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술꾼도시여자들> 이후 이선빈은 한선화, 정은지와 게임 광고를 찍고 새로 출시된 비빔라면의 새 모델이 됐다. 칸 국제 시리즈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칸 현지 레드 카펫에 서기도 했다. 흥행과 화제성을 가늠하는 몇몇 지표 외에도 <술꾼도시여자들>은 데뷔 초부터 줄곧 도도하고 빈틈없는 이미지로 각인되어왔던 이선빈이 낚아챈 적시타다. 개그맨을 꿈꿨지만 재능이 없어 대신 예능 프로그램 방송 작가로 커리어를 쌓게 된 안소희는 사회생활이라는 이름의 감정 노동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평범한 직장인이 가장 이입할 만한 인물이다. 만취 상태로 대기업 회장에게 1분16초 동안 속사포 욕을 날리고 장례식장에서 무너지는 감정을 연기하는 등 배우가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신도 많다. 캐릭터 스펙트럼 면에서나 연기 방식에 있어서나 담대한 확장을 가능케 했던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주변으로부터 “전보다 자유로워졌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12월9일 티빙에서 공개되는 <술꾼도시여자들2>는 어느덧 익숙해진 분기점을 다시금 비튼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술도녀’의 독보적인 캐릭터성은 여전하지만, 그들 앞에 놓인 엉뚱한 상황들을 돌파해가며 배우는 또 한번 진화할 기회를 얻는다.
-지난 4월 칸 국제 시리즈 페스티벌에 정은지와 함께 참석했다.
=레드 카펫에서 전에 없던 경험을 했다.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거나 한국 콘텐츠를 많이 즐기는 나라도 아닌 프랑스에서 사람들이 과연 날 알아볼까? 한데 차에서 창문을 내리자마자 내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해주는 거다. 처음에는 티빙쪽에서 준비한 지원군인 줄 알았다. (웃음) 그런데 사진까지 인쇄해서 갖고 와 너무 놀랐다. 내가 <술꾼도시여자들>의 이선빈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털털한 모습을 많이 노출하긴 했지만 작품에서는 강인하고 도회적인 이미지가 지배적이지 않았나. <술꾼도시여자들>은 배우의 스펙트럼을 무척 자연스럽게 넓혀준 작품이었다.
=내 연기는 진지한 정극 톤에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동안 장르물에서 전문성이 두드러지는 완벽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는데, 실제 내 모습은 오히려 소희와 비슷하다. 사람은 자신이 하지 않았던 것에 끌리지 않나. 생활극을 주로 찍었던 분들은 내가 해왔던 캐릭터들을 연기해보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역으로 나는 사람 냄새 나는 작품을 만나고 싶었다. 이전에 몰랐던 영역을 새롭게 공부하기보다는 원래 갖고 있던 것을 자연스럽게 연기에 녹여내고 싶었다. 또 하나 꿈꿔왔던 것이 여성들이 이끄는 ‘워맨스’다. 그런 의미에서 <술꾼도시여자들>은 내가 바랐던 것들을 모두 충족해주는 대본이었다. 대본을 읽자마자 소속사 대표님에게 전화를 걸어 “이 작품은 무조건 해야 한다”고 말했다.
-1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인 만큼 캐릭터 세팅을 압축적으로 다시 해야 했는데 그 과정은 어땠나.
=<술꾼도시여자들>이 끝난 이후에도 언니들과 같이 일하는 등 접촉이 많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안소희, 한지연, 강지구가 아닌 이선빈, 한선화, 정은지가 이름만 바꿔서 노는 것처럼 됐다. (웃음) 또 대본도 한두 마디 대사만으로 우리의 성격이 잘 나오는 신들로 이루어져 캐릭터를 다시 설명해야 한다는 어려움은 없었다.
-시즌2 초반부는 세 주인공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산으로 들어가며 벌어지는 소동을 담는다.
=지도를 봐도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산에서 촬영했다. 화장실에 갈 때도 차를 타고 내려가야 하는 그런 곳이었다. 덕분에 배우로서 많이 내려놓고 촬영해야 했다. (웃음) 연기는 오히려 편하게 했다. 이미 구축된 캐릭터가 있다 보니 소희가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어떻게 리액션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소희는 <술꾼도시여자들>의 내레이션을 담당한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작가가 실제 친구들을 모티브로 지연과 지구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들었다. 고로 소희에게 작가의 눈이 투영되었다고 생각했다. 캐릭터적으로도 극과 극의 성격을 가진 지연과 지구와 달리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 역할이다. 그래서 내레이션을 통해 자신의 입장에서 사랑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내레이션은 감정을 빼고 담담하게 해서 최대한 장면과 잘 섞일 수 있게끔 녹음했다.
-예능 프로그램 서브 작가였던 소희는 이번 시즌에서 메인 작가로 올라선다.
=죽마고우가 예능 작가다. 그 친구와 6년 동안 함께 살면서 작가 아카데미를 다니고 이력서를 내고 막내 작가로서 어떤 일을 하는지 섭외 전화는 어떻게 돌리는지 지켜봤다. 이제 막 메인 작가가 됐는데 친구를 위해 일을 제쳐놓고 산으로 함께 들어간다는 건 엄청난 결단이다. 동시에 소희는 작가로서 자존감이 높고 팀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다. 자신이 다시 일터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소희는 갈색 파마머리를 고수한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보이기 위한 캐릭터 해석이었나.
=예쁜 스타일링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참새처럼 부산스럽고 털털한 캐릭터의 성격과 직업적 특성을 고려할 때 관리하기 가장 편한 머리를 고민했을 것 같았다. 작가들은 중요한 날 외모를 꾸밀 때 소요되는 시간이 다른 직업군에 비해 현저하게 적다. 쪽잠을 자며 일하는 작가가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세팅된 느낌을 주고 싶을 때 할 법한 것은 이른바 ‘막파마’다.
-시즌1에서 박영규 배우에게 욕하는 장면이 호평받았다. 이번에도 킬링 포인트가 될 만한 신이 있나. 그 밖에 시즌2에서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는지 간단하게 예고해달라.
=당시 그 신은 대본이 나오자마자 통째로 외우면서 준비했다. 화장실에 가면서도 대사를 중얼거렸다. 이번 시즌에서 소희가 욕설 랩을 하는 장면은 없다. 대신 과거 장면에서 하찮은 액션을 보여준다. 시즌2 초반부에는 세 친구의 깊은 우정을 느낄 수 있는 사연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중반 들어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뒤 남아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소희와 북구(최시원)의 러브 스토리에는 어떤 서사가 존재한다. 서로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 보다 섬세하게 보여주는 신들이 있다.
-6년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질리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이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해왔나.
=다른 이야기를 해도 늘 같은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을 만나면 지칠 때가 있는 반면, 똑같은 얘기를 해도 다른 감정을 담아 재밌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 배우가 도전하는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할 것인지 더이상 기대되지 않을 때 이른바 질릴 수 있다. 만약 연달아 형사 캐릭터를 맡는다면 ‘아~ 어떻게 연기하겠네’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번에는 어떻게 연기할까?’ 궁금해지는 배우가 되고 싶다. 내가 배우로서 추구하는 방향을 보여줄 작품을 적시에 만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