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바빌론’, 결국, 구원은 없다
2023-03-08
글 : 오진우 (평론가)

<바빌론>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여러 요인 중 하나는 영화의 말미에 등장하는 몽타주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모아 몽타주한 것은 의외였다. 그의 영화의 특징은 연속성에 있었다. 원테이크로 찍은 듯한 <라라랜드>의 오프닝 신이 그 예다. 그에게 편집술은 숏과 숏의 경계를 지우고 하나의 연속적인 시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활동사진부터 3D영화 <아바타>까지 짧지만 강렬한 영화의 역사를 몽타주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빌론> 말미에 등장한 몽타주는 두개로 나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몽타주는 매니(디에고 칼바)가 영화를 보는 것이다. 1952년 매니는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할리우드로 여행을 와서 한 영화관에 들러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본다. <바빌론>은 이 영화의 리믹스다. 매니는 이 영화를 보며 과거를 반추하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발췌된 장면들은 앞서 본 <바빌론>을 소환시킨다. 이는 설사 <사랑은 비를 타고>를 몰라도 가능한 설계다. 영화가 여기서 끝났다면 <바빌론>은 호불호가 갈리지 않고 <라라랜드>의 답습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차이점은 존재한다. <라라랜드>에서 한때 연인이었던 두 남녀가 우연히 마주치고 시선을 교환한다. 그사이로 영화는 가정법의 몽타주를 펼친다. 수많은 뮤지컬영화를 오마주한 이 몽타주는 섬광처럼 빠른 속도로 스쳐간다. 두 사람에게 환원되지 않는 이 몽타주는 관객의 소망을 대리하는 측면이 있다.

영화인들이 겪는 불안과 공포

<바빌론>의 몽타주도 <라라랜드>처럼 숏/리버스숏 구성이다. 하지만 <바빌론>은 시선 교환이 없다. 스크린은 매니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바빌론>은 영화를 바라보는 일방향의 관람 조건을 매니의 짝사랑과 결부시킨다. 매니는 파티에서 배우 지망생 넬리(마고 로비)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둘은 끝내 연인이 되진 못한다. 매니는 그녀의 빚을 탕감하고 재기를 돕지만 결국 실패하고 할리우드를 떠날 계획을 짠다. 우연히 들른 파티에서 춤을 추다 둘은 약혼하지만, 그날 밤 넬리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매니에게 넬리는 영화와 같다. 잡힐 듯 사라지는 모래 같은 존재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바뀌는 격변기에 그곳에서 멀어진 매니가 그 시기를 돌파한 성공담인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며 흘리는 눈물은 왠지 모르게 짠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어딘가를 바라본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외로운 행위이며 <바빌론>의 인물들의 주된 몸짓으로 드러난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안현진 LA 통신원이 이를 질문했고 감독은 이에 대해 할리우드에서 사라지지 않는 감정인 ‘불안과 공포’를 영화에 담아내려 했다고 답한다. 이미 스크린을 장악했던 무성영화 스타인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영화라는 일시적인 장소에 오래 머물고 싶은 그는 변화를 꿈꾼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며 매니 앞에서 영화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며 새로운 영화 시대를 꿈꿨지만 결국 적응엔 실패한다.

<바빌론>은 <사랑은 비를 타고>처럼 영화인들이 겪는 불안과 공포를 목소리를 사용하는 데서 찾지 않고 무성영화에서 자유롭던 몸짓과 표현이 억압되는 것으로 드러낸다. 넬리는 파티에서 잘 놀았기 때문에 캐스팅됐고, 눈물 양까지 제어할 정도로 자유자재로 몸을 썼다. 하지만 유성영화를 찍으면서 사운드를 통제해야 했기에 배우의 몸은 기계에 맞춰진다. 또한 밤새 펼쳐진 광란의 파티는 한낮의 사교 모임으로 바뀐다. 파티는 ‘LA의 똥구멍’이라는 곳으로 자취를 감춰 더 음성적으로 열린다. 한낮의 사교 모임에서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억제했던 넬리의 고삐가 풀린다. 그녀가 뱉은 험한 말들과 구토는 변화하는 시대에 부적응의 표식과도 같다. 무성영화 시절 인물들은 원하는 것을 바라보고 욕망하고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 영화가 있었고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유성영화가 도래하면서 이들은 영화에서 점차 물러나 1952년의 매니처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다.

회한에 잠긴 매니 앞에 영화의 역사가 몽타주되기 시작한다. 이 두 번째 몽타주는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느껴진다. 이 몽타주는 영화를 꿈꾸는 자의 비전에 가깝다. 1952년의 매니에겐 자신이 찍을 영화를 열정적으로 피칭하는 <사랑은 비를 타고>의 돈 록우드(진 켈리)와 같은 열정이 남아 있지 않다. 다분히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비전을 녹인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역사에서 게임 체인저에 해당하는 영화들을 선별하여 엮은 이 몽타주에 굳이 의미를 붙이자면 ‘그럼에도 영화는 계속되어야 한다’(The show must go on) 정도의 영화 예찬일 것이다. 이 몽타주 이후에 잡힌 매니의 얼굴은 의미화가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이유는 그의 시선에 의해서 도출된 몽타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 번째 몽타주에서 흥미로운 것은 영화의 역사를 훑은 후에 붙는 이미지들이다. 이것이 <바빌론>이 보여주고자 했던 ‘영화’에 대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뭔가를 계속해서 섞어내려는 영화 전반에 깔린 감각과 연결된다. 영화는 코끼리의 똥으로 시작해서 온갖 추잡한 것들을 뒤섞는다. 영화 제작자 돈 월릭의 저택에서 열린 파티 현장이 그 전형이다.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모이고 술, 오줌, 피, 섹스, 마약 등등이 뒤범벅되어 난장판이 된다. 이러한 파티 분위기는 영화 촬영 현장으로 이어진다. 누군가는 마약을 팔고 누군가는 촬영하다 죽는다. 잭의 대기실은 밖의 전투 신의 여파를 몸소 체험한다. 볏짚이 날리고 창이 날아와 꽂히는 상황에서 잭은 왕관을 쓰고 태연하게 술을 먹으면서 대사를 읊는다. 이러한 뒤섞인 감각은 의미론적으로 몽타주다.

아름다운 고민거리

영화의 역사를 몽타주한 뒤에 붙는 이미지에서 눈에 띄는 것은 빛의 삼원색이다.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의 이미지가 빠르게 지나간다. 세 가지 색을 모두 섞은 색인 흰색도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흰색을 상징하는 것으로, 아무것도 영사되지 않은 텅 빈 스크린은 <바빌론>이 보여주지 않은 유일한 것이다. 여러 색의 염료가 뒤섞인 액체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은 머릿속에서 색의 조합을 유도하는 것으로 읽힌다. 여기에 두 번째 몽타주의 시작점에 영화는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을 비춘다. 영화는 빛의 예술이기 때문에 이 숏은 몽타주를 정당화한다. <바빌론>의 인물들의 욕망과 불안을 표출하는 시선이 맺힌 곳은 가능성의 세계인 흰색 스크린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도 영화의 문제적 몽타주를 이해해보려는 과잉 해석으로 비치기 쉽다. 시선에 따른 몽타주의 유혹을 이야기한 바 있는 장뤽 고다르에게도 몽타주는 ‘아름다운 고민거리’였다. 데이미언 셔젤의 몽타주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화와 긴밀한 연결 지점들이 보였으나 결과적으로 손쉬운 결론을 내기 위한 방편이 되었고 결국 영화를 구원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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