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영화 <히든 피겨스>는 저임금 여성 전문직, 특히 흑인 전문직의 애환에 대한 얘기를 다루고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나사)이 배경이다.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20세기 초반에 별을 관측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여성 천문학자들이 주로 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는데, 나사에서도 그렇게 했던 건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계산 전문요원인 흑인 여성이 800m 떨어진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사 프로젝트 수장인 알(케빈 코스트너)은 장도리를 들고 “유색인용”이라고 적힌 화장실 간판을 부숴버린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나사에서는 우린 다 같은 색깔의 소변을 봅니다”라고 말한다. 그게 내가 케빈 코스트너를 가장 멋지게 본 장면이다. 2022년 넷플릭스 드라마 <스페이스 포스>에서 사령관으로 나오는 스티브 커렐이 “나사에는 네오나치도 많다”는 얘기를 한다. 20세기에 혐오는 인종 문제에 대한 함의를 주로 다룬다.
2022년이 이제 두달 조금 넘게 남았다.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올해를 뒤돌아보면 결국은 혐오가 한국 역사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해라고 하게 될 것 같다. 한때 한국의 키워드는 가난이었고, 통일이었던 시기도 있었다. 선진국이 되자 ‘선진화’가 관제 키워드였던 시기는 이명박 전 정부 때였다. 정부에서는 올해의 키워드로 ‘자유’를 유엔에서까지 밀고 있지만, 지금이 자유가 문제가 되는 시기는 아닌 것 같다. 정부, 아니 대통령실만 좀 조심하면 다른 문제를 제치고 자유가 문제가 되는 그런 나라는 아니지 않은가. 여야 갈등은 늘 있지만, 미국도 트럼프 전 대통령 이후로 정치 양극화가 문제가 되었다. 선거 때에는 갈라져 싸우더라도 일상 속에서는 공화당 당원과 ‘리버럴’들이 같이 잘 지낸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그게 어려워졌다고 미국도 난리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폭스TV가 하던 역할을 ‘먹고사니즘’과 결합된 유튜브가 혐오 정치의 일상화를 끌고 나간다.
여기에 거의 한국만 가지고 있는 젠더 갈등이 지난 대선을 기점으로 전면화되었다. 여의도에서는 이슈가 생길 때마다 남성표와 여성표를 계산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나마 지역 차별만이 두드러진 혐오 문제였던 시기는 차라리 소박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치, 성향, 젠더 그리고 연령과 함께 그 사람의 통장 잔고를 알면 90% 이상 그 사람을 설명할 수 있다. 계급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설명력이 너무 약화되었다.
혐오의 시대, 우리는 이제 선진국이고, 그렇다고 딱히 외부의 적이 당장 있는 것도 아닌 시대를 살고 있다. 풍요로 인한 에너지는 넘치고, 외부에 미워할 존재가 마땅치 않으니 내부를 혐오하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의 대통령을 만든 시대정신이 바로 혐오 아니었겠는가?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추진하기보다는, 지금이 너무 싫어서, 누군가가 너무 싫어서 했던 투표, 그런 게 모여서 지금의 권력이 된 것 아닌가? 다음 대통령은 누구일까? 더 큰 혐오의 힘을 타고 더 많은 혐오의 상징이 될 것인가, 아니면 혐오 다음의 키워드로 이 사회가 넘어갈 것인가? 혐오의 클라이맥스는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