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비행사를 꿈꾸는 흑인 소년 죠니(제일린 웹)는 침대에 누워 거동조차 힘든 할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고한다. 지금은 사립학교에 다니는 친구 폴(뱅크스 레페타)이 갑자기 플로리다로 떠나자는 제안을 던졌기 때문이다. 죠니에겐 대안이 없다. 보호자인 할머니는 자신을 돌봐줄 능력이 없고 이대로면 사회복지시설에 끌려갈 처지다. 폴의 집 뒷마당에 지어진 아지트에서 잠시 비바람을 피하고 있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른다. 폴은 함께 떠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학교에 몰래 들어가 컴퓨터를 훔치자고 유혹한다. 학교에서 문제아 취급을 받고 제 발로 뛰쳐나올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이게 범죄라는 걸 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죠니는 대안이 없다. 세상의 그릇된 것들로부터 지켜주던 우산 같은 외할아버지(앤서니 홉킨스)가 돌아가셨다 해도 여전히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는 폴과는 달리.
죠니의 할머니가 나오는 장면은 이상하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폴의 시점에서 벗어난 기이한 개입이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죠니가 대변하는 흑인과 하층민들의 서사를 굳이 보여주지 않는 건 이들에게 선택의 기회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위치는 이미 고정되어 있다. 같은 맥락에서 사립학교 큐 포레스트 스쿨에서 연설하는 메리 앤 매클라우드 트럼프 검사(제시카 채스테인)의 서사는 이 영화에 필요치 않다. 최상과 최하, 이제 미국 사회의 정해진 질서와 주어진(내몰린)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계층이다. 어떻게 살 것인지 그나마 고민이라도 해볼 수 있는 건 중산층(이라고 믿고 싶은 이들)뿐이다. 이민자 출신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어린 소년 폴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할 자격이 주어진, 아메리칸드림의 마지막 세대다.
죠니를 바라보는 시선은 누구의 것인가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자전적 기억을 바탕으로 한 <아마겟돈 타임>은 철저히 소년 폴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영화다. 폴은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배관공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경제적 성공이나 공부보다는 아티스트가 되는 데 더 관심이 많던 ‘평범한’ 소년이다. 영화는 ‘평범’이라는 두 글자에 가려져 인지하지 못했던 한 소년의 당연함을 무참히(동시에 따스한 애정을 담아) 부순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내밀한 영화들을 통해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계승자로 평가받기도 한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아마존 정글로 떠났다가(<잃어버린 도시 Z>) 우주 비행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더니(<애드 아스트라>) 다시금 고향이자 영화적 터전인 뉴욕 퀸스로 돌아왔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명제를 제임스 그레이만큼 성실히 수행하는 자도 드물 것이다. 다소 낯간지러운 수식어를 빌려온다면 한 사람의 세계는 하나의 우주이고, 이방인 제임스 그레이 역시 돌고 돌아 자신의 우주를 성실하게 써내려간다.하나의 우주, 한 소년의 세계로 귀환한 제임스 그레이는 작정하고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 속에 투사한다. <아마겟돈 타임>의 전반부는 거의 일기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세세한 설정부터 자잘한 에피소드까지 전부 제임스 그레이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아니, 바탕이라는 말이 궁색할 정도로 <아마겟돈 타임>의 중반부까지는 제임스 그레이의 경험 그 자체다. 폴, 아니 제임스 그레이는 아들 둘 있는 가정의 차남이고 유대인 이민자이자 배관공인 아버지는 혹독한 노동을 대가로 중산층 진입에 성공한다. 어머니는 교사이자 학부모회장 출마를 고민 중이고 조부모와 대고모, 삼촌, 할아버지까지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시간을 보냈다. 공립학교에서 만난 흑인 친구가 있었으며 우주 비행사를 꿈꾸는 친구는 아폴로 미션 패치를 보물처럼 아꼈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다 걸린 제임스 그레이와 친구는 징계를 받는다. 자식을 학습부진아 보충반에 넣으라는 학교측의 권유에 분노한 어머니는 제임스 그레이를 데려와 사립학교 ’큐 포레스트’로 전학시킨다. 하지만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와 사는 흑인 친구는 보호자가 없었고 그렇게 두 사람의 인생은 갈라진다.
