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바디>의 김영광은 살인마이기 이전에 유혹자다. 로맨스 장르 안에서 활약한 배우의 전적을 묘하게 비튼 캐릭터 성윤오는 낮에는 건축가로 일하고 밤이 되면 데이팅 앱을 켠다. <썸바디>에서 연쇄살인범 성윤오가 외로운 여성들의 급소를 파고들어 목적지로 유인한 이후 펼치는 일들이란 대개 소름 끼치는 폭력으로 점철돼 있다. 배우로서의 야심을 더듬어보게 하는 이번 신작에서 김영광은 전에 없던 무시무시한 기운과 미스터리를 입고 나타나 변신의 포부를 알린다.
-데뷔 이래 가장 악하고 잔인한 인물을 연기했다. 작품을 준비하는 자세에서도 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나.
=이 인물을 잘 연기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처음에는 외형적인 모습, 행동의 논리 등을 조금 과하게 준비하려고 했던 것 같다. <썸바디>에서 성윤오란 인물의 스위치가 켜지고 꺼지는 어떤 전환의 순간을 이해하고 싶었다. 촬영을 3개월 앞두고 체격을 좀더 키웠는데, 감독님과 회의 후에 다시 체중을 뺐다. 총 8부작 중 7부까지 약 10kg을 뺀 상태로 찍었고, 마지막 대본을 보고는 5kg 정도 더 감량하고 들어갔다. 후반부가 윤오의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서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파트라고 느꼈기 때문에 감독님에게 농담 삼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다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윤오가 쓰고 나오는 안경은, 촬영 전 감독님과 만날 때 실제로 내가 빈티지한 스타일의 테가 큰 안경을 쓴 적이 있었던 데서 비롯됐다. 감독님이 그날 내 모습을 눈여겨보시더니 얼마 뒤 윤오도 안경을 쓰는 게 좋겠다고 했다.
-영화 데뷔작 <차형사>가 코미디 장르였고, 드라마에서는 주로 로맨틱한 역할을 소화했다. 그동안 대중이 바라는 스타성이 부각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정지우 감독은 그에 비하면 차라리 마니악한 쪽에 포커스를 뒀다. 그래서 끌린 면도 있었나.
=많은 분들이 물어보는 것 중 하나가 그동안 변화를 갈망하지 않았냐 하는 것인데 평소엔 잘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썸바디>를 하면서 내가 그동안 많이 바뀌고 새로워지고 싶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 같다. 아무래도 새로운 장르와 역할에의 도전이었기 때문에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막막했던 건 사실이다. 초반엔 ‘어떡하지’ 싶었다. (웃음) 정 감독님이 무척 섬세한 분이란 걸 느낀 게, 나를 자주 불러다가 이런저런 사는 일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불쑥 작품과 연결되는 어떤 것들을 꺼내서 이야기하게끔 도와주셨고. 그래서 이후에 혼자 준비하는 시간 동안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살인 장면, 여러 번의 섹스 신을 포함한 노출을 감행해야 하는 설정이 촬영 과정에서 어렵진 않았나.
=일단 노출은 이 나이 정도 되면 좀 무덤덤해지는 것 같다. (웃음) 작품에선 어떤 모습을 보여드려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감독님에게 오히려 나를 마음껏 사용하시라고 말씀드렸다. 특히 정지우 감독님 영화의 섹슈얼리티는 작품 내용과 깊이 연결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뢰했다. <썸바디>엔 첫 테이크가 실린 장면이 많다. 이전에도 주로 반복하면서 무언가 끌어내기보다는 첫 테이크가 좋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썸바디> 촬영감독님이 주로 풀숏보다 내 바스트숏을 먼저 찍는 걸 보고 비슷하게 느끼시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성윤오는 데이팅 앱 ‘썸바디’로 만나는 대부분의 여성들을 살해하는데, 왜 썸바디의 개발자인 김섬(강해림)에겐 애착과 관심을 느낄까.
=윤오는 정말 알 수 없는 인물이지만 그런 그에게도 일종의 첫사랑 같은 게 아니었을까? 섬, 이 아이만 있으면 갑자기 모든 게 가능해질 것 같다는 생각. 서로 이해받고 있다는 생각. 어떤 것에도 흥미를 가져본 적 없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무언가 가져보고 싶은 사람이 생긴 거라고 받아들였다.
-사이코패스 캐릭터는 종종 그 위용을 과장하거나 악인을 탄생시킨 피치 못할 사정을 전시해 문제가 된다. 반면 <썸바디>는 성윤오의 배경에 대해 내내 침묵한다. 연기하는 배우에겐 단서가 있었나.
=처음엔 행동의 이유, 과거에 겪은 일, 가정사 등등 성윤오를 움직이는 힘이 무엇일지 여러 가지로 매달려봤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못 찾겠더라.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어떠한 표현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동기가 있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대답에 도착한 거다. 윤오라는 사람을 정의하지 않고 때로는 일관성 자체를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상대 캐릭터도, 배우도, 시청자도 이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불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성윤오를 알 것 같았다. 다만 혼자 겪은 의외의 고비가 있었는데, 성윤오와 계속 함께하다 보니 나 자신도 많이 우울해지고 가라앉는 걸 느꼈다. 어느 날 그런 기분으로 촬영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는데 감독님이 때마침 전화를 주셨다. “짐을 혼자서 지고 가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그 말을 듣고 그동안 내려앉았던 어둠이 확 날아가는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