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불온한 웃음
2022-11-30
글 : 김예솔비

어두운 집 안에 두 여자가 서로 거리를 둔 채 앉아 있다.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대화만큼은 선명하게 들린다. 서로의 얼굴만 봐도 치를 떨던 이들이기에, 어쩌면 어둠과 간격이 두 사람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여자가 묻는다. 엄마, 나 사랑해? 그러자 다른 여자는 웃음을 터뜨린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면서 대답을 유예하고 있는, 불온한 웃음이다.

앨리슨 벡델의 <당신 엄마 맞아?>에서 이 질문은 교묘하게 자리를 바꾸어 등장한다. 이 만화에서는 엄마가 딸에게 묻는다. 나를 사랑하니? 부모와 자식간의 무조건적인 헌신과 신뢰라는 전제에 균열을 가하는 의심은 왜 엄마와 딸 사이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일까.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선형적 질서가 무참히 깨진 모녀 관계를 다룬다. 엄마 수경(양말복)과 딸 이정(임지호)의 관계는 이미 부서져 있고, 그 균열을 떠날 줄 모른다. 영화는 틀어진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배경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관습적인 모녀의 이야기가 종종 그렇듯이 사랑의 교훈으로 되돌아가지도 않는다. 이 영화는 그러한 인력을 거스른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이상한 점은, 매우 특수한 관계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여전히 익숙한 감각을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두 모녀 사이의 긴장은 어떻게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테마로 희석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이토록 공감을 자아낸 것일까. 이 영화는 어떻게 자신의 불온함을 끝까지 지킨 것일까. 영화의 시점이 수경도, 이정도 아닌 수경과 이정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은 아닐까. 영화에서 두 사람의 몸과 마음을 분주히 왕복하는 것은 바로 사물들이다.

속옷의 이동 궤적이 말해주는 것

영화의 첫 장면에서 수경은 입고 있던 속옷을 벗어 세면대에 던진다. 이정은 빨고 있던 속옷을 수경에게 건넨다. 수경은 덜 마른 속옷을 입고 밖으로 나간다. 황망히 서 있던 이정이 자신의 속옷을 벗자, 속옷에는 생리혈이 묻어 있다. 이 일련의 주고받음이 이어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 둘 사이의 긴장을 대변하는 것은 속옷의 이동 궤적이다. 수경의 몸에 닿아 있던 속옷이 이정의 손으로 이동하고, 이정이 주무르던 속옷이 젖은 채로 수경에게 향할 때, 그리고 이정의 손에 피 묻은 속옷이 잡힐 때, 서로 떨어져 있던 것처럼 보이던 몸과 피, 축축함과 더러움, 더 나아가서는 수경과 이정의 깊고 내밀한 것이 접속한다.

두 사람이 접촉하지 않으면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영화가 사물을 통해 두 여성의 몸 사이를 가로지르는 운동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속옷이라는 비속한 사물로 이어져 있는 두 여성-몸의 뒤엉킴은 사실상 두 사람의 감정적인 얽힘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수경은 이정을 향해 분풀이하듯 감정을 쏟아내고, 이정에게 왜 받아주지 못하냐며 다그친다. 쑥뜸방을 운영하는 수경은 손님들이 쏟아버리고 간 감정의 부산물이 자신의 몸에 공해처럼 남아 있다고 말한다. 수경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부정적인 기운은 폭력의 형태로 이정에게 전이된다. 두 사람은 속옷뿐만 아니라 감정의 공해라는 물질의 이동 체계에 연루되어 있다.

그러나 이정은 이 폭력의 연쇄로부터 적극적으로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이정의 ‘몸’ 또한 이 체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수경은 이정에게 말한다. “네 팔뚝의, 허벅지의 살들. 그거 다 네 건 줄 알지? (…) 몇년을 그 공해며 증기며 버텨가며 번 돈, 그게 다 네 입으로 갔어.” 수경의 믿음은 흥미롭게도 한 사람의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유물론자들의 주장과 닮아 있다. 하지만 수경이 믿는 연결은 상호적인 것이 아니다. 이정의 몸을 자신의 환경에 일방적으로 종속시키기 위한 편협한 변명일 뿐이다. 수경은 독립하지 않는 이정을 타박하지만, 정작 이정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은 수경이다. 그러므로 이정이 수경의 옷을 가위로 자르는 것은 ‘불량 엄마’이자 불성실한 유물론자인 수경에게 가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저항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수경이 이정을 향해 쏟아버린 감정 쓰레기는 조각난 옷들의 잔해로 되돌아온다.

