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부산국제영화제]
#BIFF 6호 [기획] 마스터클래스 ‘노바디즈 히어로’ 알랭 기로디 감독,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에 조금의 보편성을 얹어라”
2022-10-11
글 : 이우빈
사진 : 박종덕 (객원기자)
부산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 <노바디즈 히어로> 알랭 기로디 감독

“내면에 깃든 고민과 세상이 관심 가질만한 주제를 잘 섞는 게 중요하다.” <호수의 이방인>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알랭 기로디 감독의 창작론은 개인의 취향과 관객의 요구 사이에 적절히 자리해 있었다. 10월10일 15시 KNN 시어터에서 열린 마스터클래스 ‘알랭 기로디: 창의적이고 희귀한 시네아스트의 낯선 세계’에서 알랭 기로디 감독은 미래의 영화인들에게 솔직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전문적인 영화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오직 영화에 대한 애정과 욕심만으로 현재에 이른 그의 영화 인생과 가치관은 마스터클래스에 모인 미래의 영화인들에게 뜨거운 영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영화를 처음 만들었던 때부터 이번 갈라 프레젠테이션에 초청된 <노바디즈 히어로>까지 자신의 창작 과정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설파하기도 했다. 진행자로 나선 허문영 집행위원장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감독 5명 중 한 분을 모셨다”라고 알랭 기로디 감독을 소개하며 마스터클래스를 시작했다.

-허문영/ 영화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나.

=알랭 기로디/ 11살, 12살쯤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외딴 시골에 살았으니 극장엔 못 가고 TV로만 영화를 봤다. 서부극을 제일 좋아했고 타잔 시리즈나 기사도 영화, 흔히 좌파영화라고 하는 사회정치 영화도 즐겨 봤다. 판타지 영화 중에선 꿈과 관련한 주제로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내용을 좋아하곤 했다. 잉마르 베리만, 장 르누아르, 로베르 브레송 그리고 존 포드를 발견하면서 영화 보는 눈이 조금 뜨이기도 했다. 당연히 영화를 만들고도 싶었지만, 쉽게 엄두는 못 냈다. 제작 과정이 너무 복잡해 보였고 파리나 도시로 나가서 전문적으로 배우기에는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주 나중에나 사회 상류층이 되면 만들 수 있겠단 생각이었다. 먼저 도전한 건 소설이었는데 출판사에선 영 반응이 없고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내가 봐도 정말 별로더라. (웃음) 그래도 계속 글을 쓰면서 도전하는 와중에 문득 내가 쓰는 게 소설인지, 희곡인지, 영화 시나리오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첫 단편영화에 도전하게 됐다. 프랑스의 제작 지원 사업에서 재정을 지원해주고 기술부나 배우들을 연결해주기도 했다. 대학교 기숙사의 야간 경비원으로 일할 때라서 내 돈도 보탰다. 그런데 첫 단편은 인기가 전혀 없었고 영화제에 초청받지도 못했다. (웃음)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영화로 먹고살게 됐다.

- 허문영/ 영화에서 도시를 거의 등장시키지 않았다. 전작 <스테잉 버티컬>에 잠시 도시의 모습이 나오긴 하지만 주된 무대는 시골이다. 그런데 이번 <노바디즈 히어로>는 도시가 주 배경이다.

= 알랭 기로디/ 내가 잘 아는 세계를 영화에서 다루려고 한다. 유년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으니 당연히 도시보다는 더 친숙하다. 또 내가 영화를 시작한 90년대 프랑스 영화는 거의 파리의 모습만을 비췄고, 다른 나라의 영화도 대체로 아파트나 도시가 주 배경이었다. 난 그런 것보단 어릴 때 봤던 서부 영화의 드넓은 평야, 먼 곳의 지평선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편으론 정치적인 이유도 있다. 사회 계급적인 편향으로 인해서 영화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농부나 시골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단 생각이다. <스테잉 버티컬>에 나온 브레스트도 일반적인 도시는 아니다. 세계대전 때 도시가 완파되어 미국식의 직선적 건물이 자리 잡은 곳이라서 정치, 역사적인 뉘앙스가 깃들어 있다. 마찬가지로 <노바디즈 히어로>의 배경 클레르몽페랑도 중세시대의 종교적인 맥락부터, 깊은 역사를 지닌 프랑스의 심장 같은 곳이다. 이렇게 역사성이 깊은 곳에서도 프랑스 사회의 테러리즘이 아무렇지 않은 듯 만연하게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울 것 같았다.

