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남녀가 바람과 돌이 많은 섬에 머문다. 그곳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성모(신석호)의 부탁 때문이다. 성모는 아직 무엇에 대한 영화를 만들지 모르고, 나머지 두 사람은 초조한 성모의 곁을 지킨다. 그러던 중 성모는 우연히 해변가의 쓰레기를 줍는 여자를 보게 되고 그녀의 선행에 감명받아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물안에서>의 상황은 단순하다. 한 남자가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자신을 신뢰하는 두 사람과 동행한다. 그리고 영화를 만든다는 결심과 만드는 것 사이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에는 영화를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홍상수의 많은 영화가 그랬듯 서로 떨어져 있던 시공간의 급작스러운 조우나 동일한 인물이 등장하는 ‘같은 날, 혹은 다른 어떤 날’처럼 가능 세계의 중첩을 형성하면서 변주되는 상황도 없다. 홍상수의 새 영화가 도착할 때마다 예외적인 것과 새로운 것을 탐색하면서 홍상수적인 것의 외연을 넓히는 일은 이제 다소간 무용한 작업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물안에서>가 홍상수의 다른 영화들과 구별되는 시각적 특징을 언급해야 한다면 영화 전체가 아웃포커싱으로 촬영되었다는 사실이다.
인물들의 윤곽선은 흐려지고 배경과 동등한 형상이 된다. 표정은커녕 얼굴조차 식별되지 않는 심도 없음의 세계는 차라리 인상주의 화폭처럼 보인다. 이 감각은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 시력 교정 기구 없이 영화를 볼 때 마주하는 한계와 유사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시각적 선예도를 의도적으로 떨어뜨리는 선택이 영화를 어렵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 영화의 상황이 매우 단순하거니와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가 화면처럼 희미하기 때문이다. 감탄사로만 이루어진 대화가 홍상수 영화에서 전례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물안에서>의 대화는 유독 서로의 말을 동어반복적으로 취하면서 대화이기보다는 말들의 반향을 만들어내기 위한 행위로 남는다. 이는 시각적 차원의 모호함을 청각적 차원에서 반복한다는 예감을 추동하면서, 스크린과 모종의 거리를 둔 채로 관객이 보고 듣는 것 모두가 흐릿한 풍경 속으로 잠수해버리는 것만 같다.
아웃포커싱은 본래 카메라가 초점을 맞춰야 하는 대상이 너무 가까이에 있거나, 반대로 너무 멀리 있을 때 생기는 화면의 효과다. 해변의 북적이는 관광객과 그들로부터 떨어진 채 쓰레기를 줍는 여자 사이에서 세계의 이상한 분리를 감지하는 성모처럼, <물안에서>는 너무 가깝거나 너무 먼 것 사이에서 어디로도 향하지 못하고 진동하는 영화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프레임 안에 있던 초점의 대상이 갑자기 이탈해버리고 중심을 잃어버린 화면의 상태와 영화하려는 시도다. 이는 삶의 방향을 잃고 거듭 죽음을 떠올리는 한 사람의 유령적인 상태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왜 원하지도 않는데 태어나서 잘해야 한다 그러고, 애써야 한다 그러고… 난 그거 이유 잘 모르겠거든.”
영화를 촬영하던 도중 성모가 불쑥 자신의 진심을 내민다. 초점 나간 화면과 모종의 연관을 띤이 고백은, 유일하게 남은 단 하나의 길로 향하게 되는 영화의 결말과도 연관이 있다.
CHECK POINT
<파장> (감독 마이크 스노우, 1967)<물안에서>의 아웃포커싱이 <파장>의 줌인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두 영화 모두 수평선의 무상함에 기대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하나의 효과에 대한 일관된 사용이 영화 전체의 운동과 일치하면서 영화의 질료를 노출시킨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