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에덴>을 향한 시네필들의 열광과 봉준호 감독의 언급으로 국내 영화 팬들도 주목하는 시네아스트가 된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이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했다.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에 초청된 <스칼렛>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노르망디를 무대로 ‘백마 탄 왕자’ 클리셰를 뒤집는 동화의 재해석이다.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이 고수해온 영화 세계, 이를테면 아카이브 영상 활용이나 예술과 계급을 콜라주 하는 주제 의식은 여전하지만 따뜻하고 몽환적인 촬영과 뮤지컬 시퀀스의 등장은 그의 영화 세계를 새롭게 확장한다.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GV)가 끝난 후 열렬한 사인 요청에 응하다 인터뷰 룸을 찾았다.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그린의 단편 소설 <스칼렛 세일즈>(1923)의 영화화를 제안 받았을 때 원작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각색 과정에서 가장 많이 바뀐 부분도 궁금하다.
=<마틴 에덴> 개봉 후 프랑스에서 2년 동안 지낼 기회가 있었다. 그때 프랑스에서 다양한 제안을 받았고 그중 하나가 <스칼렛 세일즈>를 영화화하는 프로젝트였다. 원작 소설을 읽자마자 매료됐다. 시대물이지만 부녀의 관계라든지 다양한 가족 유형 등 현대인들도 공감할 만한 소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대적인 요소를 가미해 각색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백마 탄 왕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작은 시골에 있는 여자가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이야기였는데 그 콘셉트를 완전히 파괴했다. 영화의 줄리엣은 강인하고 단호하고 독립적인 여자다. 왕자가 오기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릴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공주를 구하는 왕자는 오늘날 존재하지도 않고 왕자의 존재를 믿는 이도 없다는 사실을 담고 싶었다.
-백마 탄 왕자 클리셰를 뒤집은 것을 감안해도 비행사 장은 첫 등장부터 너무 누추하게 묘사된다.
=극중 남성들은 강인하게 묘사되는 여성들보다 나약하게 묘사했는데, 오늘날 남성상을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신이 어디에 서 있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데 남성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한 현대 남성들의 모습을 장 캐릭터가 보여준다.
-<마틴 에덴>은 사회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무정부주의의 경계에 선 개인의 딜레마를 날카롭게 포착한 작품이었다. 반면 <스칼렛>은 훨씬 덜 정치적이고 동화적인 톤으로 만들어졌다.
=2년간 프랑스에서 지낼 때 무척 지쳐 있었다. <마틴 에덴>이 복잡한 층위를 갖고 있었다면, <스칼렛>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타락한 주인공이 몰락하며 끝나는 <마틴 에덴>과 달리 <스칼렛>은 좀더 희망적인 메시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를테면 시대극이지만 <피노키오>의 제페토처럼 헌신적인 라파엘은 오늘날의 아버지상에 가깝고 부녀 관계도 긍정적으로 그려진다. 무겁지 않고 보다 가볍게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요소도 넣었다. 그럼에도 사회 계층, 계급 갈등은 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 주제를 계속 다룰 것이다.
-줄리엣 역의 줄리엣 주앙은 원래 피아니스트였다. 연기 경험이 없던 그가 경쟁률 1000:1을 뚫고 오디션에서 발탁됐다. 줄리엣 주앙의 어떤 면이 줄리엣 캐릭터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더불어 줄리엣과 라파엘(라파엘 띠에리) 모두 극중 이름과 배우 이름이 일치하는데 의도한 부분인지 궁금하다.
=처음 배우 일을 시작한 줄리엣 주앙은 시네마에 의해 정형되지 않은 순수한 영혼 같았다. 그가 가진 강인함이 극중 캐릭터와 어울렸고 리허설 때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줬다. 그리고 캐릭터와 배우의 이름이 같은 건 특별한 의도가 있지는 않다. 원래 시나리오 상 이름도 줄리엣이었고 실제 내 딸 이름도 줄리엣이지만 줄리엣 주앙을 캐스팅한 것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 (웃음) 다만 원래 시나리오에서 라파엘은 다른 이름이었는데 별다른 의미 없이 배우와 같은 이름으로 바꾸었다. 라파엘 역을 연기할 배우를 찾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손 크고 체격이 크고 힘을 잘 쓸 것 같은, 시골의 전형적인 아버지 느낌이 나는 배우를 찾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베티 블루 37.2> <연인> <잉글리쉬 페이션트> <리플리> 등의 음악을 만든 가브리엘 야레 음악감독과의 협업으로 아름다운 선율들이 탄생했다. 이중 줄리엣이 노래하는 장면은 자크 드미의 <당나귀 공주>(1970)를 오마주한 게 맞나.
=저명한 작곡가와 협업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촬영 전부터 곡을 만들기 시작해 프로덕션 내내 함께 해줬다. 또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친분이 생겨 지금은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실은 프랑스에서 촬영한 영화지만 너무 프랑스 영화적인 느낌이 나지 않기를 의도했다. 프랑스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자크 드미의 영화가 연상될 순 있지만 의도한 바는 아니다. 오페레타를 각색해 영화화하는 자크 드미의 작품은 훨씬 복잡다단하기 때문에 <스칼렛>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특정 장면의 연출 기법이 다른 감독의 그것과 유사할 수는 있지만 영화 전체가 어떤 감독에 대한 오마주가 되는 건 개인적으로 지양하고 있다.
-<마틴 에덴>에 이어 또 한번 고전을 각색했다. 당신이 다른 영화감독에 비해 고전에 보다 관심을 갖는 이유가 무엇인 것 같나.
=원래 문학을 좋아한다. 그리고 픽션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든다면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데, 고전 작품에는 정말 좋은 이야기들이 많다. 만약 허구가 아닌 실제 인간의 삶과 사회를 담아내야 한다면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된다.
-전작만큼 비중이 큰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아카이브 영상을 적절히 활용한다.
=<스칼렛>에서 아카이브 영상을 많이 사용하진 않았지만 항상 갖고 있는 철학이 있다. 내가 찍은 영화가 완성되고 관객에게 보여지면 이 역시 아카이브가 된다. 어떤 영화를 만들어도 기록 자료가 된다. 그래서 시네마를 만들 때 아카이브 영상을 쓰는 일이 내겐 무척 자연스럽다.
-2년 전 전화 인터뷰로 만났을 때 자본으로부터 독립해 가능한 한 많은 파트를 통제하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전한 적이 있다. 제작 규모가 커지고 다양한 창작자들과 협업할수록 이는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가 될 수 있다. 어떻게 타협점을 고민하고 있나.
=나는 감독이기도 하지만 아키비스트이기도 하다.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왔고 지금 준비 중인 프로젝트도 다큐멘터리다. <마틴 에덴>과 <스칼렛> 사이에 <내일>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원래 다큐멘터리를 전공하고 다큐멘터리를 전공하다 극영화를 찍게 됐다. 과거의 경험이 극영화 연출에도 많은 밑거름이 된다. 저예산과 고예산 프로젝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작업을 오가며 다양한 영감을 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