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실패에 머물지 않은 힘과 끝내 버릴 수 없는 마음
2022-11-16
글 : 송경원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하나의 매듭을 짓고 돌아설 때마다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12년의 성장을 담아낸 영화 <보이후드>에서 엄마 올리비아(퍼트리샤 아켓)는 아들 메이슨(엘라 콜트레인)이 기숙사로 떠나기 전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트린다. 올리비아는 아들이 사진을 배우기 시작할 때 처음 찍은 사진을 보관 중이다. 엄마는 아들에게 사진을 가져가길 권하지만 이미 다가올 미래에 시선을 빼앗긴 아들은 굳이 뭐 하러 가져가냐고 무신경하게 내뱉는다. 이윽고 카메라는 몇 걸음 물러나 아들이 남겨두고 가겠다는 것들의 풍경을 가만히 비춘다. 올리비아의 종착역이자 아들의 출발점이기도 한 이 장면에는 각각 과거와 미래로 시선을 건네는 현재의 두 얼굴이 겹쳐 있다.

(올리비아의 시점에서) 일견 서글프고 허무하게 느껴진 이 장면의 진가는 내용이 아니라 편집 태도에 있다. 어머니의 슬픔을 앞에 둔 아들은 어떤 리액션도 없다. 아마도 뭔가 말을 건넸을 테지만 영화는 이를 잔인하리만치 단호하게 생략한다. 그리하여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다’는 올리비아의 감정은 어떤 대답과 결과를 요구하는 이유가 되지 않고, 온전히 지금에 집중한다. 덕분에 이 투명한 장면은 이야기의 결과가 아닌 온전한 현재로 머문다. 우리의 오늘은 어제의 결과물도, 언젠가 다가올 내일을 위한 밑거름도 아니다.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지만 내가 예상했던 미래와는 조금 달랐던 오늘.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질 무수한 오늘들. 그뿐이다.

1.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이하 <다카포>)을 보면서 무심결에 같은 말을 내뱉는 나를 발견한다.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굳이 2007년부터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시리즈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내 마음은 20년 넘게 지속된 세계의 대단원 앞에서 분리된다. 90년대 말 문화 아이콘으로서 에반게리온과 함께 성장해온 세대로서의 ‘나’는 이 작품을 거부하고 실망한다. 오리지널 <에반게리온>의 세계는 실상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에서 종결되었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사실 TV판 <에반게리온>이 벌여놓은 사고를 수습하기 위한 부록 같은 마무리였다. TV판 25, 26화부터 기존 서사를 정지시키고 이른바 ‘오메테토’ 엔딩(등장인물들이 내면으로 들어가 ‘축하한다’며 종결지은 엔딩)으로 갑작스레 전환한 것에 대한 보충 설명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리하여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 택한 미래는 폐허의 풍경이다. 인류가 근본적으로 마주한 소통의 불가능성, 마음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강제로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인류 보완 계획의 충격적인 이미지는 절망의 끝에서 개인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선택으로 이어진다. 압도적인 상실감을 구현한 디스토피아의 이미지는 공허하고 쓸쓸하지만 합리적이며 논리적으로 납득되는, 이야기의 종결이고 한 세계의 종말이며 한 인간의 마감이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럼에도 안노 히데아키는 굳이 이야기를 다시 쓴다. 2007년부터 시작된 신극장판은 필연적으로 ‘왜 굳이 다시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흥행이 보장된 상품에 대한 상업적인 선택, 흔한 리부트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완성된 서사를 전면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를 다시 세우는 신극장판 4부작, 특히 3부 <에반게리온: Q>(2012) 이후 9년 만에 돌아온 이 작품의 집요함에는 어딘지 필사적인 구석이 있다. <다카포>는 이상할 정도로 수다스럽다. 인물들(의 가면을 쓴 감독은)의 많은 설명과 대사로 우리를 설득한다. 이는 기존 <에반게리온> 시리즈가 추구했던 의도된 모호함의 전략과는 구별된다. 나를 흔든 건 이 촌스럽고 거칠며 필사적인 ‘무언가’다.