여기까지는 <아마겟돈 타임>의 폴이 겪은 사연 그대로 묘사된다. 영화가 갈라지는 건 외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상실감과 혼란 속에 가출을 결심하는 지점부터다. 폴은 가출을 위해 죠니를 꾀어내고 일탈을 넘어 절도라는 범죄를 저지른 두 소년은 전혀 다른 처우를 받는다. 폴은 그럭저럭 사는 중산층 아버지가 경찰과 안면이 있었던 덕에 ‘운 좋게’ 풀려나 일상으로 복귀한다. 폴의 아버지는 말한다. “인생은 불공평해. 행운이 찾아오면 감사하야 해.” 죠니는 그토록 도망치고자 했던 사회복지시설 대신 소년원에 수감될 것이다. 오프닝에서 같은 장난을 쳤지만 흑인에 유급생이라고 더 혼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결과다. 학교에서의 차별이 울타리 안에서의 처우였다면 이건 회복 불가능한 갈림길로의 진입인 셈이다. 그렇게 보호받던 소년의 울타리가 깨어지고 잔혹한 현실을 마주했을 때 소년은 각자 다른 길을 걸었던 아버지, 어머니, 외할아버지를 떠올린 후 비로소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
여기서 끝났다면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성장으로 엮어낸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른다. 철저히 폴의 시점에서 폴이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재현하던 영화는 죠니와 공모한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 이질적인 장면 하나를 불쑥 삽입한다. 죠니의 집, 죠니가 할머니와 이별을 고하는 장면은 폴이 결코 알 수 없었을, 직접 보고 경험하지 못한 사실을 관객에게만 전달한다. 시종일관 폴의 시점에서 재현되던 세계에 끼어든 불순물처럼 이 장면은 이상하다. 죠니의 집에서 죠니의 현실을 바라보고 있는 자, 카메라 뒤에 선 자는 누구인가. <아마겟돈 타임>의 성취와 한계를 논하는 건 이 불균질한 시선에서부터 시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1980년, 아메리칸드림이 최후의 숨을 거둘 때
성장담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아마겟돈 타임>은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전작들이 대체로 그러했듯 매우 정치적이고 현실 반영적인 영화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명제는 이렇게 다시 쓰여야 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정글과 우주까지 다녀온 제임스 그레이가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 자신의 서사를 써내려갔을 리 없다. 굳이 순서를 살펴보자면 아마도 이 영화는 1980년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끌어온 쪽에 가까울 것이다. 어린 시절 잃어버린 것,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핑계로 쉽게 놓아두고 온 가치들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스크린 위에 재현된다. 그러므로 <아마겟돈 타임>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왜 1980년인가.
미국의 역사를 말할 때 분기점이 되는 시기가 있다. 가장 가까운 건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의 당선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레이건 시대가 열리자 1970년대 넘쳐났던 자유와 사상의 물결은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사라진다. 정확히는 자유라는 단어에 다른 의미들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1970년대는 자유와 함께 불안의 시대였다. 1960년대에 폭발했던 정치적 이상과 담론은 아침이슬처럼 사라지고 베트남전의 상처와 허무는 우드스톡페스티벌과 같은 히피즘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큰 맥락에서 1970년대 아메리칸 뉴시네마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어쩌면 70년대는 미국 문화, 포용과 다양성으로 상징되는 미국적 가치의 유토피아이자 마지막 불꽃이라고 해도 좋겠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오늘날 미국의 분열과 보수주의, 도널드 트럼프가 외치는 ‘그레이트 아메리카 어게인’의 기원을 1980년으로 여기는 것 같다. 이민자들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건너왔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냉혹했지만 1, 2차 세계대전 당시 넘어온 이민 1세대들은 폴의 외할아버지처럼 일정 규모의 성공을 이루기도 했다.
