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심리학자로 <그것이 알고 싶다> 팬들에게 오랫동안 눈도장을 찍어온 박지선 교수의 무비 프로파일링 토크쇼 <지선씨네마인드>는 <그것이 알고 싶다>의 유튜브 채널 콘텐츠로 첫발을 뗐다. 누적 조회수 1500만뷰를 돌파하며 인기를 증명한 이후 2022년 9월 SBS TV프로그램으로 정규 편성되었고, 지난 4월2일에는 시즌2도 방송을 시작했다. 8편의 에피소드를 이어가는 이번 방송에서 박지선 교수는 범죄수사극은 물론 <부산행> <이터널 선샤인> <빌리 엘리어트> <케빈에 대하여> 등 의외의 큐레이션을 더하며 사회심리 전문가이자 영화광으로서의 다채로운 면모를 선보인다.
- 시즌1을 향한 호응에 힘입어 시즌2까지 이어가게 됐다. 방송 경험에서 찾은 나름의 재미가 있다면.
= 10년 가까이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주로 혼자 인터뷰를 했었다. <알아두면 쓸데있는 범죄 잡학사전>(이하 <알쓸범잡>)으로 처음 여러 패널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형식을 경험해봤다. <지선씨네마인드>가 즐거운 건 함께하는 장도연씨와 기계적으로 대본의 내용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진심을 담아 대화한다는 것이다.
- 범죄 분석뿐만 아니라 등장 인물들의 심리를 깊이있게 짚어준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이 호응하고 있다.
= 둘이서 혹은 게스트를 포함해 많아야 3명이서 이야기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캐릭터의 내면을 심도 있게 다룰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반갑다. 영화 클립을 여러번 짧게 끊어가며 화려하게 편집했을 때 시청자들의 주의를 붙잡아 둘 수 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내용의 밀도가 쌓이고 핵심에 가 닿을 때 유의미한 분당 시청률 추이가 관찰된다고 하더라. 감사한 일이다.
- 시즌1의 <밀양>, 시즌2의 <이터널 선샤인> 등 영화 선정에서 분석자의 취향도 엿보이는데.
= <밀양> 편에선 유괴범에 관한 분석을 하긴 했지만 사실 내게 <밀양>은 위로에 관한 영화로서 의미가 크다. 종찬이란 인물에게 배웠다. 누군가의 비극과 고통 앞에서 공존하는 자세가 무엇인지를. 섣불리 상대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하거나 넘겨짚지 않으며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알고 곁에 조용히 있어주는 존재가 피해자들 곁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송강호 배우가 연기한 인물을 통해 깨달았다. <이터널 선샤인>은 심리학자의 관점에서 보기에 사랑을 통한 개인의 성장에 관한 영화다. 마지막 장면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재결합이 관계의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유년기의 트라우마나 연애의 뼈아픈 실패를 두루 경유하는 영화이고, 두 인물 모두 종국엔 자기 상처를 인정하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 치유와 성숙의 과정이 일어난다는 것만으로도 <이터널 선샤인>의 여정은 충분히 아름답다.
- 범죄심리학자로서 영화를 볼 때 작품의 선정 및 접근 방식 면에서 어떻게 달라지나.
= 예를 들자면 2009년 <살인의 추억>이 개봉했을 때 보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언젠가 내게도 화성 사건 자료가 올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면 선입견이 생길 것 같았다. 범인 이춘재가 잡히고 나서야 사건 자료를 보게 되어서 분석을 마쳤다. 그리고 얼마 전 드디어 <살인의 추억>을 볼 수 있었다. 범인을 상상할 수 밖에 없던 시절에 제작된 영화인데도 등장인물들과 범인 이춘재 사이에 닮은 점들이 꽤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박해일 배우가 연기한 인물 뿐 아니라 여러 캐릭터들이 조금씩 그 특징을 나눠가지고 있었고, 실제 사건의 진범이 잡히길 바라는 봉준호 감독님의 집요한 열망을 실감했다.
