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메모리아’, 가능한 모든 깨어남들의 체계
2023-01-05
글 : 김예솔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

* 영화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영화는 스크린의 적막을 깨뜨리는 ‘쿵’ 소리로부터 시작된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쿵’ 소리라고 적을 테지만, 그것이 불완전한 재현임을 상기해두고자 한다. 그 소리는 사실 ‘쾅’ 소리일 수도, 영어의 표현을 따라 ‘Bang’ 혹은 스페인어로 ‘Bum’이라 적을 수도 있다. 그 소리를 문자로 옮겨 적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슷한 이유에서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축음기를 실재계의 매체에 비유했다. 축음기는 소리를 기호화하지 않고 소리의 주파수적 속성을 그 자체로 기록하며, 그러므로 모든 우연한 청각적 사건들의 수집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메모리아>가 ‘쿵’ 소리와 함께 시작되고 그 소리의 기원을 밝히기를 영원히 유보할 때, 영화는 마치 축음기의 매혹처럼 기능하며 소리의 주술적 힘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만 같다.

한편 <메모리아>는 그 힘 속으로 충실하게 빠져드는 것만큼이나 영화로부터 빠져나오기라는 각성의 순간을 요구한다. ‘쿵’ 소리를 들은 제시카(틸다 스윈튼)가 잠으로부터 화들짝 빠져나온 뒤, 영화 내내 잠과 현실의 시차를 회복하려는 붕 뜬 얼굴로 배회하는 것처럼 말이다. <메모리아>는 무수한 각성의 순간들에 관한 영화다. 영화의 첫 장면을 다시 떠올려보자. 제시카가 자고 있었다는 사실은 오로지 제시카의 깨어남을 통해서만 밝혀진다. 제시카는 그 후 다시 잠들지 않는다. 그녀는 잠의 부재를 잊으려는 것처럼 반복해서 깨어나고, 잠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잠든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볼 뿐이다. 영화는 바로 영화라는 주술, 혹은 잠이라는 최면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각성의 순간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기(혹은 듣기)를 청하고 있다.

소리의 변주와 기록

이어지는 장면은 여러 대의 자동차가 일제히 사이렌을 울려대는 풍경이다. 물리적 충격 없이 스스로 울리는 자동차의 사이렌은 보이지 않는 유령적 힘의 존재를 암시한다. 더군다나 이 장면은 앞서 제시카의 ‘쿵’ 소리 직후에 등장했기 때문에 소음들 또한 여전히 ‘쿵’ 소리의 자장 안에서 들릴 수밖에 없다. 이 소음을 ‘쿵’ 소리의 첫 번째 변주라고 말해보자. 두 번째 변주는 도시의 건널목에서 일어난다. 갑자기 ‘펑’ 하는 폭발음이 들리고, 한 남자가 반사적으로 몸을 엎드린다. 머지않아 버스 배기관이 터지는 소리였음이 드러나지만, 남자는 자꾸만 뒤를 주시하며 총이나 폭탄이라도 있는 것처럼 불안하게 도망친다. 이 불신 가득한 몸짓에서 소리의 정체는 다소간 의심의 여지를 남긴다.

말하자면 ‘쿵’ 소리 이후 나타나는 두번의 소음은 ‘쿵’ 소리와 모종의 연관을 띤 채 변주되면서, ‘쿵’ 소리에 내재한 픽션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영화는 이 소리들 사이에 명백한 ‘등호’(=)를 가져다두진 않았지만, 소리들 사이의 관계를 ‘근삿값’(≒ 혹은 ≃)으로 표기하면서 ‘쿵’ 소리를 한 사람의 환청이라는 폐쇄적인 장소로부터 천천히 끄집어내며 공적인 기억과의 접속을 유도한다. 그 기억은 <메모리아>의 배경인 콜롬비아에 내재된 정치적 트라우마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50년이 넘도록 긴 내전을 겪은 곳에서 사소한 폭발음이 전쟁 기계의 공포를 소환하거나 불안을 야기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상징화될 수 없다는 특징 때문에 소리들간의 유사성을 더 쉽게 붙들 수 있는 소리의 성질은 서로 다른 종류의 굉음을 전쟁과 공포에 대한 인류의 무의식적 기억 자체와 (거의) 등치시킬 수 있게 만든다.

