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촬영을 마친 <자백>은 코로나19로 인해 관객을 만나기까지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긴 호흡의 대사들, 단서 하나로 달라지는 상황,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는 극장에서 관객을 몰입시키기 충분했지만 개봉 여부가 불투명해 윤종석 감독은 내내 노심초사했다. 소지섭, 김윤진, 나나 등 배우들을 먼저 설득한 이 탄탄한 이야기는 2022년 관객에게도 여전히 매력을 뽐내며 좋은 입소문을 이어가고 있다. 윤종석 감독에게 영화 속 디테일부터 리메이크 요소까지 속 시원하게 물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비저블 게스트>는 이미 여러 차례 리메이크된 바 있다. 그럼에도 <자백>이 해외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까닭은.
=완성도 높고 손대기 어려울 것 같은 원작을 각색했다는 자체를 높이 평가해주더라. 영화 관계자는 <자백>의 배우를 다 알고 있었다. 한국 콘텐츠가 워낙 많이 알려지다보니 배우들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원작 <인비저블 게스트>를 보고 어떤 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나.
=이 영화는 반전처럼 뒤에서 모든 비밀이 드러나는 구조라 앞부분의 드라마에서 정서적 요소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원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사는 “죽은 줄 알았어요. 근데 살아 있더라고요”였다. 원작에서는 변호사의 정체를 관객이 알기 전에 이 대사가 나와서 정보 외에는 감정을 전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이 그녀와 죽은 남자의 관계까지 알고 있을 때 이 대사를 들으면 감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런 식으로 정보 값을 달리 전달하면 원작과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겠다 싶었다.
-<자백>은 원작보다 훨씬 뜨거운 영화가 됐다. 결말에 반전을 더함으로써 재미 요소를 붙이기도 했지만 복수의 완성, 인과응보라는 결말은 스페인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온도의 영화를 만들었다.
=<자백>에서는 양신애(김윤진)의 정체가 원작보다 한참 앞에서 드러난다. 그때부터 감정의 깊이가 깊어진다. ‘진실은 무엇일까’라는 질문과 함께 관객은 양신애의 감정을 따라가게 된다. 다만 양신애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 이를 너무 감정적으로 소비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했다. 감정 때문에 서스펜스가 강화될 수 있도록 연출했다.
-원작의 호텔 방이 눈 내리는 산장으로 바뀐 것도 큰 변화다. 고전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면서도 말 그대로 두 사람의 밀실이기도 했다.
=나는 영화가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작업이라고 믿는다. 인물이나 이야기보다 시간과 공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원작의 시간과 공간감을 지우고 <자백>만이 가진 확실한 인상을 제시하고자 했다. 유민호(소지섭)의 동선을 고민했을 때 멀리 도망치고 싶지만 수사망이 좁혀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범행한 장소로 갈 거라고 생각했다. 각색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머릿속에 강원도, 범행 장소, 눈 내리는 겨울, 이런 요소들을 떠올렸다. 다만 2019년에 눈이 너무 적게 와서 많은 눈을 만드느라 고생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사무장의 이름, 산장 주소 등의 정보가 주어진다. 유민호는 눈 덮인 호숫가 산장에서 무언가 감추고 있는 사람처럼 수염을 기르고 등장한다. 마치 추리소설에서 단서가 하나씩 주어지듯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추리소설 같다는 감상을 많이 접하면서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웃음) 공간이나 배우의 연기로 클래식한 느낌을 내고 싶긴 했다. 큰 곤란에 빠진 남자, 남자의 존재까지 위협하는 매력적인 여자, 그리고 악의 세계에 단 한번 발을 담갔을 뿐인데 수습이 안되는 사건들. 이런 요소들에서 <자백>이 장르적으로 누아르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이중배상>이나 <길다> 같은 고전 누아르 영화를 좋아한다. 원작이 있는 영화의 연출을 제안받았을 때도 이런 누아르적인 요소 때문에 끌린 게 사실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이지만 이 역시 캐릭터가 잘 구축됐기 때문이다. 특히 좋은 연기를 보여준 나나의 김세희 캐릭터는 유민호와 양신애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만 구현되는데도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원작에서 가장 비중이 줄어든 게 김세희다. 김세희는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밋밋해지고 가짜처럼 보일 수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원작에서는 직접 차를 처리하고 금융 조작을 하는 등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만 각색하면서 다 뺐다. 리얼타임에는 등장하지 않고 두 사람의 이야기 속 플래시백으로만 등장하게 했다. 이렇게 해야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더 궁금해지는 캐릭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양신애를 연출할 때는 어땠나. 처음부터 그녀의 비밀을 어느 정도 드러낼지 고민했을 텐데.
=그 부분이 제일 어려웠다. 양신애가 어느 정도까지 능수능란해야 하는지 배우와 대화를 많이 했다. 김윤진씨의 연기력이라면 훨씬 더 능숙한 변호사를 보여줄 수 있다. 나는 능숙해 보이긴 하지만 사실 허술한 부분이 있는 변호사로 그리고자 했다. 알고 보면 양신애가 긴장해서 조금은 어색해하고 있다는 걸 관객이 눈치챌 수 있도록 디테일을 잡아갔다. 김윤진씨가 연기 톤 조절을 다양하게 해서 편집실에서 골라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