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ituary]
[추모] 작곡가, 피아니스트, 영화음악 감독 류이치 사카모토 (1952~2023)
2023-04-07
글 : 김나희 (클래식음악평론가)
손 끝에 만져지는 음악

류이치 사카모토가 3월28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며칠 뒤인 4월2일에 <교도통신> 등 일본 매체를 통해 보도되었다. 향년 71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류이치 사카모토는 영화음악과 전위음악을 아우르며 미디어아트 작가, 배우, 환경운동가로서도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소속사는 고인이 그동안 “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창작 활동을 이어가며 마지막까지 음악과 함께했다”고 전했다. 그는 마지막 앨범 《12》를 2021년과 2022년에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녹음해 2022년 1월에 발매, 도쿄에서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인생의 마지막 피아노 솔로 콘서트를 선보였다.

영화에 대한 가장 최초의 기억을 꼽으라면, 나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를 떠올린다. 영화가 얼마나 걸작인지를 다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렸지만 몇몇 시퀀스와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 <Rain>은 나의 첫 영화적 기억으로 남았다. 힘 있는 피아노 반주 위로 마리아 칼라스나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목소리처럼 호소력 있게 쏟아지던 바이올린 선율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의인화하자면 한뼘 더 가까이 손을 뻗고 있는 듯한 소리였다. 듣는 사람이 가만히 허공으로 손을 뻗으면, 이미 내밀어져 있는 그 손을 맞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작곡가로서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진짜 예술가였다. 1970년대 초반 도쿄에서 작곡을 전공한 그가 남들처럼 베베른이나 쇤베르크, 베르크를 흉내내는 곡을 쓰지 않기 위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했을지 헤아려보면 더욱 그렇다. 존재하지 않는 길을 내고 또 내면서 한 걸음씩 걸어가려면 고독을 감내해야만 한다. 오스카나 그래미 같은 세계가 인정하는 모든 상을 다 받으며 인정과 칭송을 받는 것과는 별개로 창작의 길은 외롭고도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의 몸에 두번의 암이 습격할 만큼.

류이치 사카모토는 “나는 전위적인 사람에서 대중적인 사람으로 변했다”고 말하며 자신의 음악이 사회적 또는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스스로 강하게 느끼는 대의적 메시지를 앞장서 설파했고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아이콘으로 존재했다. 레코드에서 CD로, 아이튠즈로 담은 아이팟에서 스마트폰의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듣는 방식과 재생 매체가 달라지는 동안,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이 선 곳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말러, 스트라빈스키가 그러했듯, 담담하게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한없이 사람을 감싸주는 듯하면서도 아방가르드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지닌 그의 음악은 추상화나 다소 난해한 현대미술과도 잘 어울렸다. 언젠가 정명훈이 이끄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연주를 듣고 자정쯤 24시간 오픈 중인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를 본 적 있었다. 이어폰으로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들으며 한참을 걸었다. 여백이 있는 그의 음악 속에서 색채가 넘실대는 라디오 프랑스 특유의 소리와 에드워드 호퍼 그림의 고독이 맞닿아 다시 새로운 무언가로 거듭나는 경험을 했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그가 가장 좋아했고 존경했던 드뷔시와도 그 행보가 무척 닮아 있다. 드뷔시는 후기 낭만의 시대에 이미 회화에 도달해 있었던 인상주의를 음악으로 구현해 새로운 영토를 개척했다. 영화음악이라는 장르의 수준과 경지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가져간 류이치 사카모토는 다양성, 혁신, 아름다움을 통해 다양한 장르의 경계를 허물었다. ‘국적’이나 ‘경계’ 같은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새로운 것, 누구도 하지 않았던 것을 거듭하며 음악과 영화, 예술계 전반에 자신의 인장을 남겼다.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2017)에서 보여지듯 류이치 사카모토는 쓰나미 피해로 악기로서의 수명을 다 한 피아노가 다시 연주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루아침에 닥친 재앙으로 우리의 세계가 무너지고, 그 파편에 상처입고 쓰러져 심하게 손상되더라도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음악을 통해 전해져 깊은 울림을 준 덕분이었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에는 이런 그의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봉인된 시간>으로 먼저 접한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솔라리스> O.S.T를 써내려는 그의 노력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도 감사한 일이었다. 타르콥스키가 영화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하나의 음표나 악상에서 출발하는 작곡가의 마법 같은 그것과 일치한다는 것, 그래서 타르콥스키의 모든 장면들에서 마치 배음(피아노 건반에서 도를 누르면 도뿐만 아니라 미 혹은 솔도 조화롭게 합쳐져 하나의 음처럼 들린다.-편집자)처럼 음악이 아련하게 들려온다는 것을 알고,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희미한 그 소리들을 보다 또렷하고 선명한 것으로 치환시켜 세상에 남기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보기 드물게 진정성 있는 무엇이었다. 그의 음악을 통해 받은 위로와 에너지 덕에 삶에서 맞닥뜨린 엉킨 매듭을 차분히 풀어나갈 수 있었던 사람이 어디 나 하나뿐이겠는가. 무수한 이들이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고통은 지나가며 아름다움은 남는다. 인생은 짧으나 예술은 길다. 그의 음악은 오랫동안 우리 곁에 남을 것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대표작

<전장의 크리스마스> 사운드트랙(1983) 동명의 영화 사운드트랙으로 감수성 넘치는 타이틀곡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가장 유명한 음악으로 알려져 있다. 피아노를 꿈꾼다면 악기를 통해 이 정도의 감수성과 정서를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되고, 작곡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생 한번이라도 이런 곡을 써내고 싶다는 열망을 불어넣는 명곡.

<마지막 황제> 사운드트랙(1987) 류이치 사카모토는 중국 전통음악과 오케스트라를 조화시켜 이 사운드트랙 작업으로 오스카를 수상한 최초의 아시아 출신 작곡가가 되었다. 베르톨루치의 탐미적 영상 미학에 완벽히 부합하는 놀라운 걸작.

《Neo Geo》(1987)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 앨범 《Neo Geo》는 전자음악, 어쿠스틱이 섞여 있고 멜팅 팟 안에서 일본 전통음악 요소, 팝, 록이 독특하게 융합되어 있어 그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BTTB》(1999) 솔로 피아노 앨범인 《BTTB》는 ‘Back to the Basics’의 약자,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류이치 사카모토의 모습이 듬뿍 담겨 있다. 드뷔시의 영향을 받은 간결하고도 한폭의 회화 속 붓자국과 같은 음악들이 실려 있다.

《async》(2017) 실험적 일렉트로니카의 최고 걸작, 일렉트로닉과 오케스트라 음악이 류이치 사카모토가 천착한 시간과 자연이라는 주제를 만나 절묘하게 녹아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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