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5일 이강현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47살, 이른 작별이다. 이강현 감독은 다큐멘터리 <파산의 기술>(2006)과 <보라>(2010), 단 두편의 작품으로 한국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이름이 되었다. <얼굴들>(2017)은 극 장편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그가 세편의 작품만 남겼다는 사실은 애석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작가의 세계를 구성하고 가늠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까지
여기에 추가로 덧붙일 작품이 있다. 미완의 차기작 <지도를 만드는 사람>이다. 2015년, <씨네21>을 통해 그의 만들어지지 않은 다큐멘터리에 관해 인터뷰했다. 지금은 폐지된 다큐멘터리 제작 지원 프로그램의 본선 진출작을 소개하는 지면에서다. <지도를 만드는 사람>은 위치 기반 서비스로 대중화된 우리를 둘러싼 ‘맵’ 뒤의 보이지 않는 기반을 드러낼 작품으로 기대되었다. 동명의 작품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그의 다음 작품 <얼굴들>에서 감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상한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얼굴들>은 여러 층위에서 말하기가 가능한 작품이지만, 각자의 지도를 만드는 이들의 이야기라고도 정의할 수 있다. 혜진(김새벽)은 어머니의 식당을 리모델링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맛의 길을 찾는 사람으로, 그 과정에서 마주한 우연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현수(백수장)는 택배 배달을 위해 누군가의 집을 찾는 사람이었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가 쓴 일기를 라디오 사연처럼 우리에게 배달하는 전달자로 이행한다. 기선(박종환)은 시차를 두고 제자 진수(윤종석)를 찾지만, 끝내는 길을 잃은 사람으로 남는다. 각각의 세계는 잠시 겹쳤다가 분리된다. 지도를 만드는 작업은 중심을 나눠 갖는 인물들과 더불어 단일하지 않은 작업으로 구체화된다.
인물의 사연과 동선이 느슨하게 연결되는 양상은 그의 다큐멘터리에서 예견되었다. <보라>는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미세 먼지에 노출된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건강검진 과정을 보여준다. 먼지는 인체에 장기적이고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물질이지만,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위험성은 간과된다. 작업장에서 마스크는 필수가 아닌 권고에 가깝고 검진에서 주로 확인되는 건 술과 담배 같은 개인 관리 여부다. 영화는 특수 작업 환경에 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기록용 사진을 찍던 노동자의 등장을 기점으로 인터넷 연결 회사에서 야근하는 사람의 이야기와 사진 워크숍 프로그램에 참여해 출사 모임을 하는 아마추어 사진가들, 메모리를 복구하는 사람의 이야기 등으로 펼쳐낸다. 이는 감독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는 효과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예술적 자의식의 발현도 아니다. 이야기를 엮는 감독의 방식은 연결을 위한 연결이 아니라 하나의 숙명과도 같다.
<파산의 기술>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 중 하나는 낡은 벽에 붙은 전단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과 내레이션 목소리다. 광고 전단은 행사가 예정된 며칠이 지나면 쓸모없으며, 시효가 있을 때조차 대다수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여기에 눈길을 두는 이는 누구인가. 그는 왜 그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끈질기게 바라보는가.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은 오직 낡은 벽뿐이지만, 이상하게도 화면에서 지금 여기에 카메라를 들고 끈질기게 바라보는 누군가의 몸을 상상하게 된다. 벽에 들러붙은 전단에서 비롯된 사유는 보는 이를 압도하거나 섣부른 상념에 그치지 않는다. 내레이터는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이 지금 여기 하나의 벽을 공유하는 내용과 모양을 유심히 바라본다. 또한 일시적으로 벽을 공유한 전단들 뒤로 켜켜이 쌓인 쓸모없는 것들의 역사를 상상한다. 감독은 이를 ‘벽은 앞으로 자란다’고 표현한다. 이 말이 그의 작업을 아우르는 요약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은폐되거나 사라지거나 쉽게 볼 수 없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일단 앞에 놓인 것을 오래 바라본다.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두편의 제목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다. ‘파산의 기술’은 파산에 관해 서술하는 말이라는 뜻이지만, 그보다는 파산의 방법론이라는 의미의 ‘기술’로도 읽힌다. ‘보라’는 고통의 색깔로서 보라색을 일컫지만, 그와 동시에 ‘보라’라는 선언처럼 읽힌다. 그에 비해 ‘얼굴들’은 중의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지칭한다고 말하기에는 지극히 포괄적인 단어다. 사실 <파산의 기술>쪽이 ‘얼굴들’이라는 제목과 더 어울린다. <파산의 기술>에서 개인 파산을 경험한 여성들과의 인터뷰 장면에서 인터뷰이들의 얼굴이 입 혹은 눈 등으로 부분 클로즈업된 채 등장한다. 실험적인 프레임으로 보이지만, 실은 방송에서 음성과 얼굴을 변조하고 가리는 방식에 대항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된 방식으로 보인다. <얼굴들>은 그러한 표면의 조정 없이도 같은 결과에 가닿는다. 영화에서 얼굴은 인식의 중심지가 아니라 무인으로 남아야만 하는 맵과 CCTV의 세계를 교란하는 요철 노릇을 한다.
중심을 정하지 않은 변두리의 영화
이강현의 작업은 다른 감독만이 아니라 이론과 비평을 실행하거나 꿈꾸는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평론가가 좋아하는 영화라는 수식어는 감독에게 결코 영광스러운 호칭은 아닐 테지만, 그의 영화를 향한 관객과 평단의 애정은 예술적 취향에 의한 지지 표명을 넘어선 감정적 유대에 가까웠다. 그와 같은 유대감은 흡사 발터 베냐민을 향한 이론적 호응을 넘어선 애정과 질적으로 유사한 데가 있다. 베냐민은 거리의 산책자로서의 사상가다. 그의 사유는 이론과 현장이라는 인식적 괴리를 뛰어넘는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이강현이 남긴 세편의 영화는 중심을 정하지 않은 변두리의 영화이며, 무언가를 찾아 배회하거나 어딘가에 붙들린 사람의 영화다. 특히 소재에 따라서만 분류되고 호명되며, 내용과 형식이 분리된 채 거론되는 다큐멘터리의 경향 속에서 그의 영화는 소재와 예술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채, 묵묵히 자신의 거리에 존재했다.
경계를 넘는다는 말은 예전처럼 소수가 점유한 특권적인 말이 아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영화와 드라마 시리즈,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등 경계를 넘는 창작자들은 많다. 그 경계 위에서 평자는 종종 판단을 유보하거나 양보한다. 그러곤 시도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포장한다. 이강현이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이행했을 때, 이상하게도 경계를 넘을 때 오는 충돌 지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극영화가 다큐멘터리와 확연히 달랐음에도, 극영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우리는 양보할 것이 없었다.
이강현의 영화에서 실험의 지표와 현실적 지표는 무관하지 않다. 이를테면 <보라>에서 붐마이크 노출은 다큐멘터리의 제작 현장을 노출하는 자기 반영의 지표가 아니라 소음이 가득한 현장에서 대화를 포착하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제작 동선이 프레임에 잡힐 수밖에 없는 너른 틀 잡기는 보지 못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봐야 할 것을 미리 재단하지 않겠다는 고집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 관해 뚜렷한 해석과 의도의 지점을 던져주지 않았다. 여전히 궁금할 만큼만 자신의 영화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제 완전한 수수께끼가 된 작품 속에서 그를 향한 비평과 감응의 불길이 여전히 타오르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