아버지 어빙(제레미 스트롱)의 세대는 다르다. 아메리칸드림은 진즉에 끝났고 이제 와 필사적으로 발버둥쳐봤자 성공은 요원하다. 아들에겐 ‘너는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자신도 진심으로 그걸 믿는지는 모르겠다. 이제 이들은 성공에 대한 기대보다 추락에 대한 공포가 더 크다. 핵전쟁으로 세상이 망하는 것보다 무서운 건 계층간의 장벽이 점점 더 두터워진다는 사실이다. 장난기 넘치는 폴이 식탁에서 버릇없이 굴어도 크게 내버려두지 않던 부모는 폴이 흑인 친구와 친하게 지내며 열등생 취급을 받자 폭력을 행사한다. 폴을 향한 이들의 폭력은 그야말로 (보호자라는) 권력과 (어른이라는 육체적) 위력의 산물이다. 서서히 권위주의에 물들어가면서도 아버지 역시 외할아버지 세대에 대한 존중과 동경을 잃지 않고 있다. 아버지는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에 끝까지 참석하지 않고 차 안에서 아들들과 대화를 나눈다. 자신을 차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봐준 어른이 사라졌음을 슬퍼하는 어빙의 눈물은 마침내 숨을 거둔 아름다운 시대, 잃어버린 유토피아를 향한 애도처럼 보인다.
<아마겟돈 타임>은 아메리칸드림의 종말, 그 기원을 헤집는 영화다. 이제 계층간 사다리는 치워지고, 자신이 태어난 위치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학습된다. 사립학교에서는 트럼프 검사가 확신에 차서 연설한다. ‘너희들이 서 있는 자리가 너희의 능력’이라고. 경찰서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빙은 담담하고 서늘하게 충고한다. “운이 좋았어.” 아들에게 살기 위해 비겁해지길, 부조리에 눈감길 가르치는 어빙의 표정은 우울하고 냉막한 현실의 얼굴이다. 하류층으로 밀려나지 않고 현상 유지에 감사하는 중산층 가정의 소년 폴은 그렇게 현실에 내던져지고 미국은 이미 결정된 미래를 마주한다. 그런 다음에야 ‘어떻게 살 것인지’ 간신히 선택할 자격을 얻는다. 적어도 폴에겐 아직 선택의 자유가 남아 있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그 선택을 통해 지금 시대에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한다.
<아마겟돈 타임>은 아이의 눈으로 당시를 바라보는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실은 아이의 눈을 빌릴 뿐 어른, 정확히는 2020년대를 사는 제임스 그레이의 시선과 판단으로 재현한 세계다. 이 영화는 우리를 1980년으로 데려가려 하지도, 잃어버린 낙원을 낭만적인 시선으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시점에서 과거를 정돈하여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앞으로 잃어버릴 것이 무엇인지를 새삼 환기시킨다. 외할아버지는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과거의 가치다. 동시에 죽었음에도 여전히 폴의 곁에 머무는 존재다. 유령이라고 해도 좋겠다. 카메라는 외할아버지를 담을 때 마치 유령처럼 고요하게 어둠에 잠겨 우리를 가만히 보고 있는 존재처럼 그린다. 제임스 그레이의 세계에서 자신의 외할아버지는 이제는 잃어버린 낙원인 동시에 여전히 자신과 함께하는 살아 숨쉬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폴은 사립학교에서의 연설을 가만히 듣는 대신 조용히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아마겟돈 타임>은 이미 망해버린 세상에서 동시대 유령들과 함께하기로 한 폴의 마지막 걸음을 통해 우리에게 희미한 가능성과 선택지를 제시한다. 진즉에 끝난 것 같지만 당신은 여전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다고. 당신의 선택이 시대의 흐름과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만 ‘나’라고 하는 우주, 하나의 세계는 지킬 수 있다고.