아즈마 히로키가 통찰했듯 에반게리온은 거대 서사의 종말(혹은 거부)이 구현된 결과물이다. 에반게리온의 메시지는 거창하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그저 한 소년의 외로움, 사람과 소통을 거부하는 마음의 장벽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묻는, 보편적인 서사를 여러 서브컬처 텍스트와 교차시킨다. 시청자들은 온갖 텍스트들이 뒤섞인 에반게리온이라는 혼성모방, 데이터로서의 파편화된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하고 각자의 에반게리온을 쌓아올렸다. 서사의 중력을 벗어난 이러한 해체와 재조립을 통해 각자의 ‘에반게리온’이 생겨났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카포>에 대한 실망은 이렇게 스스로 주체가 된 데이터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간신히 연결한 개연성을 전면 부정하고, 부수고, 새로 썼기 때문이다. 25년을 함께해온 ‘에반게리온’이란 경험이 부정당하는 불쾌함. 이제 와서 취향의 소비 대신 거대 서사를 회복시키려는 태도에 대한 반감. 기어코 이야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문을 닫으려는 의지에 대한 거부감.

2.

동시에 기어코 이별을 선언하며 ‘가자’고 손을 내미는 <다카포>에 박수를 보내는 ‘내’가 있다. 늘 그렇듯 불꽃은 세계의 바깥에서 튄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를 보며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에에올>의 세계관에 비유하자면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은 90년대 <에반게리온>이 ‘가지 않았던 길’을 그려보는 평행우주다. 기존의 세계를 뒤엎고 부정하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여기에 성공과 실패는 없다. 그저 존재를 새기는 데는 성공했지만 소통에는 끝내 실패했던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지금 믿는, 전하고 싶은, 가야 했을 길을 이제야 제시할 따름이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결말은 <에에올>의 조부 투파키(스테파니 수)와 닮았다. 모든 것을 경험한 뒤에 우리는 무엇이 될 것인가. 가능성이 상실된 세계에서 남겨진 합리적인 선택지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 자신을 지우는 길이다. <에에올>이 끝난 뒤에도 나는 조부 투파키의 판단에 심정적으로 더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다. 마음의 장벽을 넘지 못한 고독을 견디느니 존재를 지우기로 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세계처럼, 모든 것을 수렴한 뒤 제로로 돌아가는 쪽이 더 이성적이며 말이 된다. 아니 더 편하고 안락하다.

반면 에블린(양자경)의 선택은 치열하고 필사적이다. 이건 도출된 결론이라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에 가깝다. 솔직히 화합에 이르는 <에에올>의 ‘과정’의 동어반복은 다소 지루하다. <에에올>은 예정된 화합과 보수적인 결말로 나아간다. 이들의 갈등이 그다지 긴장되지 않는 건 끝내 어떤 식으로든 서로를 부둥켜안고 화합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엄마와 딸, 아내와 남편, 딸과 아버지의 벌어진 거리를 보여줄 때부터 이들이 한데 뭉칠 것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끝이 빤한 종착지에 가슴이 일렁이는 건 그에 이르는 과정에 점철된 필사적인 발버둥 때문이다. 에블린은, 아니 <에에올>은 필사적으로 딸에게 나아간다. 온갖 말이 안되는 짓들을 벌이며, 개연성을 부수며, 텍스트 너머로 나간다. 절박한 건 에블린만이 아니다. 논리와 개연성의 결과로 ‘지워지기’를 택했던 조부 투파키, 아니 조이(스테파니 수)가 홀로 사라지지 않고 에블린을 찾아온 것이야말로 ‘나를 혼자 두지 말라’는 가장 절박한 호소이자 의지의 발현이다.

<에에올>은 쓸모없어 실패로 취급되는 행위로부터 시작되는 가능성을 긍정한다. ‘기대했던 무언가와는 다른 상태’는 무(無)의미가 아니라 다른 의미라는 소박한 진실. <에에올>과 <다카포>는 의미 너머의 ‘의지’를 기둥 삼아 스스로 구축한 세계에(혹은 이야기에) 책임을 진다. ‘무언가 더 있을 거’라고 기대한 한명의 팬 입장에서 <다카포>는 구축된 세계와 개연성을 부정하는 실패작으로 다가왔다. 에디셔널 임팩트 실행을 위해 마이너스 우주로 넘어간 겐도와 이를 막는 신지의 대결이 세트장 위에서 벌어질 때 그간의 <에반게리온>이 축적해온 기억을 부정당했다 느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마스터피스와 시대착오 사이를 헤매는 피터팬, 안노의 뒤늦은 의지에 애증 어린 존중과 헌사를 보낸다. 우리가 이야기에서 무언가를 더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지금 여기 (예상했던) 그것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게 앞으로의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이유가 될 순 없다. 부정에서 출발하는 긍정과 포용의 씨앗. 회한도 후회도 아닌 인정과 통찰의 언어로서의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역설적이지만 그 한마디가 오늘의 내가 동시대를 버틸 수 있도록 등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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