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설희, 기억합니다. 당신을 기억합니다.” 가장 가까이서 명성황후를 모시던 궁녀 설희(김고은)는 일본 무사들에게 황후가 시해당하는 것을 목격한 후 독립군의 정보원이 되길 자처한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수하에게서 접한 소식을 신속하게 전하며 조선 독립군을 돕는다. 올해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 시즌2에서 굴곡을 딛고 성장한 유미를, <작은 아씨들>에서 욕망을 솔직하게 표한 인주를 연기했던 김고은은 <영웅>에선 비장한 복수심을 지닌 설희로 분한다. 고요한 표정 아래 들끓는 애국심으로 무장한 채 극의 간장감을 한껏 끌어올린다.
-윤제균 감독이 설희 역에 김고은 배우를 캐스팅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고 밝혔다. 캐스팅 시점에 그 이유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나.
=왜 꼭 나였냐고 물어보진 않았지만(웃음), 설희 역에 나를 원하신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분명 나의 무언가를 보고 원하셨을 텐데 당장엔 그게 무엇인지 몰라도 분명 내 안에 있는 것일 테고, 촬영을 하다 보면 감독님이 끌어내주실 거라 믿었다.
-영화의 원작인 뮤지컬 <영웅>을 본 적이 있나.
=대본을 받은 뒤에 처음으로 보러 갔다. 뮤지컬을 보고 나서 대본을 읽으니 훨씬 연결이 잘됐는데 중간중간 노래 부르는 신들이 어떻게 구현될지 상상이 잘 안 가더라. 다행히 감독님이 노래가 나오는 신들을 하나하나 연극처럼 3D로 구현해 보여주셨다. 감독님이 생각한 그림을 확인하니 안심이 됐고 그 뒤론 내가 맡은 부분을 잘해내자고 결심했다.
-다른 독립군들과 달리 홀로 활동하는 설희에겐 몇 차례 위험이 따른다. 그럼에도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중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라고 봤나.
=존경심을 갖고 모시던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게 가장 컸을 것이다. 이전엔 수많은 궁녀 중 한 사람에 불과했지만, 그 사건이 발단이 되어 게이샤가 됐고 이토 히로부미의 곁을 지키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와 그의 부하들이 조선에 관해 논하는 대화를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고 그걸 삼키며 애국심이 무척 고조됐을 거라 생각했다.
-설희의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도 중요했겠다. 궁녀로서의 설희는 좀더 결의에 찬 모습이라면, 이토 히로부미 옆에선 감정을 누르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행동한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설희가 은장도를 빼들고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일본으로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곧이어 그 각도에서 기모노를 입은 설희로 장면이 전환된다.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얼굴로 딱 돌아서서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짧지만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고 무엇을 견뎌냈는지 이 신 하나로 설희의 변화가 전부 설명됐다.
-노래 부르는 신들은 어땠나. 예고 시절부터 노래를 잘해 동료들이 뮤지컬 배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던데. 그래서 비교적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다.
=예고 시절엔 사실 뮤지컬 곡을 훨씬 많이 불렀고 연습도 많이 해서 당시엔 잘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잊고 있었던 거다. 그때로부터 10년의 시간이 지났다는 걸. (웃음) 주변에 뮤지컬하는 친구들을 보면 꾸준히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데 나는 10년간 아무것도 안 하다 갑자기 하려니 막막하더라. 그저 매일 물어보고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설희는 울면서 부르는 신이 많은데 음정을 정확히 지켜 노래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내가 가장 먼저 노래하는 신들을 촬영해서 나뿐만 아니라 제작진 모두 시행착오를 겪었다. 나중에 촬영한 정성화 선배님이 세트가 세팅되어 있는 걸 보고 공연용에 맞게 세팅을 조율하셨다고 하더라. (웃음) 그뒤로 나도 몇 차례 재촬영을 했는데 돌이켜보면 하길 정말 잘했구나 싶다.
-직접 불러보니 어떤 노래가 와닿던가.
=아무래도 첫 번째로 부른 <당신을 기억합니다 황후마마여>가 가장 마음에 남는다. 영화 후반부에 기차에서 부르는 노래는 가사가 시적이라 듣다 보면 서서히 감정이 젖어드는 느낌인데 <당신을 기억합니다 황후마마여>는 말을 건네는 것 같달까. 가사가 직설적이고 편지를 쓰는 듯 불러야 해서 훨씬 슬프고 감정 전달도 잘됐다.
