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월드컵 기간 중에 언론에서 ‘할많하않’이란 문구를 접했다. ‘상대방과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 쓰는 말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엔 그것보다 ‘두려울 때’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왕조가 끝나고 일제강점기를 겪고 다시 군사정부를 통과하면서 사실을 말한다는 것의 두려움을 처절하게 느꼈을 터, 공포감은 터진 입을 막는 막대한 힘을 발휘한다. 왕조 사극이 스릴러 장르와 결합하는 것의 바탕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혁명이 부재했던 한국의 옛 역사에서 왕은 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올빼미>에도 그런 대사가 나온다. “왕을 갈아치울 수도 없고.” 잘못을 저지른 왕이 악한 마음을 먹으면 도무지 대적할 방법이 없다. 현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거론할 때마다 ‘제왕적 권력’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괴상한 짓거리에 능한 현직 대통령을 막을 수가 없다. 버럭대며 안 하겠다고, 혹은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그걸로 끝이다. 그럴 때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는 상상. <올빼미>는 그런 영화다.
주인공이 된 촌부
<올빼미>는 사실 이상한 사극이다. 인조 후기라는 역사적 배경을 끌어왔지만, 그 시대의 핵심적인 역사적 소재를 주제로 삼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올빼미>는 2017년에 나온 <남한산성>의 시대적 배경에서 8년쯤 지난 즈음의 이야기다. 병자호란 이후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돌아오는 시점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명과 청, 그리고 조선의 관계는 여전히 논쟁적인 시기를 겪는 중이다. 병자호란으로 수모를 당했던 인조는 명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반면, 조정의 실세인 영의정 최 대감은 청나라를 섬기자는 쪽이다. <남한산성>에서 보았던 척화와 화친의 알력이 여전하다는 말인데, <올빼미>는 그런 시대가 화근이 되어 벌어진 사건을 끌고 오면서도 전혀 다른 주제를 전하는 작품이다. 권력 투쟁이나 당파 싸움은 인간의 이야기의 뒷그림 이상이 아니다. 흡사 거시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개인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 고 질문하는 듯하다. 그 질문이 사극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권력층에서 제기되었다면 공허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이 신분상으로 별 볼 일 없는 촌부(村夫)라는 점에서 영화의 주제는 옳다.
신분제가 엄연한 시대에 하위 계급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다룬 사극이 흔해졌다. 그가 역사의 동인(動因)인 양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보이려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도 한몫한다. 그러나 결국은 양념처럼 처리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극에서 평범한 신분의 주인공을 내세울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자고 역사에서 지워진 존재를 구태여 끄집어낸다면 그건 인물에게 무례를 범하는 일이다. <남한산성>에는 네명의 중요한 인물이 나온다. 여기서 중요하다는 표현은 내 의견이 아니라 영화의 크레딧 순서가 인물의 중요도를 매겨놓았기에 하는 말이다. 이조판서 최명길, 예조판서 김상헌, 인조, 대장장이 서날쇠. 날쇠 또한 실존 인물에 근거했다고 하는데, 극중 임금의 격서를 전달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김 판서에게 격서를 받으며 그는 “제가 이 일을 하는 건 주상 전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전하와 사대부들이 청을 섬기든 명을 섬기든 저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저 같은 놈들이야 그저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어 겨울을 배곯지 않고 날 수 있는 세상을 꿈꿀 뿐입니다”라고 말한다. 시대상을 반영한 그럴듯한 대사로 들리지만, 날쇠란 인물의 매력은 최명길, 김상헌에 비해 턱없이 떨어진다.
시대상을 재확인하는 인물이 굳이 필요한 이유는 없다. 그 역할은 그가 아닌 누가 맡아도 다를 바 없다. 영화는 심지어 그의 모습으로 끝맺지만, 여타의 사극들이 보여주는 이런 유의 배치는 ‘민중을 중심으로 놓는 척’하는 가증스러운 태도의 방증일 뿐이다. <남한산성>은 수심에 찬 두 실존 인물– 명길과 상헌의 얼굴로 기억된다. 당연하다는 듯이 날쇠는 잊힌다. 그 이유는, 임금 앞에서 자신의 소신을 거짓 없이 말하는 인물이 두 판서밖에 없어서다. 날쇠가 죽음을 넘나들고 온갖 고생을 해봤자 두 판서의 거룩한 목소리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다. <올빼미>는 거꾸로다. 이 영화에서 기억되는 것은, 그리고 기억되어야 하는 것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평범한 남자의 얼굴과 눈동자다. 심지어 그의 눈은 태어날 때부터 기능을 거의 상실한 신체 부위다. 주맹증을 일일이 설명하는 게 구차해 소경이라고 소개하는 그는 담담한 표정의 남자다. 세속의 욕망을 지웠다가 본다는 것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그의 이름은 천경수(류준열)다.
침술사의 능력을 인정받아 궁궐에 들어간 그는 끔찍한 비밀을 목격하는 바람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미칠 노릇은, 그를 쫓는 인물이 왕 인조(유해진)라는 거다. 그래도 일단 살아는 봐야겠기에 그는 탈출을 감행한다. 영화에서 그는 두번의 탈출을 시도하는데, 영화적 재미는 단연코 첫 번째 탈출에 있으나 감동은 두 번째 것에서 나온다. 첫 번째 탈출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것이다. 삶의 욕망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니, 탈출 과정에서 벌어지는 것들은 관객의 조바심을 불러일으킨다. 마침내 그가 첫 탈출에 성공하는 지점에서 영화는 다시 그가 발길을 돌리도록 만든다. 큰 한숨이 나오는 순간인데, 거기에서 천경수라는 인물은 주인공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스스로 득한다. 조선시대의 사극에 등장하는 대다수 인물의 내면은 욕망으로 이글거린다. <올빼미>는 인조라는 왕을, 권력 유지를 향해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초라한 행색의 남자로 그렸다. 권력에 굶주린 조정의 신하와 왕족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사이에서 천경수는 유일하게 인간의 가치와 신념, 그것 하나를 위해 죽음의 소굴로 뛰어드는 인물로 남는다.
“나는 보았습니다”라는 말의 의미
주맹증인 그는 빛이 곧 어둠인 남자다. 클라이맥스에서 그는 인간의 생존이라는 가치, 즉 삶의 빛을 구하고자 자신에게 암흑의 세계인 빛 앞으로 나선다.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인간을 깨우치는 그 소중한 장면에 별다른 멋을 부리지 않는 영화가 야속할 정도다. 그런데 그게 맞다. 영웅이 된 촌부에게 과한 장식은 어울리지 않는 법이다. 강렬한 빛 아래에서 천경수의 존재는 더욱 초라해지지만, 그는 “나는 보았습니다, 나는 분명히 보았습니다”라고 7번 외친다. 앞서 왕은 그를 보고 “소경이면 소경답게 눈감고 살아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이미 본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사실을 분명히 아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나는 보았습니다”는 보았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본 것을 이렇게 또렷하고 진실하게 말한다는 의미다.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숨이 꺼져가는 왕의 눈앞에 대고 천경수는 “무엇이 보이십니까?”라고 묻는다. 아무리 권세를 휘두르던 왕이라고 한들 숨이 끊기는 순간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할 말을 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일까, <올빼미>는 현실의 은유처럼 보인다. 하긴 왜 안 그렇겠나, 한심한 인간이 왕처럼 앉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