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장진과 수다 패밀리 [2] - <묻지마 패밀리> 배우 7인방
2002-05-31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정진환
수다의 맨파워, 여기 있수다

신하균

신하균이 쑥스러워한다. “교복 입고 어린 학생들 사이에 끼어 있으니까 꼭, 삼십대 아저씨 같아서… 참….” <묻지마 패밀리>의 첫 번째 이야기 <내 나이키>에서 꼬마들 돈을 뺏는 불량학생으로 출연한 것이 못내 부끄러운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부끄러울 것 같았던 장면을 말할 때는 오히려 대범하다. 연상의 유부녀 방은진과 이곳저곳 부딪치는 격렬한 키스를 아주 오래 나누는 <사방에적>의 호텔장면을 “NG가 거의 없이 금방” 찍었다고 한다. 자주 터져나오는 웃음으로 자기를 덮는 듯하면서도 묻는 사람이 무안하도록 천연덕스럽기도 한 그는 만날수록 재미있어지는 배우다.

신하균은 생각보다 길어진 <서프라이즈> 촬영이 끝나자마자 <지구를 지켜라> 촬영에 돌입했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그가 연기하는 인물은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점찍은 인물을 체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열혈 청년. <복수는 나의 것> 촬영을 결정하고 며칠 뒤에 받은 시나리오가 너무 마음에 들어 아쉬웠는데, 인연이 닿았는지 올해 다시 한번 시나리오가 들어와 “옳다구나” 하고 결정해버렸다. “딱히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정말 기대를 많이 하는 작품”을 찍고 있고, <복수는 나의 것> 때 기력이 달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빠졌던 살도 원래대로 돌아와 기운이 넘치는 신하균. 정말 지구를 지켜도 될 것 같다.

류승범

길지 않았던 모처럼의 휴식 끝에서, 류승범은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돈가방을 향해 몸을 날린 <피도 눈물도 없이>의 양아치를 거치고, 수개월 동안 몸담았던 드라마 <화려한 시절>을 마친 지 1달이나 지났을까. “크랭크인은 벌써 했는데, 첫 촬영분이 27일”이라고 <품행제로>의 시작을 알리는 말 속에 경쾌한 설렘이 감지된다. “영화도 익숙지 않은데, 처음 하는 TV 연기라” 힘들었지만, <화려한 시절>은 류승범에게 또 다른 배움터였다. 브라운관 사이즈에 처음 적응하면서 연기에 ‘오버’가 많다, 감각만으로 연기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진 감독이 세심한 조언을 준 <묻지마 패밀리>는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작업. 주먹으로 1등이 되고 싶은 <내 나이키>의 고교생, 이상한 손님들에게 시달리는 <사방에적>의 벨보이 등 역할은 전작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절제된 연기를 고민한 결과다.

류승범이 ‘수다’를 접한 것은 <다찌마와 리>에서 임원희를 만나고, 신하균과 친분을 쌓으면서부터. 그동안 매니저를 맡아온 김영일씨 독립에 따라 최근 적을 바꾸긴 했지만, “한식구란 생각만으로 힘이 됐던” 마음엔 변함이 없을 듯. “망가지는 역이 좋다”는 그의 앞에는, <품행제로>와 형 류승완 감독의 <마루치 아루치>의 시험장이 대기중이다.

정규수

70년대 말 <품바>로 세간에 등장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스무해가 넘도록 정규수는 연극무대에서 신뢰를 쌓아왔다. 극단 유의 창단 멤버인 그는 백상예술대상 인기상을 받았던 <문제적 인간 연산>을 필두로 <홀스또메르> <햄릿 1999>, 연희단거리패와 함께한 <우리 시대의 리어왕> 등 많은 화제작을 거치며 든든한 중견배우로 자리매김해왔다.

연극무대에서 공연자로 우연히 만난 장진 감독과의 인연은, <택시 드리벌>부터 <박수칠 때 떠나라>까지 그의 연극과 영화 전편을 함께하며 ‘수다’로 이어졌다. “아무것도 모를 때” 주연급으로 발탁됐다가 편집에서 많이 잘렸다는 <미스 코뿔소, 미스터 코란도>, <명자 아끼꼬 소냐>의 일본놈 앞잡이 이후 잊고 있던 영화를, 장진을 통해 다시 만난 셈. 스크린에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간첩 리철진>의 택시강도처럼 어리숙하면서도 익살맞은 그의 분신들은 유쾌한 웃음을 동반하곤 한다. 이문식과 짝을 이룬 <일단 뛰어>의 엉뚱한 도둑 커플도, 살수대첩을 온몸으로 설명하던 <내 나이키>의 국사선생님도 마찬가지. 가을에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각색한 <라쇼몽>, 겨울에는 장진의 신작 등 두편의 연극으로 무대에 선다

정재영

정재영에 따르면 <묻지마 패밀리>는, “친하지 않으면 못할 일”이었다. 이를테면 <사방에적>의 난투극. 정재영이 연기한, 여자친구를 죽이려는 남자, 킬러의 표적이 된 조폭 보스 등 제각각 다른 이유로 모텔을 찾은 이들이 슬로모션으로 뒤엉키는데, 카메라 트릭은커녕 콘티도 없이 한 쇼트로 찍었다. 배우들이 서로 치고 빠지는 호흡을 하나하나 맞추지 않으면 안 됐다는 얘기다. 정재영이 고삐리 깡패로 분한 <내 나이키>에서 류승범과 맞고 때리는 연기도 마찬가지. “어찌 보면 찍는 사람들이 더 즐거운, 이기적인 영화”라는 정재영은, 손발이 잘 맞는 촬영이 즐거웠던 흔적이 역력하다.