-노래만큼이나 눈에 띈 게 표정과 눈빛 연기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태연한 척하지만 눈빛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
=뮤지컬이 전체적인 그림을 보여준다면 영화는 개인의 표정에 주목하니까 찰나의 내 감정과 표정 등을 잘 보여주려고 했다. 설희의 서사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와중에 또 설희가 말도 별로 없으니까. (웃음) 내가 할 수 있는 부분들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됐다. 기억에 남는 신이 하나 있다. 설희가 짐가방에 모스부호기를 숨겨놓고 있지 않나. 그러다 이토 히로부미의 식민통치계획을 전해 듣고 급히 자기 방으로 돌아가 전보를 보내는데, 그때 순간적으로 정말 무서웠다. 밖에서 똑똑, 하고 누군가 문을 두드릴 때 진짜로 연기가 아니라 손이 툭 내려갔다. 그때만큼은 설희가 정말 두려웠겠구나 싶었다.
-이번에 게이샤 안무에도 처음 도전했다.
=색다른 경험이었다. 원래 뮤지컬에선 더 경쾌한 느낌의 음악과 안무였는데 영화에선 정적인 음악으로 바뀌면서 안무도 멋있어졌다. 보통 무용은 동작을 크게 하라고 하는데 일본 전통 무용은 동작을 크게 하면 느낌이 깨져버리더라. (손을 번갈아 교차하며) 이렇게 착착착, 정제된 동작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들이 신기하고 재밌었다.
-브이로그를 보니 <작은 아씨들>의 대본을 직접 적어가면서 분석하더라. <영웅>의 경우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했나.
=그땐 인주 감정선의 흐름을 좀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했는데, 대본 분석법은 매번 다르다. <영웅>에선 설희가 크게 세 번 나오는데 ,짧은 순간에 많은 표현을 해야 했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서사적으로 설희의 배경에 관해 잘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을 적고 그것을 마음에 담고 연기하려 했다. 마음에 담아두고 있으면 말로서 직접 표현하지 않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이 될 거라고 믿는 편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작은 아씨들>에 관해서도 묻고 싶다.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낸 신 중 하나는 인주가 원상아(엄지원)에게 총을 겨누는 8화의 엔딩 장면이었다. 연기한 배우로서도 쾌감이 느껴졌을 것 같다.
=촬영 초반에 이미 8화 대본까지 받은 상태였다. 8화의 엔딩이 대본상으로도 강렬했기 때문에 기대가 컸다. ‘인주가 이렇게 변하는구나, 그 다음엔 어떻게 될까’ 궁금해 하던 차에 9화 대본을 전달해주셨다. 받아서 읽어보니 ‘그래, 그럴 줄 알았어’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 당연히 사람이 변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겠지. (웃음) 8화 엔딩 신을 찍기 전에 9화 대본을 전달받았던 터라, 8화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대로 ‘앞으로 정말 어떻게 되려나’ 싶은 마음으로 임하려고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며 준비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도 현장에서 감정 유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편인가.
=사실 그렇진 않다. 내 방법 중 하나인데, 무거운 신을 찍을 때 무겁게 있지 않는 거다. 윤제균 감독님이 내게 자주 하셨던 말 중 하나가 ‘너는 나랑 코미디 장르를 했어야 한다’는 거였다. (웃음) <영웅> 현장에서도 감정 신을 찍을 때 카메라 밖에선 웃으며 수다를 떨 때가 많았다. 그렇게 심리적으로 좋은 상태를 유지할 때 본 촬영에서 더 크게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올해 <유미의 세포들> 시즌 2에도 출연했다. 한 캐릭터와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 한 건 처음이 아닌가.
=그렇다. 한 작품에서 이렇게 많은 분량을 해본 게 처음이었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다 내가 나오니 체력적으로 힘들긴 하더라. 그리고 일상극이라 사건이 매번 드라마틱하게 발생하지 않는다. 한 번은 잠옷만 갈아입으면서 아침에 깨어나는 신들만 계속 찍은 적도 있었다. 어찌보면 지난한 과정일 수 있었지만 현장이 정말 재밌었다. 스탭들과의 케미가 좋았고, 또 나는 붙박이로 계속 등장하는 반면 다른 배우들이 바뀌고 그들이 현장에 적응해가며 생기는 시너지가 있었다. 그런 재미로 밀고 나갔다. <유미의 세포들> 시리즈를 촬영해오며 한 단계 성장했음을 느낀다.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다고 지금 당장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서 보면 변화를 확연히 짚어낼 수 있을 거라 믿을 만큼 의미가 깊은 작품이다.
-<유미의 세포들> 시리즈가 ‘나중에 봤을 때 내가 성장했음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면, <영웅>은 어떤가.
=또 한번 큰 걸 이겨냈다는 느낌이다. 정말 ‘도전!’해서 해냈다는 성취감이 크다. 어려운 노래들을 부른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는데 결국 해냈고 또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작품에 진심으로 임하는 감독님을 보고 배운 것도 많다. 감독님이 현장에서 스탭들에게 정말 잘하신다. 막내 이름까지 다 외우시길래 그 비법을 물어봤고, 나도 그 방법대로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다닌다. (웃음) 지금 생각해도 즐거운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