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취임한 2013년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이 제기되고,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에서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을 지냈던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해였다. 손석희 현 JTBC 총괄사장이 성신여자대학교 교수에서 JTBC 보도 담당 사장으로 이적해 화제를 모은 것도 이때였다.
영화계는 역대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처음으로 총관객수 2억명을 돌파했고 인구 1인당 연간 평균 관람횟수는 세계 최고 수준인 4.25회를 기록했다. 이는 침체기였던 2008년 대비 41.4% 증가한 수치다.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감독이 할리우드와 협업한 결과물이 극장에서 관객을 만났고, 연간 박스오피스 상위 10편 중 9편이 한국영화였을 만큼 한국영화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은 해였다. ‘믿고 보는 배우’ 하정우는 먹방 열풍의 수혜까지 입으며 대중 호감도를 살뜰히 챙겼고 <관상>의 수양대군 이정재가 재전성기를 누리며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배우로 선정됐다.
대선 직후, 관객은 위로를 원했다
2013년 극장가의 가장 큰 이변은 <7번방의 선물>이었다. 당시 경쟁작이었던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이 개봉한 후에도 기세가 꺾이지 않고 오히려 반응이 더 뜨거워지면서 최종 관객수 1281만명을 기록했다. 당시 투자책임을 맡았던 변승민 클라이맥스 스튜디오 대표는 “타 영화 배급 시사회에서 예고편을 공개했을 때부터 극장 관계자들에게 반응이 좋았다. 블라인드 시사회 평점도 높게 나와서 대작이 아님에도 자신 있게 선보였다”고 설명했다. 또한 “당시 굵직한 정치사회적 사건들이 있었고, 어떤 이유에서건 따뜻한 위로를 받고자 하는 분위기”(변승민 대표)가 관객을 극장으로 유인했다. “개봉 후 장기 흥행이 가능한, 흔히 말하는 ‘뒤가 열려 있는 날짜’에 작품을 선보인”(류상헌 NEW 유통전략팀 팀장, 임성록 NEW 그룹홍보실 과장) 전략도 유효했다. 대작이 몰리는 연말과 2월 설 연휴 사이 틈새시장을 공략해 입소문을 탈 수 있었던 것이다. 대선 이후 사회 분위기가 가장 직접적으로 작용한 작품은 2012년 12월19일 개봉해 최종 관객수 591만명을 기록한 <레미제라블>이다. 홍보마케팅을 담당했던 박주석 당시 레몬트리 실장(현 영화인 이사)은 “방송국 보도국 기자들이 단체로 영화를 관람한다든지 단순히 한편의 영화로 관람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Do you hear the people sing>(민중의 노래) 같은 주제곡이 당시 선거 시국과 맞물리면서 좀더 많은 분들의 감정에 가닿는 요소가 있었다.”(박주석 이사) 연말에 개봉한 <변호인>은 대통령 선거와는 시차가 있었지만 “리더나 지도자에 대해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볼 만한 시기”(강효미 퍼스트룩 대표)에 관객을 만나면서 만족감을 줬다는 분석도 있다.
스타 마케팅과 밈의 시대
“아침에 스코어를 보면서 ‘이게 가능한 숫자야?’라고 생각했다. 텐트폴도 아닌 6월 개봉 한국영화에서 나올 수 없는 숫자였다.”(장보경 딜라이트 대표) 아무리 <해를 품은 달>의 김수현이 주연을 맡았다지만, 현충일 당일에 91만 관객이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을 것이라 예상한 관계자는 거의 없지 않았을까. 당시 영화의 마케팅을 맡았던 이현정 쇼박스 콘텐츠운영본부 본부장은 “2013년은 초반 마케팅이 관객 몰이에 용이했던 시절”이라고 설명했다. “2012년 <도둑들>이 한국영화 최초로 레드 카펫 행사를 열었고, 아직 관객과 스킨십하는 행사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김수현의 쇼케이스, <연예가중계> 출연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이슈가 되어 팬덤화됐다. 또 웹툰 원작 작품이 나오던 초창기 작품이었다. 웹툰과 배우들의 팬덤, 김수현의 연기력이 맞아떨어지면서 ‘이렇게까지 팬덤이 막강할 수 있구나’를 경험했다.” (이현정 본부장) 여름 시장에서 558만명 관객을 동원한 <더 테러 라이브>는 “대중이 하정우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캐릭터”(이시연 홍보마케팅사 흥미진진 대표)였기 때문에 단순하고 쉬운 마케팅을 펼쳤다. 아직 ‘밈’이라는 표현이 보편화된 때는 아니었지만, <설국열차>는 1등칸과 꼬리칸, 바퀴벌레로 만든 양갱 등이 화제를 모아 개봉 직전 붐업에 성공했다. “계급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설국열차>는 정치사회적 분위기보다도 놀거리로 접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적이면서 ‘덕질’하기 딱 좋은 작품이었다.”(박혜경 앤드크레딧 실장) <관상>은 수양대군(이정재)의 등장 신에 엑소의 <으르렁>을 입힌 바이럴 영상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면서 온갖 유행어를 탄생시켰다.
새로운 시도와 한국영화의 실질적 전성기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역대 최다 사전 예매 관객수(34만명), 역대 한국영화 일일 최다 관객수(91만명)를 기록했다. “엄청난 스크린을 장악하는, 마블 시리즈가 열어젖힌 시대가 오기 전이었다. 몇년 후 <신과 함께-인과 연> 일일 관객수가 146만명을 기록했는데, 그런 막강한 시장이 시작된 시기였다.”(장보경 대표) 이어지는 여름 시장엔 <설국열차> <더 테러 라이브> <숨바꼭질> <감기> 등이 연달아 흥행에 성공하며 “한국 영화 시장이 화양연화에 진입”(이채현, 이나리 호호호비치 공동대표)했다. 이현정 본부장도 “2013년은 영화가 가장 핫했던 시기”라고 기억한다. “곧 어떤 영화가 개봉하는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새로운 요소를 잘 심어주면 사람들의 궁금증을 유발할 수 있었다. 이름값 있는 배우들이 나오는 멀티 캐스팅 영화가 사실상 실패하는 경우도 별로 없었다.”(이현정 본부장)
이같은 호황을 누릴 수 있던 것은 새로운 기획에 도전하고 이를 반길 관객 또한 존재했던 분위기가 큰 몫을 했다. CJ ENM, 쇼박스, 롯데엔터테인먼트 3강 구도에 뛰어든 신생 배급사 NEW는 연간 박스오피스 상위 10개 작품 중 4편을 투자·배급했는데, 이는 시장에 분명한 긴장감을 줬다. 신선한 아이템을 발굴할 만한 유인이 된 것이다. 당시 신인이었던 허정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손현주가 출연한 <숨바꼭질>은 여름 시장 막바지에 개봉해 깜짝 흥행(560만명)에 성공했다. “우리 피부에 와닿을 수 있는 괴담”(변승민 대표)에 장르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이 당시 관객에게 새롭게 다가갔다. 또한 “6월부터 7월 초까지 <맨 오브 스틸> <월드워Z> <퍼시픽 림> 등 블록버스터급 외화 중심으로 편성이 잡힌 상황에서 한국영화의 존재감이 돋보일 수 있는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는 유통 전략”(류상헌 팀장)을 세워 좋은 기획이 선택받을 수 있는 시기를 고심한 것 또한 중요한 성공 요인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