- 2009년부터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해 유독 어렵고 센 사건들의 자문을 맡아왔다. 박 교수가 출연하면 ‘그알’ 하드고어 편이라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더라.
= 석사 학위는 살인, 박사 학위는 연쇄성범죄 관련한 논문으로 받았기 때문에…. (웃음) 기본적으로 방송에서 미제 사건 위주로 다루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소 센 사건들이 많이 부각되는 경향도 있을 것이다. 처음 방송에 합류하게 된 건 경찰대학교 교수 임용 면접을 보던 시기였다. 처음 의뢰받은 사건은 이태원 살인 사건이었다. 방송국에서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건네주었고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날 정도로 치열하게 분석했다. 편집된 방송엔 1분 남짓 나가지만 준비하는 기간은 최소 열흘 정도 걸린다. 방송 출연이나 유명세가 목적이라면 강의와 절대 병행할 수 없는 일이다. 억울한 피해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과 꾸준히 공부하는 길이라는 생각에서 계속할 수 있었다.
- ‘사이코패스에 관한 대중의 인식과 두려움’이라는 논문을 썼다. 2000년대는 바야흐로 사이코패스 장르의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사이코패스에 관한 대중의 관심이 어디에서 기인했다고 보나.
= 우리 사회는 특히 사이코패스를 ‘사패’라고 줄여 부를 정도로 일상 용어처럼 쉽게, 그리고 많이 쓴다. 많이 쓰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건 결국 두려움과 연결돼 있다. 보통 사람들은 사이코패스라고 하면 공감 능력 없고 잔인한 짓을 저지르면서 정작 본인은 둔감한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주변 사람 중에서 나한테 피해를 끼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에 대한 공포가 있는 거다. 가스라이팅이란 용어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까운 타인에 대한 불신과 통제에의 공포가 만연하다는 일종의 지표로 보이기도 한다. 가스라이팅 개념의 대중화에 관해서는 한국 사회가 가족주의, 집단주의가 강한 문화권이란 점도 함께 살펴야 한다. 가족과 직장 등 소속 집단이 매우 중요하다보니 그 안에서 일어나는 침해나 폭력, 연결성 등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을 미국과 비교하자면 배우 우디 해럴슨을 일례로 들 수 있겠다. 아버지가 유명한 청부 살인범이지만 우디 해럴슨은 <베놈2: 렛 데어 비 카니지>에서 연쇄살인범을 연기한다. 우리나라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얼마 전 SBS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에 나와서 드라마 <더 글로리> 속 빌런들의 악랄한 심리를 분석하기도 했다.
= 여러 인물들의 심리를 분석했는데 여기서도 결국 가장 관심을 받은 내용은 박연진이 사이코패스냐 아니냐 하는 화두였다.
- 안전한 우리냐 위험한 타자냐 그 경계를 가려서 배척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질문같기도 하다.
= 좋은 지적이다. 카테고리화 해서 위험한 부류는 서랍에 넣고 닫아버리면 그나마 조금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섣부른 낙인과 분류가 요즘 미디어에서 사이코패스 캐릭터를 더 악랄하게 혹은 더 매력적으로 소비하려는 경향과 이어지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어떤 경우에 피해자나 유족은 두번 폭력을 당하게 된다.
- 범죄와 범죄자에 대한 대중의 관심에 긍정적인 측면은 어떤 것이 있을까.
= <모범택시> 같은 사적 제재의 서사가 각광받는 배경엔 인간 사회의 정의롭지 못한 일에 함께 개탄하고 공분하는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공적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남겨진 피해자들의 이야기에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아직 우리 사회에 많다.
- 범죄자를 분석하는 만큼 피해자와 그 주변인, 혹은 유가족을 위한 인식과 제도적 장치에 대해서도 더욱 적극적으로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다만 미디어의 관심은 한 쪽에 쏠려있다.
