 트랙이 되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얘기할 수는 없다. 동네방네비프와 같은 수평적 확산을 위한 전략은 지역 커뮤니티의 문화적 잠재력을 확산하고 능력을 발굴하자는 취지를 위해 앞으로도 계속 중요하다. 영화 예술을 위한 중심부 전략을 위해서는, 이를테면 내년에 켈리 라이카트를 초청해야 한다. (웃음) 다른 국제영화제에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보석 같은 작품과 감독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당연히 지속해야 한다. 그리고 스펙타클 없는 축제는 없다. 스펙타클이 참여자들을 만족시키면 그 만족감이 대중적 지지의 바탕이 되고 재정과도 연관이 된다. 여기에 우선순위는 없다. 모든 트랙을 붙들고 해내지 않으면 영화제는 조금씩 위축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