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 스페이스]
[트위터 스페이스] 김혜리의 랑데부 : 파니 리에타르, 제레미 투루일 감독의 ‘가가린’
2022-12-23
진행 : 김혜리
진행 : 배동미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조용한 투쟁

※ 스페이스는 트위터의 실시간 음성 대화 기능입니다. <씨네21>은 2022년부터 트위터 코리아와 함께 영화와 시리즈를 주제로 대화를 나눕니다. 스페이스는 실시간 방송이 끝난 뒤에도 다시 듣기가 가능합니다.(https://twitter.com/cine21_editor/status/1605198880844705793)

김혜리 @imagolog 코너명과 더없이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딴 파리 교외의 실제 공동주택 ‘가가린’이 영화의 제목입니다. 이 영화는 독특한 갈래에 속해요. 소위 ‘하이브리드 영화’, ‘에세이 필름’이라 불리는 갈래인데요. 다큐멘터리 같은 부분도 있고 극화된 부분도 있어요. 유리 가가린이 ‘가가린’ 완공식에 참석해 환호받는 장면을 찍은 기록필름이나 다른 공동주택이 철거되는 모습을 담은 기록영상이 이 영화에 사용됩니다. <가가린>의 두 연출자가 실제 ‘가가린’이 철거되는 장면을 찍은 푸티지도 쓰였어요. 영화의 몸통에는 배우들의 연기가 들어간 드라마가 있습니다.

김혜리 @imagolog 유리라는 소년은 이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어요. 이름이 예언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년은 우주에 매료돼 있죠. 그리고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공동체와 이 건물이 사라지는 걸 어떻게든 막고 싶어서 친구와 함께 건물을 고쳐요. 유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철거를 피해보려 하지만, 정작 365세대에 달하는 주민들은 각자의 사정이 있어요. 모두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며 똘똘 뭉치는 건 아니에요. 의견이 갈리죠. 참 현실적입니다. 결국 주민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유리는 홀로 남아 고물이랑 가재도구, 화분, 식물들을 가지고 폐허가 된 아파트를 우주선처럼 개조하기 시작합니다. 근사한 얘기지만, 굉장히 슬프고 위험한 이야기예요. 이 영화에서 가장 판타스틱한 순간은 유리의 생명이 위험한 순간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이 영화를 알릴 때 마술과 리얼리즘이란 단어가 제일 많이 쓰이는 것 같습니다.

김혜리 @imagolog 프랑스에는 ‘공상적 사회주의자’(Utopian Socialist)들이 있었어요. 초기 부르주아들이었죠. 이들은 자신의 공장 노동자들에게 주거를 만들어주거나 노동조합으로 이상적인 사회주의 사회가 가능한지 실험했어요. 그 오래된 이상에서 파생된 프로젝트가 ‘가가린’이에요. 지금은 사라져가는 이 정신을 소년은 지키고 싶어 하죠. 집에 어른이 부재한 상태에서 커뮤니티의 어른들이 이 친구가 의존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공동체가 깨지는 건 소년에게 가족 해체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김혜리 @imagolog 소년의 투쟁은 매우 조용해요. 철거를 막는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혼자 시적인 투쟁을 하면서 환상의 승리를 도모하는 거죠. 오직 유리가 바라는 것은 철거 예정일에 ‘가가린’을 보러 올 이웃들에게 아파트가 우주정거장이 되어 영원 너머로 승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이를 두고 “정신승리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술이 쓸모가 있냐, 없냐’라는 질문과 함께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현실에서 소년은 퇴거당할 가능성이 높겠죠. 패배하겠죠. 그렇지만 버려진 물건들로 초월적인 이미지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 보여준다면, 이걸 누가 얕잡아볼 수 있을까요.

김혜리 @imagolog 이 영화의 스타일은 기계와 현대적인 구조물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인더스트리얼 아트’(Industrial Art)에 가까워요. 미술 사조 가운데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라고 있어요. 거칠고 빈곤한, 일상적인 재료들, 예를 들면 모래, 시멘트, 나무, 폐품과 같은 것을 최소한으로 가공해 설치하는 미술을 말하죠. 유리가 꾸민 온실, 우주선 내부와 같은 침실, 장막들을 보면 아르테 포베라의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가가린>

김혜리 @imagolog 이 영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당히 급진적인 사회 비판을 담고 있어요. ‘요즘 누가 그런 생각을 해’라는 핑계 앞에서 이 영화는 기죽지 않죠. ‘좋은 가치라면 지켜야 하지 않을까’라고 고지식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에 래디컬한 영화라 할 수 있어요.

김혜리 @imagolog 한국에서 아파트는 중산층의 상징이지만, 초기 아파트는 ‘소셜 팰리스’(Social Palace)였거든요. 산업혁명과 함께 사람들이 급속도로 모여 살게 됐고 그들을 위한 기반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위생적이고 살 만한 곳을 만들어주자’라는 아이디어에서 아파트가 건설됐습니다. 공상적 사회주의 실험을 했던 선량한 자본가들이 소셜 팰리스를 지으면서 이 이상은 19세기부터 시도됐어요. <가가린>은 지금은 지나간 노래로 여겨지는 사회주의적 공동체의 이상과 노동계급 문화, 그리고 연대의 가치를 끝끝내 믿는 소년의 이야기예요.

김혜리 @imagolog 유리가 굉장히 위태로운 지경으로 갈 때까지 가족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굉장히 대담한 이상을 가진 이 청소년이 앞으로도 남은 여생 동안 친구와 이웃에 의지하고 연대하면서 살아갈 거라고 이 영화는 보고 있어요.

<가가린>과 함께 보면 좋을 작품

<집의 시간들>

배동미 @somethin_fishy_ <집의 시간들>에도 <가가린>과 같은 환상적인 순간이 등장해요. 지금은 사라진 둔촌주공아파트엔 정전될 때만 켜지는 등이 있습니다. 마법소녀 만화 속 요술봉 같기도 하고, 아이돌 응원봉처럼 생긴 건데요. 한 주민은 어린 시절 그 전등이 켜질 때 신났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갑작스럽게 어둠을 맞이하면서 느끼는 신비로움도 있었겠지만, 요술봉같이 생긴 그 전등이 불러일으킬 감흥도 왠지 알 것만 같습니다. 이런 사적인 이야기가 오래된 건물 구석구석을 비추는 카메라와 이어지면서 과거든 현재든 한 공간에 정을 붙여본 사람이라면 이 다큐에 마음을 내주지 않을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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