사물의 감각과 영화의 역량

속옷이 모녀의 내밀한 뒤엉킴을 형상화하는 사물이라면, 자동차는 모녀의 충돌과 연관된 사물이다. 두 사람이 다툰 뒤, 수경의 자동차가 이정을 향해 돌진한다. 수경은 자동차가 급발진한 것이라 주장하고, 이정은 수경의 고의를 확신한다. 자동차가 이정을 친 시점이 하필 수경이 “죽어버려”라고 중얼거린 직후였기에 진실을 밝히는 일은 더욱 묘연해 보인다. 어쩌면 영화는 급발진의 진위를 밝히는 일과 모녀의 신경전이 평행선을 그리는 탐정의 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진실을 허무하게 누설한다. 관객은 사고 이후 이정이 자동차를 타는 모습을 보고 “고쳤나 보네”라고 말하는 수경의 중얼거림을 듣는다.

‘엄마가 딸을 자동차로 쳤다’는 사실만으로 자동차는 두 사람 사이의 복잡다단한 긴장을 효과적으로 응축하고 있는 사물이다. 수경이 이정에게 행사해온 폭력의 역사는 사고의 잠정적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구도에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심지어 재판정에서 두 사람의 입장은 자동차 보험회사의 이해관계와 얽혀 명확하게 갈라선다. 그러나 이처럼 갈등의 상징화가 극에 달하는 재판 장면은 영화의 절정이 아닌, 초반부에 일상처럼 등장하며 크게 강조되지 않는다. 영화는 모녀의 지지부진한 갈등을 서사화하는 ‘경제적’인 방식들을 따르지 않는다. 자동차는 왜 쉬이 상징화되지 않은 채 이정과 수경 사이에서 어물쩍한 잔여물의 형상으로 맴돌고 있는 것일까.

자동차가 다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영화의 후반부다. 이정이 운전하고 있던 자동차가 이상한 조짐을 보인다. 곧이어 자동차는 급발진하며 제멋대로 튀어나간다. 이 화면이 자동차의 시점숏처럼 보인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화면의 운동을 제어하는 것이 이정의 의지가 아닌 자동차의 엔진이기에, 일순간 자동차의 시점을 체험하는 감각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영화는 자동차가 폐차되는 과정을 5번의 점프컷으로 보여준다. 단순히 폐차라는 사실만을 전달하기에는 구구절절한 묘사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사물을 상징화하는 대신 사물의 ‘감각’을 강조하는 영화의 선택으로 인해 자동차가 부서지는 장면을 볼 때 모종의 통증이 느껴진다. 이 통증은 서로를 구원할 수 없는 모녀 사이에서 체념과 증오로 왕복하는 것, 즉 관계의 통증과 공명한다. 이처럼 사물의 감각과 영화의 서사가 긴밀히 연동되는 것은 두 여성을 오가는 물질적 운동의 총체를 보여주고자 했던 영화의 안간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사물의 역량을 통해 어느 한 사람의 입장으로 함몰되지 않으면서, 둘 사이에 흐르는 관계의 통증을 전면화하는 영화의 가능성을 내보인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던 사물이 붕괴되고 난 뒤에야 서로의 독립이 가능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자동차는 부서졌고, 속옷은 더이상 몸들을 가로지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독립은 사랑의 깨달음이나 화해 따위로 거머쥔 결과가 아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어긋나 있고, 영화는 여전히 불온하다. 망가진 사물들의 환상통이 남는다. 영원히 모르고 싶고, 항상 알고 있던 것만 같은 지난한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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