아메리칸 뉴시네마라는 오래된 미래
세계를 무너뜨리는 일엔 핵폭탄도, 미사일도 필요 없다. 서 있는 자리를 옮기는 것만으로도 믿고 있던 세계는 간단히 무너진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순간(혹은 그 반대의 순간에도) 친숙했던 세계는 전혀 다른 곳으로 돌변한다. 제임스 그레이는 변하지 않는 세계에 속한 인물들을 낯선 장소에 데려다놓음으로써 세계를 확장해왔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는 떠나거나 떠나보내는 사람들,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는 사람들(<씨네21>, <잃어버린 도시 Z>와 실존이 죽음을 욕망한다는 역설, 박지훈 평론가)에 의해 성립한다. 한마디로 그는 이방인이라는 독특한 입장을 통해 세계의 균열과 모순을 감지하고, 변화의 궤적을 기록해온 연출자다. 어쩌면 그것이 제임스 그레이가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계승자라고 평가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아마겟돈 타임>이 백인 중산층 소년의 깨달음과 성장을 위해 흑인 소년의 이야기를 소비한다는 지적이 있다. 온당한 비판이다.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아마겟돈 타임>은 죠니의 서사를 누락시킨다. 한편으론 당연하다. 그것은 폴의 인지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임스 그레이는 구태여 영화가 견지해온 ‘폴의 시선’이라는 태도를 벗어나면서까지 죠니와 할머니의 이별 장면을 만들어 삽입했다. 나는 카메라의 의지가 개입한 이 장면에서 문득 <택시 드라이버>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에는 이상한 카메라 무빙이 있다. 트래비스(로버트 드니로)가 베시와 통화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트래비스를 놔두고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빈 복도를 보여준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이 장면이 무언가에 집중하지 못하는 트래비스의 심리를 대변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심리학자 로버트 콜커를 비롯한 적지 않은 평자들은 이 이상한 카메라의 움직임을 근거로 이후 모든 서사가 트래비스의 망상이라는 해석을 더한다. 무엇이 맞는지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때론 서사를 벗어난 카메라의 의지야말로 영화를 자유롭게 한다.
여기 두개의 죽음이 있다. 폴의 외할아버지가 죽고, 죠니의 할머니가 (아마 머지않은 미래에 홀로) 죽을 것이다. 폴, 아니 제임스 그레이의 외할아버지는 죽었지만 남겨진 자들에게 기억되고 폴에 의해 이야기로 되살아난다. 반면 죠니의 할머니의 죽음은 목격되지도 기억되지도 못한다. 나는 폴의 기억이 아닌 기이한 장면을 통해 그 흔적을 어떻게든 필름에 새겨넣고 싶었던 제임스 그레이의 의지를 느낀다. 존재했지만 존재를 허락받지 못한 모든 것들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세상과 싸우는 게 힘들지. 그렇다고 포기하진 마. 노력해야 해.” 폴을 향한 외할아버지의 조언은 스스로의 영화를 향한 다짐이자 각오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가 현실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카메라도 세상을 투명하게 비출 수 없기에 영화의 한계를 인지하는 태도는 중요하다. 적어도 제임스 그레이는 그 한계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2020년대, 파국으로 달려가는 미국을 그리고자 하나의 우주가 문을 닫고 하나의 세계가 일단락되었던 어린 시절 자신의 기억으로 돌아온 것이라 믿는다. 자전적 기억이 이야기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시대가 누락시킨 것들을 담기 위해서.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떠나간 이를 애도할 수 있다. 상실은 다른 걸로 대체하거나 메우는 것이 아니다. 메워질 수 없는 구멍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오늘을 버틸 동기와 에너지를 얻는다. 이때 잃어버린 것의 크기를 확인하는 방편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이야기(그리고 영화)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고, 기억을 버팀목 삼아 오늘을 산다. 아직 잃어버린 낙원을 포기하지 않은, 이야기라는 이름의 유령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