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직을 준비 중인 30대 진영(이설)과 무뚝뚝한 경상도 아버지(박지일) 사이에는 다정한 대화가 없다. 가정과 일터에서 관계의 중심을 담당하던 어머니(안민영)가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진영과 아버지는 어색하게나마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만, 다른 미래를 꿈꾸는 두 사람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흐르다>는 단편영화 <나만 없는 집>(2016)으로 제16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입문반>(2019)으로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현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진영 역은 데뷔 3년 만에 드라마 <나쁜 남자> <악마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의 주연을 맡은 배우 이설이 맡았다. 이설은 <흐르다>를 “표면은 잔잔해 보여도 끊임없이 흐르는 호수” 같은 영화라고 소개하면서, 관객이 이번 작품을 통해 “고여 있는 것 같아도 매일 조금씩 움직이고 변하고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첫 장편영화의 소재로 ‘부녀 관계’를 택한 계기는 뭔가.
김현정 가까운 관계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포착하는 데 흥미를 느끼는 편이다. <흐르다>는 관계가 소원한 부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구상에서 시작됐다. 경상도 가족의 서먹함 내지 강압적인 분위기를 영화에 표현하고 싶었다. 가족 내의 어떤 문제는 표현의 부재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궁금증을 풀어내고자 했다. 지금까지 제작한 단편의 아이디어를 모아 오롯이 다 쏟아내려 했다.
전작에 이어 <흐르다>의 배경도 대구로 설정했다. 촬영도 대구에서 했다고.
김현정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잘 이해하는 환경을 배경으로 삼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단편영화처럼 대구에 사는 경상도 가족을 소재로 택했다. <흐르다>는 대부분 대구에서 촬영했는데, 나에게 익숙한 공간이어서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다. 다만 지역의 영화 제작 후원이 장편보다 단편에 치중되어 있어, 장편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아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지역에서도 장편영화 제작에 관심을 기울여주면 좋겠다.
진영 역에 이설 배우를 낙점한 이유가 궁금하다.
김현정 처음에는 진영과 이설 배우의 성격이 반대여서 궁금했다. 이설 배우는 에너제틱하고 소신 있는 모습이 많은 반면 진영은 자주 주춤하곤 한다. 이설 배우가 어떻게 진영을 연기할지,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같이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시나리오를 전달했다. 함께 <흐르다>를 만들어가면서 이설 배우에게 반했다. 동물적으로 연기하는, 감각이 탁월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설 평소에 김현정 감독님의 작품을 굉장히 좋아했다. 단편영화 <입문반>을 본 후에는 감독님의 고뇌가 얼마나 깊었을지 궁금했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감독님의 작품은 삶의 어떤 조각을 떼서 다큐멘터리처럼 현실적으로 가감 없이 보여주는 듯해서 매력적이다. <흐르다>의 시나리오는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어서 흥미로웠다. 무미건조하면서도 무언가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상을 받았고, 이 이야기를 어떻게 감독님만의 방식으로 풀어낼까 궁금해서 함께하게 됐다.
진영은 지방에 사는 젊은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을 보여준다. 가부장적이고 기회가 적은 지역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캐나다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려고 애쓰는 장면은 현실적이어서 안타깝기도 했는데.
김현정 진영이라는 인물에는 나의 경험도 스며들어 있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 관계를 잘해내고 싶다는 마음과 달리 틀어지고 만 경험들이 개인적으로는 강렬하게 다가왔다. 사실 나는 관계 안에서 답답함과 불편함을 느껴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진영을 통해 평상시에 하지 못했던 것을 한번 시도해보고 싶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자신을 옥죄는 상황에서도 진영이 끝내 캐나다로 떠나는 장면엔 응원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다.
진영 어머니의 장례식 장면은 생략됐다. 대신 10초 넘게 정적이 흐르는 검은 화면을 삽입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김현정 <흐르다>는 진영의 서사이면서 부녀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부녀 관계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발생하는 딸과 아버지의 상황에 빨리 돌입해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감정이 격해질 수 있는 장면은 배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어머니의 죽음을 어떻게 묘사할지 고민이 컸다. 정적이 흐르는 검은 화면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설명이 될까부터 시작해서 그 장면의 길이는 얼마가 되어야 할지 편집감독과 계속 논의했다.
이설 개인적으로는 정적인 검은 화면으로 처리된 신이 마음에 들었다. 인물이 상복을 입고 영정 사진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장례식 장면은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볼 수 있지 않나. 사람이 큰 충격을 받으면 시공간이 잠시 멈추는 것처럼, 검은 화면은 그런 순간을 느낄 수 있는 어떤 영화적인 체험으로 다가와서 좋았다.
지금 우리 곁의 수많은 진영에게 한마디 한다면.
이설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국경을 넘나드는 시대가 오지 않았나. 스스로 고이지 말고 계속해서 도전하면서 살면 좋겠다. 이제 그래도 되는 것 같다.
김현정 우리 사회에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 누구나 엎어질 수 있는데도. 그런 분위기 탓에 진영이 더 움츠러들 것 같았다. 진영을 관용적으로 기다려주는 분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