그런데 ‘쿵’ 소리가 세 번째로 재등장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이상한 낌새를 보인다. 제시카는 에르난(후안 파블로 우레고)이라는 사운드 엔지니어를 찾아가고, 에르난은 자신의 머리 속에서 들린 소리를 재현하고 싶다는 제시카의 자못 난감한 주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두 사람은 믹싱룸에 나란히 앉아 수많은 ‘쿵’의 변주들을 탐색한다. 에르난이 모니터 화면에 소리의 파형을 띄운다. 소리가 좀더 묵직했으면 좋겠다는 제시카의 말에 에르난은 높은 음을 깎아낸다. 그러자 파형은 좀더 납작해진다. 이 장면에서는 두 가지 각성이 발생한다. 하나는 이 믹싱룸이 마치 영화의 포스트 프로덕션의 믹싱 작업을 하는 장소처럼 보인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영화가 자기 자신의 기계장치적 성질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쿵’의 재현을 위해 최종적으로 활용하는 사운드가 영화 제작에 쓰이는 효과음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러한 자기 반영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또 하나의 각성은 이 장면에 이르러 소리의 미스터리가 잠시 탈신비화된다는 것이다. ‘쿵’ 소리가 이미지로 전환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전까지 자동차의 사이렌, 혹은 버스 폭발음과 공명하면서 모호한 실재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쿵’ 소리는, 에르난의 믹싱을 통해 파형의 이미지로 ‘데이터’화된다. 파형-이미지가 된 소리를 보며 떠올린 것은 포노토그래프(Phon-Au-tograph)라는 기계장치다. 포노토그래프는 소리의 진동을 파형으로 기록함으로써 소리를 시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이때의 파형 이미지는 소리의 실체를 보여주는 이미지가 아니며, 소리의 물리적 성질을 기록한 것에 가깝다.

그러므로 믹싱룸 장면은 영화가 장치의 환영으로부터, 소리의 미스터리로부터 빠져나오는 순간이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에서 이와 같은 유형의 각성은 낯설지 않다. <정오의 낯선 물체>에서 갑자기 촬영 스탭들이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이나, <친애하는 당신>에서 인물-배우의 실제 삶을 암시하는 텍스트가 난입하던 장면들을 떠올려보자. 그러나 위라세타쿤은 이를 소격효과처럼 다루기보다는 영화가 자신의 신비를 거두어낼 때야말로 신비의 정점에 이르게 된다는 듯이, 이러한 깨어남이 벌려놓는 간극에 거주하는 영화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려 했다. 그러나 <메모리아>가 전작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를 사운드, 정확히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간격이라는 미묘한 영역 속에서 시도한다는 것이다. <메모리아>가 얼핏 정적인 영화처럼 보이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메모리아>의 조용한 신비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영화가 영화를 이탈하려는 뒤척임을 향해 적극적으로 ‘귀 기울여야’ 한다.

영화의 죽음을 목도할 때

<메모리아>는 위라세타쿤의 다른 영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전반부와 후반부라는 구조로 나뉜다. 아마도 그 분기점은 터널일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유골을 조사하기 위해 공사 중인 터널을 방문한 뒤, 영화는 터널의 다른 출구로부터 빠져나온 것처럼 전반부를 느슨하게 복제하며 다시 시작된다. 영화의 후반부로 가면 데칼코마니처럼 또 한명의 에르난이 등장한다. 왼쪽과 오른쪽 얼굴이 다른 동상처럼 두명의 에르난은 각각 소리의 기록장치, 저장장치라는 기능으로 분화된 채 하나의 몸에서 떨어져나온 존재들이다. 즉, 두 번째 에르난이 제시카 앞에 나타나기 위해 첫 번째 에르난이 영화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렇기에 제시카가 종종 겪는 기억의 오인과 어긋남은 바로 두 번째 에르난을 만나기 위한 지난한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번째 에르난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는 바위, 콘크리트 같은 물질에 남아 있는 기억의 진동으로부터 이야기를 수집하며, 자신의 몸에도 과거의 진동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는 꿈조차 꾸지 않는다.

꿈이 기억의 정리와 망각을 돕는 뇌의 시간이라는 일반적인 해석을 따르면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꿈을 꾸지 않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 모른다. 제시카는 에르난에게 당장 잠자는 것을 보여달라는 자못 난감한 주문을 청한다. 그러자 에르난은 눕고, 눈을 뜬 채 미동 없는 상태가 된다. 제시카가 자신의 난초를 냉장고에 보존하려는 것처럼 에르난은 기억을 유실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멈춘다. 영화는 신체의 멈춤을 보여주기 위해 지속시간 그대로를 기입한다. 이처럼 이미지가 극단적으로 멈춰 있을 때, 흐르는 것은 개울가의 물소리, 원숭이들의 대화와 같은 영화의 사운드다.