= <씨네21>과 만나기 전에 막 <그것이 알고 싶다>가 다녀갔는데, 마침 비슷한 내용을 다뤘다. 부산 서면 돌려차기 살인미수 사건 피해자의 현실에 관한 내용이다. 이 사건은 묻지마 폭행 범죄로만 알려졌고 심지어는 ‘부산 돌려차기남’이라고 호명된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희화화되기까지 했는데, 사실 CCTV를 보면 뒤에 성범죄 정황이 더 있다. 언론을 통해 사건의 일부만 일파만파 퍼지는 동안 가해자 입장의 변명이 보도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더욱 막막해진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고 왜 이런 일이 생겼으며 또 앞으로 어떻게 보상받을지 국가는 대답해주지 않는다.
- 현재는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사회심리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보면 젊은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는 커리어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다니다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수사심리학으로 전향했고 이후 서울대, 뉴욕시립대 등을 거쳐 박사 학위를 받은 뒤 31살의 이른 나이에 남성 교수진이 대다수인 경찰대학교 교수로 임용됐다. 전공을 과감히 바꾸고, 특히 그때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범죄심리학에 뛰어들 수 있었던 용기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것만은 항상 잘 알고 있으려고 노력했다. 주어진 수순만 잘 따르면 그대로 안정적인 선생님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때 나는 ‘지금이라도 영화를 공부하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후 범죄심리학을 공부할 때 여자는 이런 분야에 잘 맞지 않는다는 편견 섞인 말 같은 건 아예 생각도 안했다. 한번은 경찰대학교 면접에서 “여자인데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더라. 모든 면접관이 남자였다. 위축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 때 나란히 앉아있던 다른 면접관 한 사람이 동료의 질문을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듯한 분의 표정을 지었다. 창피해하는 그 표정 하나에 힘입어서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속으로 마음을 다질 수 있었다. 그나마 운이 좋았던 셈이라고 해야할까.
- 시나리오 집필의 의지도 밝혀왔다. 배우 진선규를 주연으로 구상 중이라고.
= 잔혹한 범죄자를 만드는 것은 심오한 악 같은 게 아니라 뿌리 깊은 열등감과 비겁함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를 오래 구상해왔다. 영화 <베테랑2> 자문으로 류승완 감독님을 만났을 때 회의가 끝나고 나서 슬쩍 시나리오 쓰는 법을 물었다. 인물 구축에 대한 감독님만의 철학부터 시나리오 쓰기에 관한 여러 현실적인 조언까지 엄청난 격려와 동기 부여가 되더라. 힘 닿는 데까지 꾸준히 써보는 게 목표디. 다만 인생을 오직 영화에 바쳐온 사람들 앞에서 나도 시나리오를 쓰고자 한다는 말을 하는 게 아직까지는 겸연쩍고 부끄럽다. 아침에 눈떠서 밤에 잠들기까지 그것만 붙드는 사람들의 세계 아닌가.
- 범죄심리학자가 범죄의 잔상에서 벗어나 쉬는 방법은.
= 그냥 집에서 아무 생각 없이 있는다. 기자님, 그게 정말 제일 좋지 않나. (웃음) 아, 언젠가부터 예능의 도움도 받고 있다. 특히 <나는 SOLO>에 완전히 심취해 있다.
- <지선씨네마인드2> 제작보고회에서 임신 소식을 전했다. 축하드린다. 프로파일링 업무에 새로운 변화가 있을까.
= 처음엔 출산할 때까지 강력 범죄 사건을 다루지 말아야 하나 고민도 했다. 결과적으로 평소처럼 일하고 연구하면서 너무 잔혹한 사진만 피하려고 한다. 그외엔 외면할 이유가 없다. 하루에 수십, 수백건의 범죄가 쏟아지는 곳,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니까. 아직 범인을 잡지 못해 편안하게 안식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많은 미제 사건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만삭인 상태에서 흉악 범죄자를 마주하고 사건 내용을 낱낱이 읽으며 재판하는 여성 판사들, 임신했다고 해서 생업을 포기할 수 없는 더 여러 가지 복잡한 조건 속에 있는 여성들도 생각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아무리 흉악 범죄라 하더라도 포커스를 잔혹성에 맞추지 않고 인물의 행동을 분석한다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생각보다 많은 것이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