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애프터썬’, 액체적 슬픔
2023-03-08
글 : 김예솔비
<애프터썬>이 플래시백을 체화하는 방식

어른이 된 소피가 스크린에 불쑥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영화는 넘실대는 기억의 주인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애프터썬>은 기억에 대한 메타포로 가득 차 있지만 회상을 드러내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식인 플래시백의 관습적 표기만큼은 숨긴다. 물론 곳곳에 힌트가 산재해 있다. 영화는 서사의 주도적 인물이 11살 소피(프랭키 코리오)이며, 또한 기억의 주인이기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둔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며 성에 눈뜨기 시작한 소피의 여름은 선명한 성장담의 구조를 갖고 흐른다. 반면 31살의 젊은 아빠 캘럼(폴 메스칼)의 사연은 인과적으로 전개되기보다는 불안한 파편들로 조각나 있다. 심지어 영화의 오프닝에는 노골적으로 어른 소피(셀리아 롤슨 홀)의 실루엣과 얼굴이 등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영화를 처음 대면한 관객에게는 아직 해석할 수 없는 주인 없는 정보들일 뿐이다.

다시 말해 <애프터썬>은 영화적인 기법으로 플래시백을 보여주는 것을 꽤나 오랫동안 유보하면서 기억이 시제 없이, 주인 없이 표류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플래시백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떠올리고, 그 단어가 끌어당기는 회상의 인력에 속절없이 휩쓸리게 되는 것은 왜일까. 보르헤스의 문장을 빌리자면 “한 단어를 항상 생략하는 것, 서투른 은유와 너무나도 분명한 완곡어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 단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가장 명확한 방법 중 하나다. 어른 소피가 등장하기 전까지 영화는 플래시백을 과감히 생략하는 빈자리를 통해, 영화의 완곡법을 통해 플래시백의 감각을 자극한다. 영화가 종종 기억과 노스탤지어의 클리셰를 운용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명백한 우회와 에두름을 통해 플래시백을 체화하는 영화의 방식을 발굴하려 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캘럼과 소피의 손에는 기록장치가 자주 붙들려 있다. 두 사람은 캠코더로, 물속에서는 방수 카메라로, 폴라로이드 필름으로 여행의 순간을 기록한다. 촬영된 캠코더 푸티지와 영화가 교차하는 구성은 <작은 빛>이나 <애프터 양> 같은 영화들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애프터썬>은 상실로부터 저항하기 위한 기록의 도구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성찰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애프터썬>에서 캠코더는 노스탤지어의 표상이자, 부녀가 함께한 여름의 시대적 배경을 짐작게 하는 클리셰적 사물이기도 하다. 캠코더가 영화 안에서 특수해지는 것은 도리어 캠코더가 기록하기를 멈추었을 때다.

소피가 캠코더로 캘럼을 인터뷰하는 장면은 오프닝에 등장했다가 영화의 중반부에 다시 나타난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중단되어 볼 수 없었던 영상의 뒷부분을 보여준다. 11살 때 지금의 자신이 뭘 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냐는 소피의 질문에 캘럼은 대답을 거부하고 캠코더의 전원을 단호하게 꺼버린다. 소피는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캘럼의 우울을 상기시킨 것이다. 그러자 소피는 질문을 바꿔 11살 생일에 무얼 했냐고 묻는다. 자신의 마음속에만 기록해두겠다는 소피의 말과 함께 두 사람의 모습은 절묘하게도 꺼진 브라운관 TV의 까만 화면에 비치고 있다. 이 장면에서 강조되는 것은 캠코더에 찍힌 푸티지보다도 캠코더가 꺼진 뒤에 꺼내는 캘럼의 어린 시절, 그리고 이를 자신의 마음에 녹화해두겠다는 소피의 기억에의 의지다.