- 허문영/ <호수의 이방인>은 한국에서도 개봉했고 세계적으로도 흥행했다. 그 이후에 영화 제작 여건이 좋아졌다고 들었는데, 그런데도 영화 규모를 더 키우지 않고 저예산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 알랭 기로디/ 가장 큰 이유는 내 역량 문제다. 광범위한 서사, 구도의 묘사나 대규모 프로덕션을 진행하기엔 아직 부족하다고 느낀다. 이전에도 역사물이나 SF장르에 도전하다가 중도 포기하고 각본 작업도 마치지 못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당연히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도 크다. 어떤 영화감독이든 두 가지 갈림길의 딜레마에 놓인다. 좀 더 대중에게 다가가는 이야기를 하고 스타 배우와 작업해서 제작 규모를 키울 것인가. 혹은 계속해온 제작환경을 유지하면서 조금 더 솔직한 이야기를 꺼내고 유명하지 않은 배우와 함께할 것인가. 그래도 아직은 큰 규모의 영화산업으로 넘어가기보단 지금껏 해온 방식을 자유롭게 고수하고 싶다. 큰 예산의 대가로 내 자신과 내 영화에서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탐탁지 않아서다. 가장 성공한 <호수의 이방인>도 애초부터 프랑스 관객 1만 명 정도에게만 보여줄 요량으로 겸손하게 만들었는데 큰 인기를 얻게 됐으니 괜찮지 않을까. 물론 언젠가는 국제적인 스타 배우들과도 만나보고 싶은 욕심은 있다. (웃음)

- 허문영/ 예를 들자면 어떤 배우와?

= 알랭 기로디/ 미국 배우로 따지면 하비에르 바르뎀, 브래드 피트,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생각난다. 그런데 문제는 캐스팅에 성공한다 해도 내 연출 스타일과 맞을지 모르겠다. 난 시나리오를 쓰면서 한 번도 특정 배우나 실존 인물의 이미지를 떠올려본 적이 없다. 등장인물을 먼저 머릿속에 그리고 배우를 내 캐릭터에 동화시키는 식이다. 무척이나 어려운 과정이다. 그런데 만약 이미 배우가 너무 유명하고 많은 영화를 찍었다면 내 캐릭터와의 충돌 지점이 더 많아질 것 같다. 이것도 조금 정치적인 발상인데, 내 영화에선 어떤 스타든 그동안의 정체성은 뒤로 물리고 내가 만든 작은 사람들의 모습에 동화되길 바란다.

- 허문영/ 당신의 영화를 생각하면 텅 빈 공장이나 황량한 들판의 모습도 떠오르지만, 홀딱 벌거벗은 중년 남자들의 몸이 가장 강렬하게 기억난다. <도주왕>의 마지막 장면에서 배 나오고,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자들이 홀딱 벗고 뒤엉키는 장면은 얼핏 추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너무도 활기 넘치고 아름다워서 경탄할 수밖에 없던 굉장한 장면이다. <호수의 이방인>도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남성들이 맨 몸이다 보니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 사람들이 맨몸이라는 사실도 잊을 정도다. 그런데 같은 맨몸일지라도 <도주왕>의 그것에선 활력과 생명력이, <호수의 이방인>에선 죽음과 불길한 기운이 각기 다르게 느껴진다. 중년 남자의 벗은 몸을 찍는데 최고 대가인 (웃음) 당신에게 나체 남성을 찍는 방법, 기준을 묻고 싶다.

= 알랭 기로디/ 내 영화에 아주 큰 주제다. 나체, 에로티시즘, 섹슈얼리티 같은 것들. 농부나 중·노년의 배 나온 아저씨가 잃어버리는 관능적인 면과 성적 욕망을 스크린을 통해서라도 돌려주고 싶다. 이건 개인적인 욕심이기도 하지만 노동자 계층, 소시민들도 어떤 애정의 욕구와 섬세한 면모를 가지고 있으며, 영화가 그것을 회복해줘야 한다는 정치적인 기획이기도 하다. 이런 것들을 조금 더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 <도주왕>에서는 어릴 적 좋아했던 모험 영화의 형식을 섞고, <호수의 이방인>에서는 99.9%의 남성이 서로에게 플러팅을 한다는 다소 SF적인 세계를 만든 후에 히치콕적인 스릴러 요소를 집어넣었다. 또 동성애 관계의 보편성을 확보하려면 진정한 사랑, 열정적인 사랑, 달리 말해서 몸이 부딪히는 사랑의 모습을 직접 보여줘야 한다. 성기를 다 보여주고 발기부터 사정까지 이르는 성관계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라는 거다. <호수의 이방인>에서 내가 그렇게 했고, 이건 섹스를 포르노그라피로 격하하면서 금기시하고 더럽게 여기는 일반적인 경향을 뒤엎고자 하는 정치적 기획이기도 하다. 사회나 영화는 흔히 남성과 여성의 상체 및 가슴은 아름다운 것으로, 반면 하체와 성기는 터부시하며 거부한다. 그런데 결국 사랑이란 상체와 하체가 같이 그려지는 섹스와 정액의 이미지로 구현돼야 한다. 영화를 찍거나 볼 때 가장 아쉬운 점도 이렇게 중요한 사랑의 과정을 기껏해야 5초쯤 보여주거나 지워버리는 거다. 액션 영화에서 도주 신을 길게 찍듯이 사랑 영화라면 섹스의 A to Z도 전부 보여줘야 한다. 젊은 감독들이나 동료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왜 우리가 영화에서 섹스를 생략하고 겁먹게 됐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섹스 장면을 찍을 때도 액션 신을 연출할 때처럼 시간을 할애해서 체위나 구도를 짜야 한다. 배우에게 정확한 디렉팅도 없이 “지금 섹스 시작해 주세요!”하는 건 무턱대고 “지금 웃겨주세요!”하고 주문하는 것만큼이나 얼토당토않은 연출법이다. 내밀함이 없는 연기는 흔해 빠진 클리셰에 그치고 만다. 연출 수업은 이쯤 하겠다. (웃음)

