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부산국제영화제]
BIFF #7호 [인터뷰] '고속도로 가족' 정일우, 김슬기,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모두의 사연으로"
2022-10-12
글 : 송경원
사진 : 백종헌
<고속도로 가족> 정일우, 김슬기 인터뷰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 나름으로 불행하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의 저 유명한 첫 문장이 떠오르는 가족이 있다. 고속도로 휴게소를 전전하며 노숙 생활을 하는 기우(정일우)네 가족은 얼핏 행복하고 만족스러워 보인다. 남루한 행색에도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 이 이상한 가족의 행복은 어딘지 위태롭다. 거리 위의 삶을 영원히 이어질 수 없기에 가족은 흩어지고 각자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가족과 노숙 생활을 이어가고 싶은 아빠 기우와 이제는 정착하고 싶은 엄마 지숙(김슬기)의 유일한 문제는 서로 너무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사랑해서 헤어질 수밖에 없는 딜레마 앞에서 이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정일우와 김슬기 배우는 “매 장면이 즐겁고도 괴로웠다”(정일우)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 부산국제영화제는 충분히 즐기고 있나.

= 정일우 | 영화를 정말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살짝 흥분 상태다.(웃음) 드라마 <굿잡>보다 <고속도로 가족>을 먼저 마쳤는데 선보이기까지 좀 오래 걸렸다. 부산에 초반부터 내려왔는데 매일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들이 즐겁다. 벌써 중반을 지나 끝이 보인다니 아쉽다. 찍을 때 정말 힘들었는데 관객들을 만나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고 나니 고생한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익숙한 듯 독특한 이야기다. 이제껏 맡아보지 못한 역할인데.

= 정일우 | 주변에서도 신선하다는 반응이 제일 많은 것 같다. 이제 평이한 캐릭터에서 벗어나야 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시나리오를 읽고 단번에 매료됐다. 다만 파격적인 캐릭터인만큼 우려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이상문 감독님을 만나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인물에 대한 방향을 잡았다. 이미지 변신을 위한 변신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적이면서도 새로운 것들이 필요했다. 그 중간에서 발란스를 조정하는데 공을 들였다.

= 김슬기 | 처음 시나리오에는 대사가 별로 없어서 비중이 크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거의 모든 화면에 걸려 있더라. (웃음) 지숙은 겉보기엔 평범하다. 자기 목소리를 잘 낼 줄 모르고 병풍처럼 계속 뒤에 서 있는 존재다. 그게 포인트였다고 생각한다. 별 대사 없이 계속 화면에 걸리는데 그냥 배경이 되지 않고 존재감을 드러내야 했다. 비교적 후반에 캐스팅 됐는데 라미란 선배님을 비롯해 좋은 분들이 함께 하신다고 해서 크게 고민하지 않고 출연을 결정했다. 캐릭터는 잔잔하지만 개인적으로 엄마 역할은 처음이라 나름 도전이기도 했다. 아기 엄마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는 칭찬이 기분 좋았다.

- 지숙의 시선으로 보면 남편의 의견을 완전히 자신의 생각처럼 받아들이던 인물이 영선(라미란)의 가족을 만나면서 점점 깨어나고 성장하는 이야기다. 지숙의 서사만 놓고 보면 ‘그렇게 어머니가 된다’고 이름 붙여도 좋겠다.

= 김슬기 |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뿌듯하다. 내내 참고 인내하던 지숙은 영화 속에서 두 번 정도 감정의 변화를 겪는다. 시작은 영선의 가족이지만 선택은 지숙이 했다고 생각한다. 철부지 남편을 사랑하지만 자식들을 더 보호하고 싶은, 엄마로 살기로 결심하는 거다. 물론 그렇다고 기우를 미워하거나 내치는 것과는 다르다. 완성된 영화를 큰 화면으로 보면서 내내 이런 생각이 들어서 안타까웠다. 저 때 왜 기우를 더 사랑해주고 품어주지 못했을까. 내가 좀 더 잘해서 기우를 끌어안을 수는 없었을까. 아직 내 안에도 지숙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기우는 가족과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도 거리의 생활도 포기하지 못한다. 영화 전반에 걸쳐 자신의 감정을 발산하지만 제일 납득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 정일우 | 육체적으로 힘든 건 크게 문제 될 거 없었다. 기꺼이 감당할 자신이 있다. 문제는 캐릭터의 상처와 아픔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이번만큼 감독님과 소통을 깊게 자주 했던 적도 드물다. 기우는 감정 기복이 힘든 인물이고 조금만 다르게 표현해도 최종적으로는 큰 차이가 난다고 느꼈다. 이전에 사업을 하다 배신을 당해 사회에서 버림을 받은 기우에게 유일하게 남은 의미는 가족이다. 남들이 볼 때는 어떨지 몰라도 작은 행복을 추구하면서 오늘만 살아간다. 그러던 차에 영선의 가족 때문에 자신의 공동체가 붕괴 되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다. 또 다시 버림받는다는 것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고 극단적인 반응으로 이어진다. 비이성적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 하나하나에 이유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 기우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허기짐’ 같다. 계속 뭘 먹고 있는데 결핍이 느껴진다.

