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시이 유키노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계기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영화애호가로서 다양한 영화 산업을 경험하고 싶다는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국의 영화제를 경험하고 있었다. 미지의 영역에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것처럼 보이는 그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 청각 장애를 가진 권투 선수 케이코를 연기하며 또 다른 도전을 했다. 혹독한 체중 조절과 복싱 훈련을 거친 후 대사 없이 표정과 몸짓과 타격음으로만, 거의 무성영화처럼 찍힌 시퀀스가 적지 않은 영화를 찍어낸 키시이 유키노를 만났다.
- 몇년 전부터 언급됐던 프로젝트라고 들었다. 시나리오 이전에 실존 인물의 책을 읽었다면, 당시 감상은 어땠나.
= 예전부터 일 때문에 신세를 많이 졌던 프로듀서가 제안했다. 그때는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자서전 <지지마!>를 기반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는 기획만 있었고 감독은 정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이걸 해도 되나?” 라고 생각했다. 복싱 경험도 없고 권투 선수도 아니고 비장애인인 내가 이 캐릭터를 맡는 게 어떤 의미로 비춰질까 고민했다. 그런데 4~5년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내 안에서 이 작품을 담금질할 수 있었다. 미야케 쇼 감독이 합류하고 프로듀서도 바뀌는 등 제작진이 꾸려지면서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갔는데, 그때 다시 한번 출발선에 서게 됐다. 그 시점엔 이 작품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대신 “내가 이것을 해내야 한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또한 16mm 필름으로 찍는다는 촬영 방식도 정해졌기 때문에 복싱과 수화를 배우고 몸을 만들면서 캐릭터를 준비했다.
- 16mm 필름으로 촬영해보니 어땠나. 다른 현장과 어떻게 달랐는지 궁금하다.
= 대사가 없기 때문에 대체로 필름 돌아가는 소리만 들으면서 연기했다. 그 과정에서 “어릴 때부터 굉장히 좋아했던 영화가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구나” 하고 깨달았다. 필름은 여러 번 촬영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실패가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는 연기에 집중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식이조절을 하느라 머리가 멍해질 때도 있었는데 그 소리를 듣다 보면 케이코 캐릭터에 몰입됐다. 스태프들의 몰입도도 남달랐다. 전반적으로 디지털 촬영과는 현장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 케이코는 크게 두 명의 캐릭터와 중요한 관계를 맺는다. 체육관 관장과 남동생 세이지와의 관계는 각각 어떻게 해석했나.
= 케이코가 애정을 갖고 대하는 관장은 가족도 단순한 코치와도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는 가족 이상으로 마음을 열 수 있는 존재다. 체육관이 문을 닫게 될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접했을 때 케이코는 권투와 그곳의 동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권투는 케이코 자신을 위한 것인 동시에 체육관 사람들과 인연을 만들어준 매개체였다. 그래서 시합에서 이기면 체육관을 닫지 않아도 될 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케이코는 엄마보다는 수화에 능숙한 동생 세이지와 더 가깝다. 그는 케이코가 말하지 않고 말하고 싶지 않을 때도 집요하게 관계를 요구하는 고마운 존재다. 섣불리 누나를 이해한다고 단정 짓지 않고 그저 누나의 상황이 어떤지 묻는다. 그리고 케이코의 귀가 들리지 않는 것도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 않다. 그런 남동생과 한집에서 살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전문 복싱 선수를 연기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트레이닝이 요구됐을 것이다. 수화도 익혀야 했다.
= 복싱은 영화 안에서 트레이너 역할을 하기도 했던 마츠우라 신타로 씨가 식이 조절을 포함한 모든 관리를 담당해 줬다. 실제 배우이자 트레이너 일을 하는 분이다. 나는 아톰급이라고도 하는 ‘45kg 급’에 배정됐는데, 체중이 부족해서 오히려 몸무게를 늘려야 했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살을 찌우는 게 아니라 정해진 양의 단백질을 먹으면서 몸을 키웠다. 원래 권투 선수는 하반신 근육을 열심히 키워야 하지만 영화에서 몸이 커보이게 찍힐 수 있도록 어깨와 목 부위 근력 운동을 많이 했다. 트레이닝 3개월, 식이 조절 2개월을 거치며 정말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수화는 도쿄청각장애인연맹에서 실제 청각장애인에게 직접 지도를 받았다. 수화의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청각장애인이 평소 어떤 생활을 하는지, 몸짓이나 시선의 움직임도 하나씩 이해하며 작품을 준비했다.
- 몇달 전 직접 쓴 에세이가 수록된 사진집이 나왔더라. 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를 언급하며 “해외 합작 영화를 찍고 싶다”고 언급한 내용을 봤다. 혹시 함께 작업하고 싶은 감독이나 배우가 있다.
= 물론 있다. 누구나 세계 각지의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 아닌가. 배우 일을 하기 전부터 영화애호가였다. 일본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가의 영화를 봤다. 그러다 보니 다른 나라의 영화 제작 방식이 어떤지 무척 궁금해졌다. 해외의 영화 제작 현장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꼭 도전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