영화는 이 장면에 이르러 이미지와 사운드의 분리를 통해 또 한번 각성의 순간을 자아낸다. 이와 반대의 경우, 즉 영화의 이미지는 운동하고 사운드가 묵음이 되는 경우는 많은 영화에 빈번하게 출현하며 유별나게 느껴지지 않는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자동차가 미사키(미우라 도코)의 고향에 도착했을 때 영화가 갑자기 침묵에 휩싸였던 것을 예시로 들 수 있을 테다. <메모리아>가 시도하는 것은 그 반대다. 이미지가 침묵을 구하고, 사운드가 생생하게 움직이는 것. <드라이브 마이 카>의 장면에서 침묵이 정서의 일시적 과장을 돕는다면, <메모리아>의 장면은 정서의 사사로운 체험을 넘어 일순간 영화가 함께 멈춘 것처럼 보이는 유난스러운 효과를 자아낸다. 영화의 정지, 영화의 죽음, 영화의 소멸, 영화가 발명할 수 있는 각성들에 관한 모든 것. 이것은 전적으로 사운드가 만들어낸 트릭이다.

기억의 보존을 위해 시간을 멈추는 것은 고고학의 소명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메모리아>가 실현하고자 했던 사운드를 통한 고고학이 비로소 이해된다. 기억을 지키려는 신체의 멈춤이 사운드와의 간극을 유난스레 드러내며 영화의 정지로 이어질 때, 이는 영화가 시간을 멈추는 것이 기억을 보존하는 방식이라는 연결을 미약하게나마 가능케 하는 것이다.

언제나 미래의 영화(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자 가장 영적인 순간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에르난은 제시카에게 자신이 저장장치이며 제시카가 안테나라고 말한다. 두 사람이 서로의 팔에 손을 가져다 대자, 주파수가 들어맞는 것처럼 기억-소리들이 틈입하기 시작한다. 이때 두 사람의 시선은 마치 소리들이 거기서 들려오기라도 한다는 듯이 창문 바깥을 향해 있다. 창밖은 소리가 들려올 수도 있는 외화면 공간이자 앞선 기억의 소리들이 현재와 공존하며 시간이 혼재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장소가 된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영화의 끝에 출몰한 우주선을 이해해보고 싶다. 우주선은 제시카가 들었던 ‘쿵’ 소리를 내며 파동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 우주선을 ‘쿵’ 소리의 실체를 형상화한 물체로 볼 때, 영화는 끝에 이르러 소리의 정체를 밝히고 영화의 허구적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뒤이어 이어지는 장면들과 나란히 놓고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누군가가 무전으로 전하는 말이 들린다. 그 목소리는 지진이 발생했고 그 지진 때문에 터널 공사 현장이 망가져 유골의 구멍은 확인이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모든 미스터리가 해소된 것 같지만, 두개골에 난 구멍 정도 크기의 신비로움이 여전히 남아 있다. 우주선과 우주선이 남긴 파동, 원인을 알 수 없는 지진과 두개골에 난 구멍은 ‘쿵’ 소리의 잔상 속에서 헐겁게 접합하며 인류의 기억이라는 고고학적 감각의 총체를 구성한다. 이를 감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영화의 자리일 것. <메모리아>의 전언이다.

노엘 버치는 영화의 사운드가 영상에 비해 언제나 뒤처져 있으며, 가장 ‘진전된’ 영화들에서조차도 소리라는 질료가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영화의 무한한 가능성이 새로운 영화 형식의 모색에 사운드를 참여시키는 데에 있다면, 사운드를 기민하게 다루고 영화 체험 전체를 사운드의 경험으로 치환하려는 <메모리아>는 미래를 겨냥하는 영화다. 그러나 한편으로 버치의 진단은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언제나 미래를 향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드리운다. <메모리아>는 좀처럼 도래하지 않는 미래와의 접촉 가능성과 그 간격을 좁힐 수 없다는 수렴 불가능성을 동시에 예증하는 것은 아닐까. 소리는 언제나 약간의 시차를 두고 도착하는 법이고, 영화는 그 시차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물색할 운명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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