- 허문영/ 나를 포함해 많은 이가 당신의 영화를 좋아하는 큰 이유는 이야기의 예측 불가능성과 유머가 탁월하게 결부된다는 점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와 유머는 완성된 시나리오에서 나오나? 혹은 촬영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나?

= 알랭 기로디/ 시나리오는 철저하게 쓰되 결말은 정하지 않는다. 나조차 예상 못 했던 결말을 마주할 때 느끼는 놀라움이 늘 크다. 사실 촬영 전에 이미 각본을 너무 많이 고치는 바람에 촬영 당시나 편집 때는 영화에 지겨움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래서 배우 섭외나 현장에서 최대한 새로움을 찾는 편이다. <도주왕>의 경우엔 주인공이 100kg의 거구라거나 여주인공이 아랍계라는 설정을 섭외 단계에서 고치곤 했다. 다만 <호수의 이방인>은 대체로 시나리오에 충실했고 딱 예상한 만큼의 유머를 집어넣었다. 물론 편집에서는 예측 못 한 부분을 추가하기도 하고 대화를 대거 덜어내면서 생각보다는 조용한 영화가 되긴 했다. 특히 편집은 지겨움과의 싸움에 가깝기에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만든다는 마음으로 임하곤 한다.

관객과의 대화

- 관객/ 퀴어 영화를 만드는 이들에게 조언한다면?

= 알랭 기로디/ 어떤 영화든 자기 내면에 깃든 불안이나 고민을 세상에서 관심 가질만한 주제와 잘 섞는 게 중요하다. <호수의 이방인>에서 히치콕적인 스릴러 요소를 가미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나도 이런 영화를 만드는 데 많은 장애를 겪고 있고, 그걸 뚫고 나가려고 노력 중이다. 어쨌든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에 조금의 보편성을 부여하는 게 중요한 고민이다. 그래서 신화나 전설에 대해서 더 공부하고 있고 나만의 표현법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 관객/ 영화 제작의 규모가 커지면 어떤 것들을 버려야 하나?

= 알랭 기로디/ 사실 영화를 만드는 일 자체가 계속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의 연속이다. 편집하다 보면 단독으로는 너무 훌륭한 시퀀스를 휴지통에 버려야 하기도 한다. 다만 최후까지 버리고 싶지 않은 건 배우의 캐스팅 문제다. 아무리 유명하거나 흥행이 보장되어 있다고 해도 내 영화에 어울리지 않고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배우와 일하고 싶진 않다. 물론 언제까지 고집부리면서 살아남을 수 있을 진 모르겠다. (웃음)

- 관객/ 영화 작업 중에 지겨움을 이겨내는 방법엔 무엇이 있나?

= 알랭 기로디/ 마찬가지로 배우 캐스팅에 있어서 같은 배우와 웬만하면 다시 작업을 하지 않으려는 편이다. 지금 준비 중인 영화도 시골에서 배우를 새로 발굴하고 섭외하려는 중이다. 앞서 말했듯이 시나리오에 없던 결말을 만들어 가면서 새로움을 늘이기도 하고, <호수의 이방인>부터는 함께 작업하는 편집자의 도움을 많이 받기도 한다.

- 관객/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인상 깊게 본 한국 영화가 있나?

= 알랭 기로디/ 참 곤란한 질문이다. (웃음) 내가 뉴 커런츠 섹션 심사위원이고 아직 수상 결과 발표가 안 난 터라 자칫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조심스럽다. 대신 평소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고 즐겨 본다. 박찬욱, 봉준호, 김기덕 감독의 영화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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