= 정일우 | 감사하다. 휴게소 음식부터 개밥까지 정말 다양하게 먹었다.(웃음) 무엇을 먹느냐 보다 어떻게 먹느냐를 기준으로 상황에 따라 다른 표현을 하고 싶었다. 기우가 계속 무언가를 먹는 건 단지 노숙생활로 인한 배고픔 탓은 아닐 거다. 아무리 웃고 있어도 한쪽에서는 채워지지 않을 불안이 있다고 생각한다. 차이와 반복을 통해 대사 이상의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다.

= 김슬기 | 먹는 연기를 인상적으로 소화하는 배우 그렇게 많지 않다. 개인적으로 하정우 선배님 이후 최고의 먹방 연기라고 칭찬하고 싶다.

- 기우네 가족과 영선네 가족, 두 집단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가 굴러간다.

= 정일우 | 현장 분위기는 전체가 대가족 같았다. 좋은 스태프와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배우로서 자유롭게 날아오를 기회를 얻었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현장을 갔다. 예를 들면 라미란 선배님은 현장에서 그렇게 먹을 걸 가져다주셨다. 잘 못 먹고 고생해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너무 잘 먹여서 얼굴에 살이 피둥피둥 오를 지경이었다.(웃음) 서로 챙겨주고 아끼는, 진짜 가족 같았다.

= 김슬기 | 라미란, 백현진 선배님들이 워낙 베테랑이시니까 현장에서 연기수업이 펼쳐졌다. 매 장면 연기하시면 그걸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됐다. 별 다른 걸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캐릭터가 되는 순간들이 경이로웠다. 아직도 배울 게 이렇게 많다는 건 막막하지만 한편으론 즐겁기도 하다.

- 한 가족을 연기한 아역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

= 김슬기 | 촬영 없을 땐 계속 끌어안고 있었다.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 친구들이다. 이야기도 많이 나눴고 종종 ‘진짜 엄마 같다’는 말도 들었다. 아이들은 솔직하다. 본인들이 느끼는 바가 은연 중에 화면에 묻어나온다. 우리 영화를 보면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가 느껴지리라 생각한다.

= 정일우 | 예전에 드라마 <보쌈>을 하면서 아빠 역할을 한 적 있는데 그 때 배운 게 있다. 아이들은 통제하려고 하면 안 된다. 스스로 설 수 있게 기다려줘야 하는 존재다. 촬영이 들어간다고 바로 모드가 전환되고 그런 걸 바랄 수 없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눈앞의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기다리는 거다. 그런 점에서 좋은 연기를 배울 수 있는 거울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 <고속도로 가족>의 개봉을 기다릴 관객들에게 당부의 말이 있다면.

= 정일우 | 볼 때 마다 새로운 것들이 발견한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다.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고 각자의 사연들이 있다. 감독님이 애정을 가지고 한 명 한 명 담아주셨다. 두 번, 세 번 보셔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한다. 꼭 극장에서 만날 수 있길 바란다.

= 김슬기 | 라미란, 백현진 두 분 이외에도 독립영화에서 활동하시는 좋은 배우들이 함께 하신다. 한 명 한 명의 연기가 다 훌륭하고 버릴 게 없다. 무엇보다 감독님이 캐릭터 하나 하나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하고 정성껏 담아주셨다. 메시지도 있고,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사람을 보는 재미가 있는 영화다. 극장에서 만날 그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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