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SF영화 <놉>을 보았다. 어떤 내용인지 잘 모르고 보기 시작한 영화라, 중반까지도 도대체 어떻게 풀려나갈 이야기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랬기에 점점 정체를 드러내듯 펼쳐지는 내용을 따라 가는 것이 아주 즐거웠다. 특히 초반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장면이 나중에 감동을 폭발시키는 소재로 활용된다는 것이 굉장히 멋져 보였다. 예를 들면 <놉>에서는 영화라는 소재와 매체에 대한 애정이 후반에 중요하게 활용된다. 그런데 영화라는 소재에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 도입부에 끼워넣은 장면에서 그 내용을 보여주는 연출력이 대단히 뛰어나다. 이 부분에서 주인공 가족이 영화의 역사와 관련 있는 집안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자기 사업을 홍보하면서 꺼내는 것인데, 따지고 보면 “우리 집안은 이러한 집안입니다”라고 배우 한명이 줄줄 말로 소개하는 장면이다. 인상적이거나 특이할 것도 없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대목이다. 재미없게 듣자면 친척 아저씨의 족보 강의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렇다고 이 부분을 무슨 과거 회상 장면처럼 만들어서 갖다 끼워넣으면 느릿느릿 진지하게 풀어나가는 영화 앞부분의 사실적인 흐름을 확 깨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니 그럴 수도 없다. 그렇다고 그냥 아무렇게나 대충 보여주고 넘어가면 이 장면이 관객의 마음에 별로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후반에 이 소재를 상기시키며 감정을 이끌어내고 감동을 키울 때 효과가 떨어진다. 어떻게 해야 별일 아닌 듯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보여주면서도 기억에 남게 할 수 있을까?
<놉>에서 원래 이 집안을 소개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어쩔 수 없이 남자주인공이 하게 되었다며 장면이 시작된다. 그래서 주인공은 뭔가 꼭 해야 하는 이야기를 하려고는 하는데 잘하진 못한다. 말주변도 없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관객은 답답함을 느낀다. 동시에 자연스러운 호기심으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고 싶어 한다. 이때 두 번째 주인공인 여동생이 등장해 이야기를 능숙하게 펼쳐내자 답답함이 해소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마음에 자연스럽게 새겨지게 된다. 그러면서 배경을 말로 설명하는 지겨운 시간이 될 뻔했던 장면이, 주인공 남매가 말하는 방식의 차이를 통해 서로 다른 성격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기회가 됐다.
이렇게 장면을 잘 구성하는 실력이 있으니 천천히 이야기를 쌓아가는 내용도 느리기만 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다음 내용을 점점 더 궁금하게 만든다. 나중에 이야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하면 앞부분에 천천히 쌓인 시간과 대조를 이루어 영화가 훨씬 더 박력 있고 신나는 느낌이 들었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꽤나 황당한 소재를 큰 현실감 없이 다루는 줄거리인데 그런데도 영화를 볼 때는 오히려 사실감이 풍부한 것 같았다. 좋은 연출로 재미없는 듯 아닌 듯, 느린 장면을 쌓아간 것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옛 SF영화 중 연출가의 솜씨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영화가 또 무엇이 있었는지 생각해보았다. 최고의 SF 연출가가 누구냐에 대해서는 여러 대답이 있겠지만 그래도 하나하나 떠올려보니, 연출력을 과시하는 장면이 많은 옛날 영화로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만한 것이 없었다. 이 영화는 외계인과 인류가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을 보여준다. 영화 결말에 외계인이 탄 우주선이 등장할 때, 화면에 온통 빛을 번쩍거리게 하고 특수효과를 총동원해서 진짜 대단한 기술을 가진 존재가 다가왔다는 충격을 주려고 작정을 한 장면이 있는데 그냥 그것만 떼어내 미술 작품이라 해도 될 정도로 영상 연출에 노력을 많이 쏟았다. 솜씨도 매끄럽고 양적으로도 보고 느낄 것이 많다. 거기에다 외계인과 비행접시가 등장하면 아무래도 관객이 시각적인 면에 집중하게 될 텐데, 그게 아쉽기라도 했는지 음악, 소리를 굉장히 중요한 소재로 활용하는 줄거리를 핵심에 넣어두었다. 그래서 관객이 시각에 몰두해 굉장한 것을 본다는 느낌을 가질 때 동시에 청각으로 들려오는 음악까지도 아주 선명히 마음속에 파고든다. 한번 빠지면 관객은 거의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지경이 된다. 이런 기교는 기가 막히다.
절정 장면에 가려서 그렇지 다른 장면도 화려한 연출이 풍부하다. 초반, 인도를 배경으로 하여 이상한 소리를 듣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사람들이 여럿 모여 그냥 같이 염불 비슷한 것을 외는 집회를 하는 장면일 뿐인데, 괜히 집회하는 곳으로 급하게 찾아가는 것처럼 장면을 이어 붙여서 뭔가 아주 긴박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분위기와 인도의 황량한 지역이 갖고 있는 토속적인 배경을 활용해서, 그 모든 이야기가 대단히 거룩하고 신비한 느낌을 갖도록 꾸며놓았다. 그 덕에 외계인을 만난다는 일이 그냥 생물학 탐사가 아니라, 우리보다 한 차원 높은 대상과 접촉하는 굉장히 경이롭고 엄청난 일이라는 무게를 갖는다. 이 장면을 보여주는 동안 영화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는 음악을 반복해 들려주는데, 은근슬쩍 관객의 귀에 익도록 하는 것도 매우 경제적이다.
그 모든 것이 합쳐진 결과, 이 영화를 TV에서 처음 봤을 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지금도 그날 집안 풍경이 기억이 날 정도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외계인이 나오는 SF라고 하면 일단 외계인이 나오는 게 시작이고 그 뒤에 외계인과 싸우든지, 아니면 외계인의 안내에 따라 우주를 모험하든지, 그런 내용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외계인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다가 외계인을 만나면 그게 곧 결말인 영화였다. 그런 줄거리가 가능하다는 것도 놀라웠고, 그런 발상 때문에 영화가 훨씬 더 신비로운 순간 그 자체에 사람을 집중하게 만든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지금 돌아보니 그런 거창한 내용 못지않게 사람들이 대피하는 장면을 그럴듯하게 연출해서 뭔가 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같이 꾸민 점이라든가, 감자로 만든 음식을 먹다가 무심코 우주선 착륙장 모양을 만드는 모습을 비추어 주인공의 집착을 드러내도록 연출한 순간 등도 영화를 풀어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TV에서 영화가 다 끝나니 밤이었다. 어찌나 영화가 마음에 깊이 남았는지, 나는 괜히 아파트 베란다로 나가서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평생 살면서 보던 그 수많은 밤과 아무 다를 바도 없던 밤하늘이었고 다른 이유로 무슨 특별할 것이 있던 날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날은 그 밤하늘 어디인가에서 꼭 우주선이 나타날 것 같기도 해서 한참 찬바람을 맞으며 구석구석 별 사이를 바라보았고, 한참 신비감에 젖어 있었다. 훌륭한 영화 연출에는 그런 정도의 힘이 있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