대학 선배인 장진 감독과는 <허탕>부터 함께 한 사이. <간첩 리철진>의 택시강도, <킬러들의 수다>의 솜씨좋은 킬러를 거치면서, 그는 '장진 패밀리'로 주목받아왔다. '수다'라 이름하기 전부터 오래동안 한 식구였던 만큼, "감독, 배우, 다른 파트의 일을 함께 지켜보며 언제든 얘기할 수 있다"고 장점을 꼽는가 하면 "모여있으면 주목은 받겠지만 각자의 발전을 위해 흩어질 줄도 알아야" 한다며, 열린 성격을 강조한다. 그 자신 역시 '장진 밖의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는 처음 주연급인 독불이를 맡아 섬뜩한 광기를 뿜어내기도. 하지만 그래선지 지금, 정재영은 차기작에 대한 고민이 더 많아졌다. “예전에는 한 작품이라도 더 해야 되는데, 였다면, 지금은 더 후퇴하면 안 되는데"로 고민의 종류가 달라졌기 때문. 아직 정해진 작품은 없지만, 서두르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문식

이문식은 스스로 ‘꼬인 인생’이라고 말한다. 막 상경한 대학 1학년 때 터미널 앞에서 사기당한 일을 비롯해 단 일년이라도 사고없이 넘어간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술 마시고 싸움 붙은 것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고 차마 말하기 힘든 ‘비하인드 스토리’도 한 보따리나 된다. 그는 “생긴 것 때문인지 살아온 게 그래서 그런지” <공공의 적>의 깡패 ‘산수’ 같은 역만 들어온다고 푸념하지만, 그의 지난 삶은 코믹하면서도 서글픈 그 인물들을 크로키처럼 잽싸게 그릴 수 있는 든든한 밑천이다.

재수 시절, 같은 학원 친구가 “탤런트될 수 있는 과”라고 해서 연극영화과에 들어간 이문식은 연극 <매직타임>으로 수다 패밀리와 인연을 맺었다. <달마야 놀자>의 해병대 출신 스님이 가장 비중있는 역이긴 하지만, 그가 없는 영화는 왠지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영화에서 특유의 에너지 넘치는 조연 연기도 선보였다. 그러나 마음 맞는 식구들과 소풍 가는 기분으로 찍은 <묻지마 패밀리>와 고집한 역을 따낸 <라이터를 켜라> 촬영이 끝난 요즘은 쉬고 있는 중이다. 지금쯤 자제하지 않으면 그저 쉬운 배우로 남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한 선배가 들려준 “처음 만난 남녀가 네 영화를 보고 마음이 통해 인연을 맺으면 성공한 영화”라는 말을 아직도 기억에 새기고 있는 그는, 천생 배우다.

임원희

임원희는 영화에서와는 달리 눌변가처럼 보인다. 그러나 말이 필요없는 카메라 앞에서는 ‘자세’가 달라진다. 짙은 눈썹에 힘을 주고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는 등 사진촬영을 위해 줄지어선 7명의 배우들 중에서도 ‘순간 연출’이 으뜸이다. “하여간 설정은 끝내주는” 사람이다.

“계산없이 같이 할 수 있고, 일종의 놀이 같은” <묻지마 패밀리> 현장에서는 피로를 몰랐다. 공부를 잘해보겠다는 일념으로 밤낮 책을 끼고 사는 <내 나이키>의 고지식한 학생이 되느라 촌스런 가발을 쓴 채 땀을 흘렸고, 바람난 아내를 감시하며 쓰린 가슴을 움켜쥐는 <사방에적>의 남편, <교회누나>의 카메오까지 단편 3편에서 임원희는 예의 심각한 얼굴로 웃음을 자아냈다. <묻지마…> 이후 한 가지 변한 것은, ‘수다’의 매니지먼트에서 떨어져나온 것. 어차피 “계약 때문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친한” 관계고, 행여라도 일 때문에 서로 불편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생각에서다. 요즘은 수중에 들어온 시나리오들을 보고 또 보며 항로를 탐색중이지만, ‘수다’에서 부르면 언제든 달려올 요량이다.

김일웅

김일웅은 “간신히 1/3 넘는 자의와 2/3 되는 타의”로 연기를 시작했다. 재수를 하고도 대학에 떨어진 뒤 후기대 시험장 앞에서 그냥 발길을 돌린 그의 집에, 친구가 사진까지 붙인 서울예대 원서를 들고 나타났던 것이다. “아버지, 일웅이가 여기 가면 참 좋겠네요”라는 한마디에 들어간 학교. 연기가 뭔지도 몰랐던 김일웅은 ‘만남의 시도’라는 동아리를 전공 공부하듯 열심히 들락거렸고, 선배인 장진 감독도 그곳에서 만났다. 수다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형이 불러주는 게 너무 고마워서” 딴 생각 안 했을 정도로, 그는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장진의 패밀리에 합류했다.

서른한살이 되도록 <간첩 리철진> <킬러들의 수다> 등에서 스쳐지나가던 그는 <묻지마 패밀리>의 세 번째 단편 <교회누나>에서 드디어 주연을 맡았다. 기차 창문 너머 누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죽도록 악을 쓰고 났더니 녹음팀은 모두 밖에 나가 있더라는, 황당한 경우도 있긴 했지만, 그는 바보처럼 어눌하게 나오는 이 영화가 좋았다. “만 스물아홉”이라고 우기는 앳된 얼굴의 그가 지금 찍는 영화는 “단순무식하고 버릇없는 양반”을 연기하는 . 몸이 힘들어도 이렇게 바빠 본 적은 처음이라 열심히 자기 최면을 걸며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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