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얄개 소년, 혹은 내친구 범생이 <친구>의 서태화
2001-03-26
글 : 이영진
사진 : 이혜정

종로2가의 한 학원을 끼고 돌면, 이층에 영화 <친구>의 포스터를 10장 넘게 붙여놓은 커피숍이 있다. 요즘도 예전처럼 포스터를 부착해주는 대신 초대권을 받나보다, 스무장이 넘을 텐데 커피 한잔 마시는 셈치고 공짜표나 구해볼까,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그 집 주인은 초대권도 없을뿐더러, 있다치더라도 선뜻 내줄 만큼 맘씨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친구>의 ‘범생이’ 정상택, 아니 서태화(34)가 빚내서 지난해부터 시작한 커피숍은 요즘 매일같이 포스터 때문에 위층 비디오방의 공세에 시달린다. “제발 포스터 좀 떼라고 성화네요.” 바깥에서 보고선 신작 비디오 소개인 줄 알고 찾았다가 돌아가는 손님들이 한둘이 아니라며 항의한다는 것. 그래도 가지런한 치열을 드러내고 웃는 낯에 윗집 주인도 한소리 하는 걸로 그치는 모양이다.

한달 전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던 서태화는 요즘 “<친구>를 보내고 나니 착잡하다”고 한다. 결혼식 전날 첫사랑의 집 앞을 맴돌며 혹시 들킬세라 고개를 숙이던 노총각과 몰라볼 정도의 몰골을 한 친구에게 어깨를 내주며 잠시 쉬라하는 정상택, 둘 중 어느 연기가 더 낫냐는 ‘역질문’을 슬쩍 피해, “심중의 울증이 뭣 때문이냐”고 물었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친구> 이야기는 전부터 곽경택 감독에게 많이 들었어요. 술자리에서 듣고 영화 만들면 좋겠다고 전했죠. 그런데 감독이 그러더라구요.

나이 오십 되면 만들고 싶다고. 그래서 잊고 있었는데, 곽 감독한테서 영화하자는 말 듣고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상택이만한 나이에는 부모님 따라 제주도로 이사간 뒤였지만, 부산은 그에게 ‘둘도 없는 고향’이었으니까. 당연했다. “네 친구가 달리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범일동인데, 어렸을 때 제가 놀던 동네예요.” 영화관 뒤편에 놓인 철길 위에 쇠붙이를 올려놓고 자석을 만들어줄 기차를 기다렸던 것이나 부모님 손 붙잡고 극장을 들락거리며 봤던 얄개시리즈까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유년 시절 기억의 포말을 간직하고 있던 항구 부산은 그에게 각별했다.

“곽 감독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그 친구는 하고 싶은 이야기, 담고 싶은 기억 모두 담았는지….” 그는 아쉬운 게 남은 눈치였다. 그가 영화판에 발을 들인 건 미국 유학 시절. 타지에서 만난 곽 감독을 통해서다. “복잡해요. 학교 선배의 처제의 남자친구가 곽 감독의 후배였거든요. 부산이 고향인데다 아버님들께서 대학 선후배 사이라 쉽게 어울릴 수 있었죠.”

종종 곽 감독의 특수분장 수업시간에 모델이 돼줬던 그는 결국 졸업 작품인 단편 <영창 이야기>에도 출연했다. 씨름, 투포환, 고적대 밴드까지 두루 ‘섭렵’하다 성악 공부에 전념한 뒤 처음 감행한 ‘외도’의 느낌을 “다른 세상 같았다”고 말한다. 석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뒤, 97년 찍은 <억수탕>이 그의 장편 데뷔작. 이후 <닥터K> <키스할까요> <짱> <비천무> 등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닥터K>에서는 뮤지컬 배우이기도 한 동생 서지영씨와 나란히 출연했다. “<친구>요? 중간에 끼어들어 몇컷 찍고 빠지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스탭, 배우들과 함께했으니 ‘영화가 뭔지, 연기가 뭔지’ 알려준 작품이죠. 아, 그리고 저 당분간은 반백수예요. 게임에 빠져있긴 할 텐데, 몸이 벌써부터 근질근질하네요. 얼마나 견딜지 모르겠어요.” 듬직한 상체에서 뽑아올린 그의 굵은 목소리에서 <친구>를 떠나보낸 뒤 앙금처럼 남은 허탈감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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