캠코더에 내장된 기록 외의 기능 중 하나는 플레이백이다. 그리고 플레이백은 캘럼이 소피와의 시간을 붙잡는 방식이기도 하다. 캘럼은 늦은 새벽까지 촬영한 영상을 돌려보고, 소피와 다툰 뒤에도 캠코더 영상을 보며 마음을 진정하려 한다. 캘럼이 불과 몇 시간 전, 몇분 전의 시간을 재생하는 것은 자주 만날 수 없는 소피와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흘러 나가는 시간의 누수를 막기 위함인 것 같다. 한편 동일한 영상으로 되풀이되는 플레이백과 달리 어린 시절 아빠의 모습을 회상하는 어른 소피의 플래시백은 그것의 어원대로 번쩍거리는 섬광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클럽의 깜빡이는 조명 아래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캘럼을 붙잡으려는 소피의 안간힘은 플레이백과 플래시백 사이에서, 11살과 31살 사이에서, 어딘가 위태롭고 불안했던 형상과 그 의미 사이에서, 기록과 기록 바깥의 기억 사이에서 그 극복할 수 없는 간격을 삼키는 되감기의 몸짓이다. 끌어안으려 할수록 넘치는 액체적 슬픔이다.

분명한 것은, 영화가 명백한 소피의 회상으로 시작되었다면 이만큼 위력적인 감정의 파고를 남기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이다. 캘럼의 생일 아침, 잠든 소피의 익스트림 클로즈업 이후에 나타나는 것은 잠에서 깬 어린 소피가 아니라 침대에서 내려오는 어른 소피의 다리다.

이 갑작스러운 등장으로부터 영화는 비로소 긴 함구를 깨고 플래시백의 주체를 직접 드러낸다. 어른 소피의 장면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짧은 찰나에 오늘이 어른 소피의 생일이라는 사실, 그녀의 동성 연인과 함께 아기의 엄마가 되었다는 굵직한 서사 정보를 전달한 뒤 영화는 다시 어린 소피의 얼굴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한번 미래로 도약한 영화는 다시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소피와 캘럼이 보내던 느슨한 여름휴가의 모양에는 이제 회상이라는 층위가 덧씌워진다. 영화가 선형성을 뒤틀고 처음부터 다시 출발하는 듯한 감각을, 그로부터 지나온 장면의 의미가 달라지는 갱신의 감각을 기억의 작용이 아니면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애프터썬>이 “하나의 거대한 플래시백”(김소미)이라는 표현은 비유 그 이상이다.

<애프터썬>은 기록과 기억 사이에 놓인 차이, 그리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우울을 비로소 끌어안을 수 있게 된 시차를 영화의 방식으로 체험케 하기 위해 고민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기억의 출처를 소피의 내밀한 회상에만 귀속시키지 않는다. 캘럼이 버스에 치일 뻔하고, 난간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고, 천에 얼굴을 감싼 채 질식할 것처럼 숨 쉬고, 검은 심연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순간에 소피는 부재하거나 캘럼을 보지 못한다. 소피에게 엽서를 쓰며 끝내 무너져내리는 캘럼의 등은 대체 언제의 모습일까? 소피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서사상에 쉽사리 위치시킬 수 없는 장면들을 영화는 그대로 내버려둔다. 이 장면들은 소피가 없는 사이에 일어난 일일 수도, 소피가 방문 틈으로 목격한 것일 수도, 혹은 소피는 영영 보지 못했지만 추후에 떠올린 캘럼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일 수도 있다. 이 여름휴가는 어쩌면 부녀가 마지막으로 함께 보낸 시간일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추측들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영화가 후천적 상상을 적극적으로 부추긴다는 점이다. 영화는 불확정적인 자리를 통해 관객의 기억과 노스탤지어가 틈입할 수 있도록 한다. 영화가 감독의 자전적 역사를 반영한 이야기임에도 무수히 다른 판본들로 존재할 것만 같이 느껴지는 이유다. 그러나 이는 원본의 지위가 위태롭다는 징후이기도 하다. 영화가 플래시백이 되려 할 때, 그로 인해 영화 전체가 되감기의 의지와 그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비애라는 정서로 환원될 때 영화의 수행은 얄팍해질 수밖에 없다. <애프터썬>에 쏟아지는 찬사들은 정녕 영화를 향한 것일까, 영화를 삼킨 슬픔을 향한 것일까. 의문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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